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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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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산책36-37: 성사실(聖史實) 이콘 해설 - 예루살렘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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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10-01 ㅣ No.1110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36) 성사실(聖史實) 이콘 해설 - 예루살렘 입성


나귀 타고 예루살렘 입성하는 예수님

 

 

 

- (작품 1) 예루살렘 입성, 템페라, 24,5 x 21,5cm, 16세기 노브고로드 지역, 레클링하우젠 이콘 미술관, 레클링하우젠, 독일

 

 

이콘 속 마중 나온 사람들은 아직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과 빛을 향해 다가오는 이방인

 

1. 기원(起源)

 

“보라, 주님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셨다.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이사 62,11)

 

이 축제는 동방 교회에서는 6세기부터 지냈으며 서방 교회에서는 7세기부터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콘은 4세기 중반부터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오시는 길 바닥에 옷을 펴 깔았으며 종려 가지를 흔들어 기쁨을 나타내는 형태로 그려졌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축제는 승리한 왕의 개선을 환영하는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승리의 길로 들어오십니다. (작품 1)

 

 

2. 구성과 상황

 

집들과 나귀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올리브 산 벳파게에 다다랐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말씀하셨다. ‘너희는 맞은 쪽 동네로 가거라. 매여 있는 암나귀와 그 곁의 어린 나귀를 곧바로 보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풀어 나에게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무어라고 하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라고 대답하여라. 그러면 그것들을 곧 보내줄 것이다.”(마태 21,1-3)

 

복음서에서는 나귀와 새끼가 있다고 하였는데 어느 나귀인지 기록하지 않았지만, 마르코·루카·요한 복음에서는 아무도 타지 않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것으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349-407)는 “나귀 주인들은 아마도 가난했을 터인데 어째서 아무 말 없이 내주었을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준비된 것처럼 나귀를 내줄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을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예언서에 이르듯이 주님께서 나귀 타고 오시는 것을 이루시기 위해 모든 것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지만, 그분이 다윗의 영광을 되찾아주실 분이라고 믿는 분위기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많은 사람이 그분을 더욱 따르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그 표징을 일으키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바리사이들이 서로 말합니다. “이제 다 글렀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소.”(요한 12,17-19 참)

 

이때 끌려 나온 나귀는 우리 자신이라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설명합니다. 나귀는 길을 가다가 깔려 있는 풀을 먹으려 고개를 숙이기도 합니다. 나귀는 인간의 본능을 대변합니다. 즉 삶,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인간의 물욕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정신(영)과 물질, 즉 나귀를 타고 계신 그리스도와 인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교회가 그 의미를 채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시켜 나귀를 끌어내 당신 앞으로 오도록 만드셨습니다. 당신 앞에 오게 하심으로써 비로소 눈이 뜨여 주님을 알아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백성으로, 원래 깨끗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 나아감으로써 깨끗해집니다. (작품 2)

 

그분은 임금님으로 오시지만 결코 권력을 위한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실 영광의 임금님으로(요한 12,16) 오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의 열렬한 환영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때를 알지 못함을(루카 19,44) 한탄하십니다. 세상은 진정한 빛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요한 1,10)

 

그러기에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는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2코린 4,6)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 (작품 2)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템페라, 제대에 들어가는 문 한 부분의 성인, 트레차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러시아

 


- (작품 3) 예루살렘 입성, 템페라, 18세기, 리보르노 성당, 리보르노, 이탈리아

 

산과 사도들(작품 3)

 

실상 예루살렘 주위에 산은 있지만 그림에서처럼 높고 위엄을 갖추고 오르기 어려운 산은 없습니다. 그 산은 모든 것보다 높이 솟아있는 올리브 산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데 이 산은 메시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즉 시온산으로, 하느님께서 계시는 산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거룩한 산 위에 세워진 그 터전, 주님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성문들을 사랑하시니 하느님의 도성아 너를 두고 영광스러운 일들이 일컬어지는구나.”(시편 87,1-3)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이사 2,2-3)

