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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온 프란조17: 성 바오로 6세 교황 (2) 세상 향해 교회의 문 활짝 연 대화의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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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0-05 ㅣ No.691

[창간 34주년 기획 “부온 프란조(Buon pranzo)!”] (17) 성 바오로 6세 교황 ② (제262대, 1897. 9. 26~1978. 8. 6)


성 바오로 6세, 세상 향해 교회의 문 활짝 연 ‘대화의 교황’

 

 

- 성 바오로 6세 교황.

 

 

1963년 6월 21일, 몬티니는 제262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전의 중앙 발코니에서 알프레도 오타비아니(Alfredo Ottaviani, 당시 신앙교리부 장관) 추기경은 “여러분에게 커다란 기쁨을 전합니다. 우리에게 교황님이 계십니다! 탁월하시고 존경하는 분, 조반니 바티스타, 성스런 로마 교회의 몬티니 추기경입니다. 교황명은 바오로 6세로 정했습니다”라고 선포하였다.

 

교황 피선 며칠 뒤, 바오로 6세 교황은 영성 피정을 하였다. 그는 타오르는 촛불을 바라보며, “촛불은 혼자 타고 있지만, 또 다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다른 이들을 위하여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하며 그의 깊은 명상 안에서 자신의 교황으로서 역할을 되새겼다.

 

 

‘첫 번째’라는 호칭 가장 많은 ‘현대의 교황’

 

그는 ‘첫 번째’라는 호칭이 가장 많이 따라다니는 ‘현대의 교황’이었다. ‘공의회의 교황’으로, ‘대화의 교황’으로 불리는 등 후대 교황들의 발판이 되어줬다. 선종한 요한 23세 교황이 개막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첫 회기(1962~1963)에 이어 성공적으로 공의회를 이끌어 나가고 마무리하는 데 초인적인 힘을 기울였으며, 공의회 교부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렴하는 한편 그들의 자유를 존중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의회가 풍성해졌음을 부인할 수 없는데, 당시 항간에서는 그가 엄격하고 차가워 보인다는 비판도 하였지만, 교황은 ‘하나 된 교회’를 공의회 결과로 이끌어 냈다. 프랑스 신학자이자 도미니코회 사제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이브 콩가르(Yves Congar) 추기경은 “바오로 6세 교황의 가치는 시간이 흐르고 후에 나타날 것”이라고 하였으며, 프랑스의 평신도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장 귀통(Jean Guitton)은 “그가 평온한 마음과 영혼의 소유자였으며, 어떠한 결정 전에 고통이 수반되더라도 반드시 충분한 숙고 없이는 절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서두르지 않고 결정하기 전, 더 깊게 여러 방면에 대해 숙고했다. 아직 공의회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바오로 6세 교황은 그의 첫 번째 회칙인 「주님의 교회(Ecclesiam Suam)」를 발표하였다. 교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을 포용해야 하며, 타 종교와의 대화는 물론 새로운 선교와 더 거룩하고, 힘 있는 믿음으로의 교회의 쇄신을 피력한 회칙이었다.

 

1964년 1월 교황 선출 뒤 첫 사목방문지인 예루살렘으로 향한 바오로 6세 교황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타나고라스 1세와 만나 기도전례에 함께하고 있다. [CNS 자료 사진]

 

 

또한, 그는 대화로 세상을 열고자 했던 ‘대화의 교황’이었다. 누구와도 기꺼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준비했고 남녀노소 각자의 역량과 시간을 교회가 존중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교회의 길을 대화로 열기를 원했으며, 누구나 교회의 문에 주저 없이 들어오기를 바랐다. 교회는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고, 대화할 자세를 갖추기를 원했다. 그 목적으로 교회 역사상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비행기를 타고 1964년 1월 5일 자신의 첫 번째 사목 방문지인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이 여행은 큰 의미가 있었다. 교회가 주님이 사셨던 곳으로 찾아가 그의 기원이 되는 곳을 걸어본다는 것과 1000년 만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를 만남으로써 형제인 교회를 확인하였다. 이후 6대륙을 방문한 최초의 교황으로서 후임 교황들에게 폰테(다리) 역할을 해주었다. 순례를 통해 가난한 이들을 직접 목격하고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을 발표했다.

