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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시성] 교회는 왜 시복시성을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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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고 헤아리고] 교회는 왜 시복시성을 하는가?
역사를 서술하는 데에는 두 가지 축이 있는 것 같다. 당연히 상호 관계를 분리할 수는 없지만 무게 중심을 역사적 사건 혹은 역사적 인물에 두는 서술 방식이다. 인물을 중심으로 할 때 위인전이 만들어진다. 이들은 내 인생의 우상, 롤 모델(role model), 모범을 설정하는 기초가 된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역사 안에서도 성인전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내 신앙의 우상, 롤 모델, 모범을 설정하기 위해 세례를 받을 때 교회의 이름으로 성인의 이름을 받게 된다. 그래서인지 상대방의 세례명을 들으면 왠지 그 사람 안에서 그 성인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 같다.
이처럼 교회는 이천 년의 긴 역사 속에서 우리 가운데 탁월한 신앙의 모범이 되는 분들을 성인으로 모셔 왔다. 그런데 간혹 성인들은 이미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시는데 우리가 굳이 그분들에게 영광을 드리고자 시복시성을 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이 있다. 당연한 의문이다. 그래서 시복시성은 성인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사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설명이 더 적합한 것 같다. 성인들의 삶은 우리 신앙 여정의 길잡이,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사제나 수도자만이 아니라 신자들도 성인의 길, 완덕의 길을 향한 보편적 성화 소명이 있다고 자주 말씀하신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거룩함을 잃거나 포기해 버린다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이웃집 성인’이 되자고 권하신다. 각자의 일상 안에서 믿음, 희망, 사랑의 증인이 되어 ‘이웃집’에 존재하는 ‘일상’의 성덕으로 교회를 더욱 부유하게 하자고 하신다.
이렇게 일상의 성덕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예외적으로 탁월한 모범을 보인 사람들에게 성인의 지위에 올려 공경을 드린 전통은 초기 교회부터 시작되었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 자유를 얻기 전까지는 박해 시대였다. 따라서 순교자들에 대한 공경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신자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시작되었다. 사도행전에 소개되는 첫 순교자 스테파노를 비롯하여,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님의 제자 열두 사도 대부분과 바오로 사도 역시 순교자였다. 사도들의 후계자인 폴리카르포1)(Polýkarpos, 69~155) 등 초기 교부들과 여러 교황도 순교하였다. 일반 신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로마 시대의 4대 동정 순교자로 불리는 체칠리아, 아가다, 루치아, 아녜스 성녀는 모두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이다.
마침내 종교 자유를 얻은 4세기 초부터는 순교자 공경뿐 아니라 증거자들에 대한 공경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교리의 탁월한 수호자, 사도적 열정과 복음 정신이 뛰어난 이, 참회와 수행으로 모범적 삶을 영위한 이 등 영웅적 덕행을 실천한 분들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이 지난 이천 년 동안 시복시성의 두 유형이었다. 그런데 2017년부터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셋째 유형인 ‘목숨을 내놓은 이들’이 추가 되었다. 곧 ‘주님이신 예수님의 발자취와 가르침을 가장 가까이 따르며, 다른 이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자발적으로 자유로이 내놓으며 죽음에 이른 그리스도인들’까지 확대되었다.
한국천주교회 시복시성의 역사도 보편교회와 마찬가지로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기에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으로 시작되었다. 1925년 79위의 순교 복자가 탄생하였고, 1968년 24위의 순교 복자가 추가되었다. 이들이 1984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03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리고 다시 2014년에는 124위 순교 복자가 추가로 탄생하였다.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로 처음 시복을 추진하였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2016년 성덕 심사를 통과하여 가경자(可敬者)가 되었고, 기적 심사를 거치면 마침내 복자가 된다. 아울러 현재 한국교회가 추가로 진행 중인 시복 안건은 마지막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 133위와 6.25 전후의 순교자 중심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와 북한 덕원 베네딕토 수도원 순교자 38위 안건이 있다.
최근 서울대교구에서는 자체적으로 증거자들에 대한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초대 조선교구장이었던 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와 11대 서울대교구장이었던 하느님의 종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안건이다. 아울러 한국순교복자 가족 수도회의 청구에 따라 창설자 방유룡 레오 신부의 시복 추진도 준비하고 있다. 또한 한국교회 신자 단체들도 평신도들 가운데 탁월한 신앙의 모범을 남긴 분들에 대한 시복 추진 의향을 직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와는 별개이지만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역시 한국교회 평신도 가운데서 신앙적 모범이 되는 분들을 선택하여 2022년부터 기림 미사를 매년 봉헌하고 있다. 그동안 안중근(토마스) 의사, 선우경식(요셉) 요셉의원 초대 원장, 김홍섭(바오로) 판사, 구상(세례자 요한) 시인, 장영희(마리아) 교수의 기림 미사가 봉헌되었다.
세상 속에서 복음을 살고 꽃 피우고 떠난 성인, 복자, 가경자, 하느님의 종 등 모든 신앙의 증인들은 교회와 우리 자신을 부유하게 하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이 은총의 보화로 한국교회가 더욱 성장하고 성숙하기를 기원한다.
1)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 스미르나의 주교이자 신학자. 사도 요한의 제자. 사도 요한을 위시하여 예수님을 직접 본 제자들과 많은 접촉을 통해 정통 초대교회의 신앙의 가르침을 받은 인물. 사도 시대와 그 이후를 잇는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에 중요한 인물이자 뛰어난 저술가로, 로마의 교황 클레멘스 1세와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와 함께 1~2세기 3명의 위대한 주교로 불린다. 대부분의 사도들이 죽고난 이후에 활동했으며, 그의 주된 역할은 사도 요한과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참된 진리를 전파하는 역할이었다.
[교회와 역사, 2025년 1월호, 박선용 요셉 신부(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 부위원장)] 0 16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