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0일 (수)
(녹)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순교자 이용우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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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9-07 ㅣ No.2427

[순교자 성월 특집 I] 순교자 이용우(베드로)

 

 

이용우(베드로, 1814~1866)의 자(字)는 이학(而學)이며,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출신으로 안동 권씨와 결혼했습니다. 그는 공주에서 순교한 이 가를로의 5촌 조카이고, 조카 이 마리아는 충주에서 교수형으로 1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1866년 9월 28일(양 11월 5일) 경북 영주시 봉현면 노좌리로 피하였다가 서울 포교가 집에 체포하러 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 지경터에서 단양의 포졸과 서울 포교에게 체포되어 단양 옥에 갇혔습니다.

 

그 다음날 중죄인 모양으로 짚둥우리를 타고 서울로 압송되어 좌포도청에 갇혔습니다. 형문(刑問) 2차, 주뢰 2차를 당하는데, “배주(背主)하라.”고 하자, “내가 세상에 나서 천주를 배반하고는 다시 갈 데가 없으니 국법대로 죽기를 원하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포도청으로 이송하여 주뢰 2차, 형문 3차에도 전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10일 후에 의금부로 이송되었는데, 관장이 “네가 배반하면 살려줄 터이니 부디 고집하지 말고 한 마디만 말하면 가산과 토지를 도로 주겠으니, 부디 한마디 말만 하여 좋은 양반의 집이 망해지지 않게 이을 터이니 부디 즉시 배반하면 돌아가리라.”고 회유하였습니다. 이에 “내가 죽기를 어려워 아니하니 국법대로 죽기를 원하노라.”고 단호하게 대답하였습니다. 또 “천주교인의 이름을 대라.”고 하며 무수한 혹형을 가하자, 그는 “우리 천주 성교의 엄한 법에 십계 제 5에 ‘살인을 말라’고 하였으니 말로 대기만 하여도 살인인 고로 못 대겠으니 오로지 죽을 따름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좌포도청으로 이송하여 엄형 2차를 받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만 부르다가 1866년 11월 8일(양 12월 14일) 좌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이튿날 그의 아들 이원례(李喜菊, 요한 세례자)가 부친의 시신을 찾아 서소문 밖 성곽 아래에 빈 가마니로 싸서 관없이 흙 속에 묻었습니다. 그는 단양에 내려와서 염습할 것을 가지고 서울에 가서 8일(10여 일) 후에 염습하였는데, 그 추운 겨울에도 시체가 부드럽기가 곧 운명한 시체와 같았습니다. 이때 포도부장 장가(張家)가 와서 “웬 사람이냐?”고 묻자, “나는 성교로 치명한 단양 이 아무개의 아들이로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포도부장이 “이 엄동에 저 고군약졸(孤軍弱卒, 외롭고 약한 군졸)이 운구(運柩)와 장사할 수 없으니 보기 답답하다.”라고 하면서 “일꾼 3명과 가래와 괭이를 얻어주고 묘지까지 정하여 줄 것이니 이곳에 장사를 지내고 내려가라.”고 하였습니다. 부친의 장사를 지낸 아들은 포도부장에게 품삯을 묻자 “모군(募軍) 고가(高價)는 따지지 말고 빨리 시골로 내려가라.”고 하였습니다.

 

교회 음악가이신 이문근(요한, 1917~1980) 신부의 4대조인 순교자 이용우(베드로)가 단양에서, 포도청에서, 의금부에서 심문을 당하고 죽음 앞에서도 신자로서 당당한 모습을 남겨 주셨습니다. 순교자를 본받아 흔들림없는 신앙을 살아가는 순교자 성월이 되었으면 합니다.

 

[2025년 9월 7일(다해) 연중 제23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단양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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