 

 

교황으로서는 처음 1965년 UN에서 연설

 

또 1965년 10월 4일,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유엔(UN)에서 연설한 것도 교회가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염려로 “전쟁은 더는 없어야 합니다”라는 그의 유명한 프랑스어 연설은 세상에 평화를 호소하는 기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인공피임을 금지한 바오로 6세의 회칙 「인간 생명(Humane vitae)」을 발표한 이후, 많은 사람이 그를 가혹하게 비판하였다. 공의회를 마무리한 것에 대한 호평에서 1968년 이후 비평으로 이어졌지만, 그는 항상 교회의 교의를 지키고 싶어 했다. 다수의 의견이라고 해서 하느님의 법이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피땀을 흘리며 생명을 수호하는 회칙에 서명하였다. 지금은 교회가 그의 위대한 결정에 감사하고 있다. 당시 얼마나 많은 비평과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는지 마치 그가 탄 바티칸이라는 배가 거친 파도에 휩쓸리고 폭풍 속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흔들림 없는 영성으로 지켜나갔다. 그렇다고 해서 들려오는 비판을 그가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외려 자신의 책임을 더 깊게 가지며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당시 제노바교구장 주세페 시리(Giuseppe Siri) 추기경은 “바오로 6세의 마지막 삶은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1965년 5월 2일 자로 바오로 6세의 ‘사임’ 편지 공개)도 그러했지만, 그의 정신적 고통은 교회 문제에 대한 근심이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교황으로는 처음으로 기쁨에 관한 사도적 권고 「그리스도인의 기쁨(Gaudete in Domino)」를 발표했으며, 그는 그리스도가 세운 교회를 위해 그의 전 생애를 살았고 사랑했다. 또 변해가는 세상을 위해 이론적 논리가 아니라 세상이 진정으로 ‘사랑의 도시’가 되기를 바랐다. 공의회 직후, 1965년 3월 7일 로마의 한 성당에서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미사를 시작함으로써 곧이어 전 세계 교회가 자국 말로 미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변화를 꾀하였다. 또 교황과의 만남을 매주 수요일에 공식화하고 그 시간을 통하여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 직접 교황이 교리를 하였다.

 

 

1978년 8월 6일 하느님의 부르심 받아

 

바오로 6세 교황의 평생지기로 이탈리아 총리를 역임했던 친구 알도 모로(Aldo Moro)가 극좌 테러단체 붉은여단에 납치돼 54일 만에 살해당하자 그의 죽음에 애통해 했던 바오로 6세는 그가 죽은 지 한 달 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인 1978년 8월 6일에 가스텔 간돌포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품에 안겼다. 그의 고백대로 그는 온 힘을 다해 교황으로서 최선을 다했고, 교황의 의무와 책임을 지켰다.

 

마지막으로 공개된 유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죽음의 신비에 시선을 고정합니다. 그 빛은 겸허하고 고요한 믿음으로 빛납니다. 이 신비를 통해 그동안 나의 삶에 반영되어 온 진리를 느끼며,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드러내신 죽음의 승리자께 감사드립니다. 죽음 앞에, 현세로부터의 완전하고 결정적 이별에 직면하니, 이 덧없는 존재에게 선물이며, 행운이며, 아름다움 그리고 운명에 감사해야 할 의무를 느낍니다. 주님, 삶에 저를 불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해주시고, 저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시고, 충분한 생명에 이르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성 바오로 6세의 고향인 브레샤(Brescia, 롬바르디아 주에서 밀라노 다음의 도시)의 전통 음식인 ‘카푸’가 오늘의 레시피이다.

 

 

레시피 : 브레샤식 카푸(Cap alla bresciana)

 

▲ 준비물 : 양배추, 마늘 1톨, 마른 빵 간 것(바게트나 치아바타), 간 치즈(파르마 산), 버터, 달걀, 소금, 후추

 

→ 양배추의 넓은 잎 몇 장은 소금을 넣은 끓는 물에 데쳐서 찬물에 담가 식히고 물기를 키친타올로 걷어낸다.

→ 버터를 녹인 팬(중약불, 약간 약한 불)에 마늘 1톨을 칼로 통째로 으깬 다음에 넣고 황금색이 되면 꺼내고, 줄기를 뺀 얇은 양배추 잎을 썰어 뒤에 볶는다. 잘게 부순 빵도 같이 넣고 볶은 다음에 식힌다.

→ 식힌 재료에 달걀, 소금, 그리고 후추를 넣고 버무려 속을 만들어 놓는다.

→ 데친 양배추 가운데에 속을 한 숟가락씩 넣고, 우리식으로 보자기 싸듯 말아 열리지 않게 실로 돌려가며 묶는다. 이어 펄펄 끓는 물에 10분간 삶아 내어 접시에 담아낸다. 그 위에 살짝 올리브유를 얹는다.

 

▲ 모니카의 팁

 

소작농의 가난한 집 아이는 엄마가 부자에게 파는 진미의 닭요리를 먹어 볼 수가 없으니 매일 징징대며 불평을 했다고 한다. 아이가 슬퍼하는 모습에 마음 아파하던 엄마는 먹다 남은 빵과 양배추로 속을 채우고 잎으로 싸서 삶아 배불리 먹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카푸가 탄생했다고 한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고향인 브레샤와 근처 북부에 있는 성 요한 23세 교황의 고향 도시인 베르가모에서는 이 전통적인 카푸가 유명하다. 지금은 카푸의 속을 선호하는 재료를 넣어 만들기도 하고, 오븐에 구워 먹기도 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10월 2일, 고영심(모니카, 디 모니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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