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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덕원 신학교의 웅변반 활동과 그 사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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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걸어간 길] 덕원 신학교의 웅변반 활동과 그 사명
몇 년 전부터 ‘비폭력 대화’를 다루는 서적과 강의들이 뜨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인지하여 잘 설명하고, 또 타인이 하는 대화에서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목적, 그의 감정을 파악하고 말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현실에서는 한 번 말을 잘못하고 나서 그것을 원점으로 돌리지 못하고 자꾸 다른 말로 이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이 쌓이다 보면 현재 우리 사회처럼 서로가 ‘말’을 듣지 않고 ‘편’으로 나누어 버린다. 100년 전 덕원 신학교 학생들은 웅변술 연마에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고, 웅변반은 활기를 띠었다. 신학생들의 신선했던 말하기 훈련과 그들의 고민과 이상을 살펴보려 한다.
복음 선포를 위해 웅변과 토론회로 실력을 쌓아
덕원 신학교는 1921년 개교한 이래로 음악부, 운동부, 웅변부, 도서부, 편집부 등을 두었다. 웅변부는 1925년 봄에 개설되어 처음에는 매 학기 한 번씩 웅변대회를 개최하다가, 1927년 격년제로 입학했던 학급마다 웅변회를 조직했다. 1학급 토론회, 3학급 강연회, 5학급 웅변회로 구성되어 각각 주일마다 1, 2회씩 모였다. 그러나 이 웅변 수련 전성시대는 2년 후 각 학급의 웅변부 폐지로 막을 내렸다. 1930년 각 학급의 뜻있는 학생 15명이 웅변회를 다시 조직해서, 매주 1회씩 강연과 토론을 진행했으나 1년 후 정치적 이유로 해산됐다. 이어 이듬해 강연회, 간담회라는 이름으로 12명이 모여 웅변을 연습했으나 마찬가지로 사라졌고, 결국 1934년에 재출발한 웅변회가 맥을 이어 나갔다.
이와 별개로 전교(傳敎) 토론회는 계속됐다. 1927년부터 총학생회에 속해있는 연구부에서 한 달에 두 번 전교 토론회를 열어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사상을 넓히고 언변을 연마했다. 전교 토론회는 초기에는 김충무. 신윤철, 김성환 등이 주관했고, 1929년부터 1931년까지는 이준성, 최병권, 김걸준, 1932년부터는 다시 김성환, 1934년부터는 한창준이 맡았다. 웅변회가 조직되기 전의 대회에서는 교장 신부나 교수들이 강연 주제를 출제하기도 했으나, 토론회가 시작된 뒤로는 주관한 학생들이 출제도 하고 연사도 정했다. 이들은 「웅변」이란 잡지와 웅변 서적을 읽으며 수련했다. 토론회에서는 연사나 토론자, 청중이 두 편으로 나뉘어 격렬하게 토론을 벌였지만, 학생들이 결론을 내리면 교수 신부나 교사가 판정했다.
신학생들의 전교 토론 주제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들의 고민과 이상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학업을 하는 데 필수요건은 ‘노력인가, 재능인가’라는 간단한 주제로 시작했고, 또 학생 네 명이 각각 춘하추동을 맡아 계절의 장단점을 따지는 낭만적인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토론회가 정착된 이후로는 좀 더 심각하고 폭넓은 주제들을 다뤘다. 예를 들면, ‘현실 동포의 생활을 향상하기 위해서 농업을 장려해야 하는가, 공업을 장려해야 하는가?’, ‘조선을 구제함에는 부자(富者)가 필요한가, 책사(策士)가 필요한가?’, ‘학교 교육이 중요한가, 가정 교육이 중요한가?’, ‘가톨릭 선교에는 금전이 근본인가, 열성이 근본인가?’, ‘가톨릭 선교에는 구변(口辯), 문필(文筆) 중 어느 것이 중심인가?’, ‘영원불후적 웅변가의 자격은 천재(天才)에 있는가, 수련(修練)에 있는가?’, ‘과학 발전이 인류에게 이로움을 더 주었는가, 해로움을 더 주었는가?’, ‘인류 문명은 악으로 더욱 기울어졌는가, 선으로 더 기울었는가?’, ‘과학 발전이 인류에게 전원 문명을 가져다주었는가, 도시 문명을 가져다주었는가?’, ‘사람을 감화시킴에는 정(情)이 작용하는가, 의(義)가 작용하는가?’ 등이 주제였다.
