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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29: 조선을 위한 요동대목구 필요성 확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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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29) 조선을 위한 요동대목구 필요성 확신 유럽인 선교사 잡으러 온다는 첩보 듣고 모방 신부와 토굴로 피신
- 브뤼기에르 주교는 서만자가 프랑스와 마카오보다 안전하다고 했지만 늘 박해의 위협이 있었다. 사진은 문화혁명 때 반쪽으로 쪼개져 버려졌던 성직자들의 비석을 다시 세워놓은 서만자 성직자 묘역.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편지
1835년 1월 북경에 온 조선 교우들과의 면담을 왕 요셉을 통해 잘 마무리한 저는 2월 8일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주재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그간의 일을 알리는 편지를 썼습니다.
“조선 교우들은 올해 저를 입국시킬 준비가 돼 있습니다. 그들은 제게 약속했고, 국경에서 서로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식과 신호들을 알려줬습니다. ⋯이곳 서만자에서 저는 프랑스에서보다도, 마카오에 계신 신부님보다도 더 안전하게 있습니다. 서만자 교우들은 저와 모방 신부를 특별한 기쁨을 갖고 대합니다. ⋯신부님은 페레이라 주교에게 전적으로 마음을 보여주지 마십시오. 그는 우리를 위하는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소심하고 순진합니다. 사람들이 신부님께 저희에 대해, 그리고 신부님께 심어주려고 하는 두려움에 대해 보고한 내용 모두를 경계하십시오. 어쩌면 사람들은 진실을 말한다는 핑계로 신부님이 실수를 저지르도록 유도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겪은 모든 불의의 사고는 제 길잡이들의 지나친 소심증과 미숙함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조선 선교를 자원한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비난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저 혼자입니다. 샤스탕 신부를 불러들인 것도 저입니다. 제가 얼마 후 샤스탕 신부에게 페낭에 머물러 있든지, 아니면 적어도 새로운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마카오에서 여정을 멈추라고 편지를 썼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그가 제 편지를 받아보기 전에 길을 나서게 해버리셨습니다.
그는 지금 산동에 있으면서 사제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교우들은 그를 무척 따릅니다. 그가 중국에 혼란을 초래할까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제가 볼 때 그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조선에 좋은 일들만 할 것 같습니다. 모방 신부에 대해서는 같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는 독특한 성격을 지녔습니다. 이것만 빼면 그는 거룩한 사제의 장점과 훌륭한 선교사의 장점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페레이라 주교, 아직도 추천서 보내지 않아
조선 신학생들을 조선에서 나오게 해 곁에 둘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을 어디에서 교육해야 합니까? 많은 이유로 그들이 북경에도, 마카오에도, 페낭에도 가서는 안 됩니다. 복건은 아직도 너무 덥습니다. 사천은 너무 멉니다. 남은 곳은 ‘요동’입니다. 포르투갈 사제들은 요동 지방에 대한 재치권이 있는 한 이곳에 조선 신학교 세우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요동이 가장 적절한 곳입니다.
제가 조선에 입국한 것을 알게 되면 앵베르 신부를 즉시 부르십시오. 저희에게는 이런 강인한 기질을 가진 선교사가 필요합니다. ⋯제가 조선에 입국하기도 전에 박해를 겪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선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십시오.”
저는 조선 교우들과 함께 아직 북경에 머물고 있는 왕 요셉에게 남경으로 가서 그곳에 두고 온 저의 소지품을 가져와 조선 교우들에게 넘겨주라고 지시했습니다. 조선 교우들이 제 물품을 가져가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왕 요셉은 돈 한 푼 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2월 25일 남경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가난한 주교와 가난한 조선 교회를 위해 그는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제가 여행 경비를 지출해도 된다고 허락했지만, 그는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왕 요셉은 황제의 쌀을 싣고 가는 배 중 한 척에 탑승해 되돌아오게 돼 있었습니다. 선장과 선원 모두가 교우였습니다.
