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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2) 김수환 추기경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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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10-02 ㅣ No.1903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2) 김수환 추기경 탄생


한국교회 첫 추기경…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 몸소 실천하다

 

 

- 김수환 추기경이 일본에서 추기경 임명 소식을 듣고 1969년 3월 29일 김포공항으로 귀국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한국 최초 추기경 탄생

 

“김수환 대주교, 한국 최초 추기경에…수난 얽힌 200년사의 결실. 교황 바오로 6세는 28일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스테파노·47)를 추기경으로 임명, 1백92년의 한국교회 사상 최대 영광의 좌(座)를 한국에 부여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이날 김 추기경 외에 다른 34명을 추기경으로 임명, 추기경단을 가톨릭 역사상 최대인 134명으로 늘렸다. 김 스테파노 추기경을 비롯한 이들 새 추기경들은 오는 4월 28일 비밀추기경 회의에서 교황으로부터 공식 추기경 임명을 받는다.”(가톨릭시보, 1969년 4월 6일자 1면)

 

바오로 6세 교황은 1969년 3월 28일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에 임명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 전 세계 추기경 가운데 최연소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 탄생의 소식은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경사로 받아들여졌고 환호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었습니다.

 

당시 김 추기경은 일본에서 발표 소식을 들었고, 이튿날인 29일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습니다. 가톨릭시보는 4월 6일자 3면에서 ‘알렐루야!! 우리의 영광 김수환 추기경’이라는 제목의 머리기사에서 추기경 탄생에 환호하는 한국교회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했습니다.

 

“28일 오후 8시 반 교황대사관으로부터 이 소식이 명동 주교관에 전해지자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소식을 들은 사람은 모두 즐거운 흥분 속에서 영광의 주인공인 새 추기경 김 대주교가 귀국하기만을 기다리며 환영 준비에 동동걸음을 치면서 하룻밤을 지냈다.”

 

이어 김 추기경의 귀국 장면을 감격에 겨워 묘사했습니다.

 

“새 추기경을 축하하기 위해 공항에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노기남 대주교, 그의 노안에 기쁨이 가득했다. … 두 개의 귀빈실은 꽉 찼고 광장엔 「환영, 우리의 영광 김수환 추기경 탄생」이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한국 성직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토마(86세) 신부는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그 기쁨을 표시하기도.”

 

당시 바오로 6세 교황은 제3세계 지역 추기경 수를 18명에서 29명으로 대폭 늘려 가톨릭의 세계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전년도에 거행된 병인박해 순교자 24명의 시복식으로 모두 103위의 복자를 갖게 되는 경사에 이어, 이날 최초로 추기경이 탄생하는 겹경사를 맞았습니다.

 

- 김수환 추기경 임명 소식을 전한 가톨릭시보 1969년 4월 6일자 1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가톨릭시보

 

일제의 강점에 신음하다가 해방됐지만, 분단의 비극 속에서 민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겪어야 했던 아시아의 작은 나라. 폐허를 딛고 이제 막 일어서던 한국교회에 첫 추기경의 탄생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1922년 순교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김수환 추기경은 사제품을 받은 후, 1956년 독일 뮌스터대학에 유학했습니다. 이때 접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는 사제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직무 수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쇄신을 통해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교회의 노력은 훗날 주교와 추기경으로서의 소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 김 추기경은 1964년 6월 가톨릭시보사 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이때는 공의회가 한창 무르익던 시기로, 그는 한국교회 그 누구보다도 공의회 관련 소식을 가장 먼저 가장 깊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비용인 20만 원을 통신사에 내고 공의회 관련 기사를 모두 받아 번역, 게재했습니다.

 

그는 한국교회가 공의회의 근본정신인 변화와 쇄신의 흐름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들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와 교회가 무엇을 쇄신해야 하는지, 그 고민의 성과들을 기사와 사설로 풍성하게 지면에 담아냈습니다.

 

‘신문사 사장이 되기 전부터 애독자’였던 김 추기경은 2009년 가톨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열정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깝게 여겨질 정도로 열심히 뛰던 때가 가톨릭신문 재직 시절이었습니다. 정말 하루 24시간 중 밥 먹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비타민 같은 것으로 대신할 수 없을까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2009년 2월 16일 선종하기까지, 김수환 추기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그리고 그 평생을 요약하는 핵심적인 단어는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는 곧 인간을 위해 외아들을 내어놓으신 하느님의 사랑, 모든 이를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은 특별히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불의한 사회 구조를 타파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집니다.

 

김 추기경은 서임 한 해 전인 1968년, 한국교회 처음으로 대사회적 발언에 나섭니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주교였던 그는 합법적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 맞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교회는 사회 정의 실현과 민주화를 위한 지난한 여정을 본격적으로 걷게 됩니다.

 

김 추기경은 시대적 요청이었던 이 싸움의 한가운데 항상 서 있었습니다. 가장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 시대적 징표에 대해 김 추기경이 취한 입장과 자세를 대변하는 장면이 1987년 6·10 민중항쟁 당시였습니다. 민주화 투쟁에 나섰던 학생들이 명동성당으로 몸을 피했고, 공권력 투입이 예상되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속에서 김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오.”

 

 

한국교회의 추기경들

 

한국교회가 두 번째 추기경을 맞이한 것은 김수환 대주교가 추기경에 임명된 후 무려 37년 뒤였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미 엄청난 성장을 이룬 2006년 2월 22일,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서울대교구장이며 평양교구장 서리였던 정진석(니콜라오)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했습니다. 

 

2014년에는 염수정(안드레아) 대주교, 2022년에는 유흥식(라자로) 주교가 추기경에 임명됐습니다. 특히 유 추기경은 한국교회에서는 처음으로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정진석 추기경은 2021년 선종, 현재 생존한 추기경은 2명입니다.

 

[가톨릭신문, 2025년 9월 28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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