신학교에서는 토론회 대신에 강연회를 열 때도 있었다. 강연회는 주로 교수 신부들이 ‘조선 천주교, 조선인의 정신’이나 ‘천지창조와 천문학에 대하여’ 등을 강연했는데, 대신학생인 김충무(「대중이 요구하는 지도자」, 「경제 사상사의 계략」 등), 한윤승(「사람의 가치는 어디 있는가」), 김성환(「신학생과 웅변」) 등의 강연도 있었다. 신학생들은 조선의 현실을 파악하고 현상을 진단하려고 노력했으며, 장래에 선교사가 되어 제대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웅변수련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웅변으로 조선 교회 융성을 꿈꾼 미래의 선교사
신학생들은 이런 현실에서 복음으로 선도해야 하는데, 그 유일한 길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소리’라야 된다고 판단했다. 웅변이야말로 선교 전장(戰場)에 나설 투사로서 가져야 할 무기라고 여겼다. 당시 문맹자가 인구의 80%가 넘는 조선의 상황으로서는 문서 전교로는 곤란했기 때문이다. 활자가 발명된 이후로 웅변의 시대가 지나고 글로 선포하는 시대가 왔다고 하더라도, 또 웅변을 정치에 빼앗겼다고 하더라도 성당에 강론대가 없어지지 않는 한 신학생에게 웅변의 역할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믿으며, 장래 선교사가 될 자신들은 웅변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대자까지 설득할 수 있는 웅변술을 갈고 닦아야 했다. 그들은 조선 천주교회를 융성시키기 위하여 웅변가가 필요하며, 그 웅변가를 배출할 단체는 덕원 신학교 웅변회라고 주장했다.
신학생들은 구두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을 상기했고, 웅변가들을 공부했다. 신학생들의 웅변 이론도 탄탄했다. 역사적으로 ‘세 치 혀의 웅변’으로 세계를 움직인 수많은 사례가 있으며, 교회도 교의를 전파하기 위해 청중을 감동하게 할 방법을 고심해 왔다고 전제했다. 그리스도교 선교사의 웅변으로 말미암아 세계적 대종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웅변의 일생’을 보냈으며, 30년간의 준비 시기를 거친 후 3년간 유다 각처에서 하느님의 복음을 ‘웅변’하셨다고 해석했다. 물론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 바오로 사도, 요한 세례자, 이후 아타나시오, 크리소스토모,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바실리오 등도 웅변가였다. 웅변은 종교의 산물인 동시에 종교에서 자랐고 종교에서 발전했다. 성당은 하느님을 흠숭하는 곳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이라는 게 신학생들의 주장이었다.
가톨릭 지적 사명과 대응 방도
신학생들은 선교사의 사명을 수행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들은 인류 역사는 사상에 의하여 변천을 거듭해 왔으며, 사상이란 단지 추상적 관념일 뿐 아니라 항상 현실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사상은 그 나라의 지식 계급이 가지고 있는 철학의 구체화라고 봤다. 즉, 사상은 학설로 형성되는데, 예컨대 진화설이 학계와 일반 사회에 한 번 대두됨에 전통적 우주관이나 인생관은 송두리째 파괴되고 말았다. 이처럼 유사 이래로 천만 가지 학설이 생겼고, 천만 가지 사상은 서로 갈등하면서 인류의 역사를 빚어냈다고 전제했다.
