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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온 프란조16: 성 바오로 6세 교황 (1) 밀라노대교구장 시절 노동자들의 대주교라는 별명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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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9-28 ㅣ No.690

[창간 34주년 기획 “부온 프란조(Buon pranzo)!”] (16) 성 바오로 6세 교황 ① (제262대, 1897. 9. 26~1978. 8. 6)


밀라노대교구장 시절 ‘노동자들의 대주교’라는 별명을 얻다

 

 

- 1960년 밀라노대교구 대교구장 대주교로 재임할 당시 미국 인디애나 주 노틀담대학 총장인 시어도어 헤즈버그 신부를 만나는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대주교(훗날의 교황 바오로 6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끌고 마친 교황

 

1983년 10월, 로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내가 구입해야 될 서적 중에 하나가 바오로 6세 교황의 사도적 권고 「현대 복음선교」(Evangeli nuntiandi, 1975. 12. 08)였다. 다행히 한글 번역판을 가져갔으나 이탈리아어로 강의를 들어야 하니 성경과 함께 우선적으로 구입하였다. 당시 선대 요한 23세 교황과 후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인지도가 워낙 높다 보니 상대적으로 바오로 6세는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교황이었다. 학업을 이어가며 알게 된 그분과의 만남은 내겐 큰 은총이었고 행운이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이끌고 마쳤다는 것이 이미 기적이었다”라고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어느 주일 삼종기도에서 언급하였다. 보석 같은 공의회 문헌과 함께 그분의 회칙과 사도적 권고 등 수많은 문헌은 우리 교회에 힘이 되고 교회의 길에 이정표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분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신앙의 옷매무시를 가다듬게 된다.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Grotte Vaticane)에는 베드로 사도의 무덤을 포함하여 90명의 교황 무덤이 있다. 로마에서 살 때나 지금이나 바티칸에 갈 때면 나는 가끔 근처 꽃집에 들러 빨간 장미를 몇 송이 사 들고 마치 애인을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그곳으로 향한다. 현재는 같은 날 성인이 된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 두 분 모두 대성전 위 경당에 모셨지만, 당시에는 지하에 있었기에 한 송이 한 송이 그분들 묘비 앞에 올렸었다. 요한 바오로 1세께 드리고, 바오로 6세께도 한 송이…. 그리고 조용히 앉아 묵상하며 감사 기도를 드린다. 나만의 이 의식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30여 년간 교황청에 근무하며 두 교황 모셔

 

1897년 9월 26일 비 오는 금요일,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는 이탈리아 북부 브레샤의 콘체시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기자·국회의원을 지냈고, 신앙심 깊은 가톨릭 액션(Azione cattolica)의 지도자였다. 그는 아들이 진리를 쫓고 좋은 영향력을 주는 교회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랐다. 지방 귀족 출신 어머니 역시 여성 가톨릭 액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자녀들에게 늘 환대의 성품과 명상이 어우러진 신앙심을 길러 주었다. 아들이 사제품을 받은 후, 첫 미사 날, 제의 속에 입을 셔츠를 손수 지어 주었다. “바티스타, 내가 생각하는 사제의 삶은 결혼한 삶과 다르지 않다. 슬픈 시간도, 기쁜 시간도 있고, 또 출산의 기다림도 같단다. 이 셔츠는 나의 웨딩드레스로 만들었다. 충만한 자유로 선택한 너의 사제로서의 삶에 하느님께서 늘 함께하기를 빈다.”

 

몬티니는 25세에 교황청 국무원에서 일하게 되면서 이탈리아 가톨릭 학생 연합의 영적 지도신부가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파시즘 독재 정권이 권력을 잡아 국민의 입과 눈을 막는 형국이었다. 몬티니는 파시스트와의 대항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진리를 따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1924년 6월 어느 날, 그는 가톨릭 대학생들과 테베레 강가를 거닐며 파리에서 만났던 친구 쟈크 마리탱의 철학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들은 이 길은 사람들이 다녀야 하는 길이니 당장 해산하라고 명령하였다. 무력을 마다치 않는 살벌한 그들의 명령에 당황하지 않았던 몬티니는 강가의 둑 위로 펄쩍 뛰어오르며 “이러면 되겠습니까? 자, 이젠 행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지요?”라며 당당하게 그들을 쳐다보았다. 모든 학생들이 둑으로 뛰어올랐다. “마리탱이 말하길, 평화 안에서 정치사회적인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오직 자유일 것입니다. 이 자유를 통하여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공동 의지로 세상은 만들어져야 하니까요”라고 외쳤다.