1835년 3월 1일 유진길을 비롯한 조선 교우들이 귀국하려고 북경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남경교구장 겸 북경교구장 서리인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는 제가 요동 지역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조선 국경까지 갈 수 있도록 허가하는 추천서를 아직도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페레이라 주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와 말해 본 적도 없습니다. 아울러 그의 권리를 침해한 적도 없습니다. 저는 편지를 통해서만 그와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그가 왜 저를 경계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3월 말께 샤스탕 신부가 제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페레이라 주교가 주교님 돕기를 거절하다니 저는 놀랐습니다. 제가 북경에 있을 때 요동으로 가는 남경 주교의 연락원, 곧 산서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님께 조선 교우들의 편지들을 전해 준 바로 그 사람이 제게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남경 주교는 자신의 편지를 갖고 있지 않는 한 그 어떤 신부도 받아들이지 말라는 편지를 요동 교우들에게 보냈다는 것입니다. 저는 몇몇 교우들의 이름과 사는 곳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얻으려고 했지만 어떠한 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연락원에게서는 한마디도 끌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6월 17일 자신들을 잡으러 온다는 첩보를 듣고 모방 신부와 함께 토굴에 은신했다. 사진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서만자 토굴들.
조선 선교 위해 직할 요동대목구 설정 필요
이 사실로 다음과 같이 결론낼 수 있습니다. 페레이라 주교가 요동 교우들에게 자신이 쓴 추천서를 제가 갖고 있지 않는 한 저든 다른 어떤 선교사든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에게 그런 추천서를 요청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으면서도 제게 추천서를 써주기를 거절한 것이 사실이라면, 직접적으로는 제가 요동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또 간접적으로는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음도 역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교황 파견 선교 사제들이 안전하게 지속해서 조선에 입국하고, 선발된 조선의 젊은이들이 안정된 신학교에서 사제로 양성되기 위해선 교황청 포교성성이 요동 땅에 새로운 대목구를 설정해 직할 선교 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관할해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산서에 있을 때 오랫동안 대목구장 요아킴 살베티 주교를 도왔던 한 회장이 제가 원할 때 조선 국경 지대에 가서 집 한 채를 빌려 놓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제가 이런 도움을 주고자 했던 유일하면서도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3월 30일 연락원 한 명을 산서로 보내 그 회장에게 제 뜻을 밝히고 그를 데려오게 했습니다. 저를 도울 사람들이 5월 11일 서만자에 도착했습니다. 회장과 연락원 2명은 5월 13일 동부 달단 곧 요동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서만자에서 출발한 지 사흘 후 장가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중국인들조차 고생스럽게 넘는 만리장성 관문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는 통행증을 발급받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녹록지 않았습니다. 이 통행증을 발급해주는 관리는 부왕으로부터 모든 여행자, 그중 특히 산서에서 오는 사람들을 조사할 것과 그들이 달단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만리장성으로 가는 모든 길목을 엄중히 지키라는 명령을 막 받았습니다. 그는 또 모든 주막에 대해 가택 수색을 하라는 명령도 받았습니다.
이 조치는 1835년 4월 초 산서에서 백련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산서 관장과 그 가족들은 물론 호위병까지 참살했습니다. 이후 그들은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습니다. 이 도망자들이 북경을 통해 동부 달단으로 숨어들까 봐 모든 만리장성 초소들의 검문이 심해진 것입니다. 다행히 회장 일행은 통행증 없이도 만리장성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깊은 토굴에 교회와 관련한 모든 물건 숨겨
백련교도의 난으로 잠잠했던 청나라 조정의 교회 박해가 다시 심해질 조짐을 보였습니다. 1835년 6월 17일 저녁 7시께 은밀하게 전갈이 왔습니다. “이 지방 태수가 서만자에 유럽인 선교사들이 숨어있다는 보고를 받고 고을 관장에게 명령을 내려 즉각 붙잡아 오게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도주하시고 가능하면 인적 드문 곳에 숨어 계십시오. 어쩌면 관장과 포졸들이 주교님을 잡으려고 길에 올랐는지도 모릅니다. 이 소식은 확실합니다. 이 명령을 받은 관장의 수하 장교가 그 지역 교우 지도자들에게 경계를 확실히 하고 안전 대책들을 마련하라고 몰래 일러 줬습니다.”
저와 모방 신부는 이 말을 듣자마자 교회와 관련한 모든 물건과 직간접적으로 유럽인이 있다는 의심이 들게 하거나 그런 생각을 일깨울 수 있는 모든 것을 급히 깊은 토굴 속에 숨겼습니다. 이 일을 마치자 새벽 1시가 됐습니다. 그리고 저와 모방 신부도 서만자 교우들의 안내에 따라 소리 나지 않게 토굴 속으로 피신했습니다. 교우들은 저희가 숨어있는 토굴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동태를 살폈습니다. 포졸들이 이곳으로 오면 우리는 곧바로 산으로 도망치려 긴장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9월 1일, 리길재 선임기자] 0 33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