 

그 산은 메시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메시아는 지금 나귀를 타고 오시는데, 따라서 받으실 고통도 산처럼 크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콘에서 산은 도성을 둘러싸고 시편(125, 1-2)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말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시온산 같아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서 있으리라. 산들이 예루살렘을 감싸고 있듯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감싸고 계시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 산은 예루살렘보다 넓게 잡고 산기슭이 예루살렘을 둘러싸듯 내려가고 있으며 제자들도 주님 뒤에 모여 있습니다. 그분은 나귀에 걸터앉으시고 몸은 제자들을 향해 있는데, 그러면서 새로운 불림을 받아야 할 사람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 제자들은 이미 부름을 받은 새 민족, 즉 예수를 믿고 그분께 의탁하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예루살렘성에는 많은 사람이 환호하며 나와 있습니다. 그 성은 지상의 성이 아니라 천상의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 문은 열려 있지만, 아직 어둠 속에 갇혀 있습니다. 이제 그 성은 환해져야 합니다. 이제 빛이 들어가시면 그 어둠은 가실 것입니다. 문이 열려 있음은 우리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음의 문이 열려 있지 않으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그 은총의 빛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로써 그분을 맞으러 나온 사람들의 문이 열림과 차츰 그분의 나라가 다가옴을 상징합니다.

 

예루살렘은 장차 다가올 하느님 나라이며 하느님의 뜻이 그 나라에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참조)라고 하신 것처럼 쉴 곳을 마련하기 위해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길 바라고 쉬실 자리를 내드려야 할 것입니다.

 

마중 나온 사람들은 아직 어둠 속에 헤매는 백성과 빛을 향하여 오는 이방인, 즉 아직 예수님 앞으로 오지 못한 사람을 나타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9월 29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37) 성사실(聖史實) 이콘 해설 - 예루살렘 입성


군중 가운데 고개를 돌린 저 사람은 누구인가

 

 

 

- (작품 1) 예루살렘 입성, 템페라, 62x45cm, 이콘 마오로 미술관, 안성, 한국.

 

 

올리브 가지와 예수

 

하느님께서는 가르침을 업신여기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황폐해질 때까지 그 나라를 처벌하십니다. 모두가 뜯어 먹혀도 끝내 이사이 그루터기 뿌리를 남기는 자비를 보이시어 새싹이 돋아나기를 기다리십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이사이의 후손인 “다윗의 아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으로 칭송하면서 나뭇가지를 흔들고 길에 깔아 환호를 올립니다. (작품 1)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이사 11,10) 예수님께서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새 가지이고 우리를 어둠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 새 가지는 이제 충분히 커져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채우는 역할을 합니다.

 

예루살렘 입성 이콘에서는 예수님만 후광을 그립니다. 이는 탈출기에 드러난 하느님의 이름,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를 드러내 그분만이 오직 거룩하심을 나타냅니다. 그분의 자줏빛 옷은 임금의 권위를 나타내며 신성을 의미합니다. 푸른색은 하느님의 색깔로 조용함·차분함을 의미하며, 그분은 하느님이시지만 사람으로 오셨다는 인성을 나타냅니다. 또 푸른 옷을 겉에 두름으로써 밖으로 드러나신 하느님, 즉 신성을 인성으로 감추어 우리 곁에 계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오른손으로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형태로 축복합니다. 왼손에는 빚문서를 들고 계십니다. 그분은 본인을 담보로 우리들의 죄를 담은 빚문서를 받아오시어 우리들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구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콜로 2,14 참조) 나귀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그분의 자세는 백마 위에 똑바로 앉아 용감하게 개선하는 왕이나 장군의 모습이 아니고, 겸손한 평화의 왕으로 그 모습이 여유가 있으면서도 부드럽습니다.