 

몬티니는 근 30년간 국무원에 근무하면서 비오 11세 교황도 모시고, 후엔 비오 12세 교황 옆에서 함께하였다. 잠시지만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교황대사 수행직원으로 외교를 배웠으며, 특히 비오 12세 교황의 개인 비서로 있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수많은 전쟁포로와 난민을 위하여 도움 등을 요청하는 수 천 통의 편지가 도착하면, 일일이 읽고 비오 12세의 이름으로 답장을 하였다고 한다. 교황의 지시로 몬티니는 유다인과 반파시스트 운동가, 전쟁포로들의 신변 보호를 위하여 성당과 수도원을 그들의 은둔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로마의 산 로렌초 지역에 폭탄이 투하되면서 많은 사상자가 나고 그 일대가 잿더미가 된 곳에, 비오 12세 교황은 역사상 처음으로 바티칸 밖으로 나가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 달려갔다. 교황은 모든 것을 잃은 시민들과 같이 기도하며 얼마간의 위로금을 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다. 그때 교황과 함께한 몬티니가 대중에게 처음 영상에 비친 모습이 남아 있다.

 

- 교황청 국무원 총리 시절의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추기경(훗날의 교황 바오로 6세).

 

 

공장 찾아 다니며 노동자들 만난 대교구장

 

교황청 추기경단의 수석 추기경인 지오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1934~)이 증언하기를 “1957~1960년에 그분을 만났죠. 성격은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았습니다. 사회적이지 못한 것 같았지만, 심도 있는 대화와 영적인 면이 외려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어요. 나는 단지 그분의 행동만 보았는데, 정말 대단한 사람인 줄 금방 알았습니다. 그분의 시선은 깊었으며 지성 또한 빛이 날 정도였습니다.” 레 추기경이 몬티니를 만났던 시기는 몬티니가 밀라노의 대교구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이었다. 몬티니는 성 암브로시오와 성 가를로 보로메오에 뒤를 이어 밀라노대교구(밀라노를 비롯하여 이탈리아 북부에서 아직 암브로시오의 전례를 이어나가고 있다)의 제140대 대주교가 된 것이다. 당시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경제 엔진 역할을 하는 중요한 산업 도시로 자리 잡고 있었다. 몬티니는 공장을 찾아 노동자들을 만났다. ‘노동자들의 대주교’란 별명을 얻기도 한 몬티니는, 자동화된 산업에서 사람들이 자칫 잃기 쉬운 신앙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였다. ‘노동과 신앙’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그는 밀라노에서 1956년 5월 1일 처음으로 ‘노동자의 날’을 기념하였다. 후에 요한 23세 교황은 그를 1958년 12월 15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이렇듯, 몬티니는 주어진 자신의 소명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다. 다음 편에는 그가 교황으로서의 고뇌가 얼마나 컸는지, 그가 왜 ‘폭풍 속 교황’이라 불리웠는지에 대해 어떻게 써야할지 솔직히는 모르겠다. 몬티니가 10여 년간 밀라노 대주교로 있던 그곳의 대표적인 고기 요리인 코톨레타가 오늘의 레시피이다.

 

 

레시피 : 밀라노식 코토레타(Cotoletta alla milanese, 일명 ‘코끼리 귀’)

 

▲ 준비물: 뼈가 붙은 소 등심(또는 돼지고기), 버터 30g, 올리브유 한 큰술, 달걀 2개, 빵가루, 파르마산 치즈 가루, 밀가루, 소금.  

곁들임 채소 : 방울토마토, 바질, 올리브유, 발사믹 식초, 소금.

 

→ 고기를 방망이로 살살, 마치 코끼리의 귀처럼 넓게 펼쳐지도록 두들긴다. 양면에 밀가루를 골고루 묻힌 다음, 풀어 놓은 달걀에 적시고 빵가루와 파르마산 치즈가루(3:1, 빵가루 3, 치즈가루 1 비율로 골고루 섞는다)를 돈가스 형식으로 골고루 살살 눌러가며 묻힌다.

→ 팬에 버터와 올리브유를 녹인 다음 중불에 코 톨에 타를 넣고 익힌다. 양면이 노릇해지면 꺼내어 키친타올로 기름을 뺀 다음 접시에 담고 그 위에 소금을 살짝 뿌린다.

→ 곁들임 채소 : 싱싱한 방울토마토를 4등분 한 다음 바질을 손으로 두어 잎 뜯어 넣은 후, 올리브유, 발사믹 식초, 소금을 넣고 살살 버무린다. 먹기 전에 버무린다. 레몬 몇 쪽을 같이 접시에 올린다.

 

▲ 모니카의 팁

 

중세기 부자들은 음식에도 금을 뿌려 먹었다고 한다. 가난한 이들은 빵가루를 입혀 금색이 나도록 구워 마치 금을 입힌 것처럼 생각하며 먹었다 한다.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버터를 많이 쓰지만, 팬에 좋아하는 기름을 살짝만 둘러 굽거나, 올리브유를 두르고 오븐에 구우면 훨씬 라이트하게 먹을 수 있다.

 

이탈리아 밀라노 시에서는 2008년 3월 17일, ‘밀라노식 코톨레타’를 공식 호칭으로 결정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9월 25일, 고영심(모니카, 디 모니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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