이런 현실에서, 세계를 지배하고 세계를 개조하겠다는 자(者)는 모든 변경과 변천의 주동적 원인이 되는 학설을 조종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류 행복의 유일한 원천인 가톨릭주의의 원리 원칙을 바탕으로 인간이 소유한 모든 학문을 선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려면 학적 권위를 잡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학문 자체를 잘 알아야 한다고 했다. 물론 각 부문의 학문을 다 잘 알기는 불가능하지만, 각자가 특수한 연구를 하여 대비하고, 필요한 경우에 척척 나선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신학생들은 본 학문인 신학과 철학을 잘하되, 특수 부분에 전문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학에서는 사회학, 윤리학, 자연 철학, 인식론, 본체론 등을 알아야 하며, 신학에서는 교의신학, 성경학, 윤리신학, 교회법 등에 대해 특별한 전문 지식을 가져야 하고, 이외 자연과학에도 각자의 취미와 능력에 따라서 전문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각자가 다시금 한 총체가 되어 대응하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예수회 수사들처럼 신학생들 간에 참고 자료를 발견할 때 서로 제공하며 어떤 문제가 생길 때에는 해당 분야의 연구자에게 문제 해결을 위임하는 식으로 조직적으로 대응한다면, 현대의 무서운 사상 전선에서 가톨릭이 최후의 승리를 얻으리라 확신했다. 장래 선교사들도 각자가 일정 부문의 전문적 지식을 가진 후 다시금 이 권위적 지식이 한 총체가 되어서 맹활약하는 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웅변을 잘하기 위한 김성환의 전략
![]() 김성환은 웅변가가 되기 위한 기초 필수 조건을 건강, 인격, 창의성, 사상의 종합적 수련, 대중 심리 연구라고 주장했다. 물론 신학생이 웅변가가 되기 위해서는 수사학, 논리학, 심리학 등을 철저히 연구해야 하지만, 김성환이 제시한 내용이 현실적이어서 새겨볼 만하다.
김성환이 제시한 웅변 기술 첫째는 건강이다. 체력이 왕성하지 못하면 성량이 풍부하지 못하고 성량이 풍부하지 못하면 장시간 동안 다수한 청중에게 자기의 의사를 철저히 발표하지 못한다. 둘째는 인격이다. 인격과 웅변은 이신동체(二身同體)이다. 인격이 없는 곳에 웅변이 있을 수 없다. 즉 술을 마음대로 마시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고 술을 먹지 말라고 권고한다면 그 말이 힘을 가질 수 없다. 말이 힘이 있고 효과가 있으려면 행위의 실행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행위는 열성과 신념의 실천이다. 웅변의 생명은 열성과 신념에 있고, 열성과 신념은 오직 인격의 산물이다. 따라서 웅변가가 되려면 먼저 인격 수양을 한다고 했다. 셋째로 창의를 들었다. 자신의 체격과 성격, 인격, 관심에 맞는 웅변이 따로 있다. 물론 웅변가가 되려면 선진 웅변가의 고심, 참담한 경로를 참작할 것이지만 그것을 그냥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기에게 맞는 웅변은 하나뿐인데, 이것을 알아내야만 웅변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로는 사상의 종합적 수련을 들었다. 사상을 종합하는 습관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종합적 사고는 웅변가에게 중요한 자격이다. 다섯째로 대중 심리 연구이다. 일대일 웅변의 성공 여부는 청중의 이해에 달렸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말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연설의 직접 대상인 청중을 얻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한다. 어떤 대신이 중의원에서 명연설하기는 쉽다. 그러나 성당에서 신부가 그러기가 어렵다. 청중은 여자면 여자, 학생이면 소학생처럼 어떤 단위로 묶일수록 연설가에게는 좋지만, 신자 대중은 각계각층으로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복잡 다수한 청중을 다 감화시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여기에 정객의 연설과 선교사의 설교에 난이(難易)의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웅변반을 운영한 학생들
덕원 소신학교 출발부터 덕원 신학교 내내 웅변 활동을 주도해온 이들은 학교의 리더그룹이었던 것 같다. 웅변 활동에서 김충무, 신윤철, 김성환, 이준성, 최병권, 김걸준, 한창준 등이 활약했다. 이중 김충무는 한윤승과 함께 덕원 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 1937년 사제가 됐다. 역시 1921년 서울 백동 소신학교가 설립될 때의 첫 입학생이며 원산대목구 첫 사제인 최병귄과 그와 같은 해이면서도 몇 달 앞서 서품을 받은 신윤철 두 사람은 6·25 발발 직전 북한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이다. 김충무 신부와 김성환 신부는 6·25 전쟁 중에 남하하여 각각 부산과 왜관에서 사목했는데, 두 사람 모두 강론으로 유명했다. 이 두 사람의 신학생 시절 글도 많이 있다. 웅변 리더들의 복음적 일생은 지면을 바꾸어 다시 살펴보겠다. 그 속에 많은 ‘답’이 있을 것이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4년 겨울(Vol. 68), 김정숙 소화 데레사 교수] 0 11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