 

 

어린이와 백성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어린이 축제처럼 어린이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눈먼 이들과 절름거리는 이들을 고쳐주십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며, 또 성전에서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라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불쾌해하며, 예수님께 ‘저 아이들이 무어라고 하는지 듣고 있소?’(마태 21,15-16)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편을 들어 어린이 젖먹이들이 노랫소리로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하게 하셨습니다.(시편 8,3 참조) 이런 말씀을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있느냐고 하십니다.

 

가운데 올리브 나무는 밑동이 잘린 후 다시 돋아난 새싹이 이미 크게 자라 왕성한 나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때가 이르렀음을 상징합니다. 어린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던져 흔들어야 할 나뭇가지를 제공하고, 옷을 길에 깔아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라고 외칩니다. 발에서 가시를 빼내는 어린이는 길거리 장애물과 가시들을 치워 길을 깨끗이 정리한다는 상징적인 표현이며, 옷을 깔아 바치는 것은 내 마음을 바치는 것이고, 나뭇가지를 흔들며 기뻐하는 것은 주님이 (내 마음에) 오심을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다투는 아이들은 어린이의 천진성을 엿보게 합니다. 아이들의 다툼은 주변 관계있는 사람들과의 갈등을 상징하면서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갈등을 풀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외적으로 주님이 오시는 과정을 상징하지만, 한편 내적으로는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신다면 어린이처럼 순수하게 기꺼이 내 정성을 바치고 내 마음을 청소하고 이웃 간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군중 가운데 뒤를 바라보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군중이 환호하는 이 광경을 어이없어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존재를 무시하면서 환호의 의미를 깎아내리는 바리사이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마태 21,10.16; 루카 19,39) 이콘에서 고개를 돌리는 것은 하느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에서 마중 나온 사람들은 기쁜 표정 대신 저마다 어려움을 하소연하듯 침울한 표정입니다. 그들은 난처한 처지에 빠져있어 필사적으로 혁명적인 지도자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상 다윗을 들먹이며(시편 118,25-26) 다윗이 이룩했던 영광을 백성들이 생각하고 있었음을 복음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마태 21,9; 마르 11,10) 그러나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실 영광의 임금으로 오시고 있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의 입장은 다릅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요한 11,47-48) 사람들은 성스러움과 명성을 종종 혼동하고 있습니다. 성스러움이란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이지만, 명성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 명성이 주는 빛 때문에 흔들리고 맙니다. 그것은 자주 무서운 폭도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 환호의 물결이 매우 위험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민중과 더불어 이치를 따져 설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 민족주의를 중화시킬 의도로 예언자적 행위를 하시게 됩니다. 그의 행위는 즈카르야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그분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즈카 9,9-10)

 

그러나 예수님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이스라엘 왕국을 지상에 건설함으로써 예언이 성취될 것을 고대했지만, 주님은 반대로 영적인 구원을 통해 온 인류의 평화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작품 2) 구세주 그리스도, 템페라, 51x41,5cm, 17세기 러시아 작품, 레클링하우젠 미술관, 독일.

 

 

3. 되돌아 보기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은 평화를 주기 위해, 기꺼이 다가올 영광을 받기 위해, 어둠을 밝히러 오십니다. 우리에게 보여 주셨던 그의 힘은 그의 사랑이었고, 그의 장엄함은 그의 은혜이고, 그의 왕권은 그의 성스러움이고, 그의 얼굴은 ‘단 하나의 얼굴’로 하느님의 영광에 빛나는 선한 분의 환한 빛이 있습니다. (작품 2)

 

예루살렘 입성에 이어 예수님께 온 그리스 사람이 몇 명 있었습니다. 성전에 의하면 그들은 본국 왕의 병을 고치고자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러 왔다고 전합니다. 그들은 당시의 험악한 분위기에서 예수님의 망명을 돕고 또 그들의 왕을 치유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이 이방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3-24)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10월 6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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