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0일 (화)
(백)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7: 조선 교회 두 번째와 세 번째 세례식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6-02-09 ㅣ No.1984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7) 조선 교회 두 번째와 세 번째 세례식


세례 통해 사도로 거듭난 초기 조선 교회 주역들

 

 

- 조선 가톨릭교회는 1784년 음력 9월 이후 세 차례의 세례식을 통해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복음을 선포할 토대를 마련했다. 권철신·일신 형제가 학문을 토론했다고 전해지는 한감개 감호암(鑑湖岩).

 

 

1784년 음력 9월 한양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베드로)이 거행한 세례 예식으로 조선에 첫 번째 가톨릭 신앙 공동체가 탄생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때 군종 신부로 조선에 온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인에게 세례를 준 것이 한국 가톨릭교회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예수회 일본 선교사 메디나 신부와 그를 따르는 일부 예수회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교회사학자들은 이날 세례식을 한국 가톨릭교회 기원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벽 집에서의 첫 세례식, 누가 세례 받았나

 

안타깝게도 이날 첫 세례식 때 이승훈이 정확하게 누구에게, 또 몇 명에게 세례를 줬다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황사영(알렉시오)의 ‘백서’와 ‘순조신유사학죄인이가환등추안’(純祖辛酉邪學罪人李家煥等推案), 「사학징의」(邪學懲義), 「다블뤼 주교 비망기」,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등을 기초해 이날 이승훈은 이벽(요한 세례자, 30),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42), 정약전(안드레아, 26)·약용(요한 사도, 22) 형제, 최창현(요한, 25), 김범우(토마스, 33)·이우(바르나바, ?)·현우(마태오, 9) 형제, 윤유일(바오로, 24) 등 약 10명에게 세례를 줬다는 게 통설로 이어졌다.

 

“1784년 음력 3월 말에 귀국한 이승훈은 즉시 이벽 등과 같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많은 사람에게 영세를 주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주일과 첨례를 지키고 영세와 기타 종교 의식을 거행하며 또 교회 일을 의논하기 위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니, 이로써 한국 교회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 우리에게 몇 가지 흥미 있는 사실을 결론짓게 하는데 첫째는 이승훈의 전교 활동의 개시와 함께 이벽과 최인길 등이 그의 전교 활동을 도왔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이승훈만이 영세를 집전하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승훈이 그 후 다른 2명(이벽, 김범우)에게 수세권(授洗權)을 위임했다고는 하나 실제로 이승훈 외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이벽, 정약전·약종·약용 3형제, 권일신, 최창현, 김범우·이우·현우 3형제, 윤유일 등이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셋째는 영세한 신자 수가 늦어도 1789년까지 천 명으로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탄생한 새 교회는 이승훈을 추대하여 교중영수(敎中領袖)로 삼고, 그를 중심으로 다양한 교회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라고 설명했다.(최석우 몬시뇰, 「한국교회사의 탐구 Ⅱ」 56~58쪽)

 

 

두 번째·세 번째 세례식이 거행된 곳은

 

초기 조선 가톨릭교회 연구가 활발히 전개된 후 오늘날에는 이벽의 집에서 거행된 첫 번째 세례에 연이어 두 번째, 세 번째 세례식이 거행됐다고 서술한다. “1784년 겨울에 마침내 이벽은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을 수표교 인근에 있던 자신의 집에 불러 모은 뒤에 그들과 함께 이승훈으로부터 대세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조선에서 천주교회가 탄생하였다. 이때 정약전은 세례식에 참석하였지만, 세례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새해가 오기 전에 이존창과 홍낙민, 역관 최창현과 김범우 등이 두 번째 세례를 받았다. 초기의 세례식 중에서 한두 번은 이벽의 집에서 거행되었지만, 1785년 봄 이전 세례식 장소가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의 집으로 옮겨졌다. 이벽이 교리를 가르친 최인길과 김종교는 김범우의 집에서 세례를 받은 듯하며, 권일신의 교리를 가르친 충청도의 이존창과 전라도의 유항검은 양근의 권철신 집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천주교회사 1」 269쪽)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박사는 더 구체적으로 밝힌다. “이벽과 이승훈은 두 번째 세례식을 갖고 녹암계의 홍낙민(루카)과 이윤하(마태오)를 비롯하여 중인 출신인 최창현(요한), 김범우(토마스), 최인길(마태오), 지황(사바) 등에게 세례를 주고 있었다. 한감개(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양근 대감마을’이라고도 함)에서 연락이 온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이벽과 이승훈은 부랴부랴 행장을 꾸려 한감개로 갔다. 그곳에는 충청도의 이존창과 전라도의 유항검도 함께 있었다. 이들은 이미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우고 있었으며, 마음속으로 세례받을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그들도 이제는 전통 학문의 굴레에서 벗어나 복음에서 찾은 진리를 따르고자 하였다. (⋯) 이튿날 아침, 한감개에서는 조촐하지만 영광스러운 잔치가 벌어졌다. 권철신은 마이야 신부가 쓴 「성년광익」에서 성인들을 찾아본 뒤 ‘암브로시오’를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하였고, 이존창은 ‘곤자가의 루도비코’ 성인을, 유항검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주보로 택하였다. 이승훈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다시 한 번 미약하게 태어난 조선 교회에 대한 무한한 영광과 하느님의 보호를 기원했다.”(「고난의 밀사」 40~41쪽)

 

 

이승훈에게 세례받은 신자들, 교회의 주춧돌로

 

이처럼 조선 가톨릭교회는 1784년 늦가을과 초겨울 무렵인 음력 9월 한양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첫 번째 세례식에 이어 같은 장소 또는 명례방 김범우 집과 양평 한감개 권철신의 집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세례식을 거행하고 신앙 공동체의 토대를 세웠다.

 

이 세 차례 세례식으로 권철신이 이끄는 녹암계 젊은 선비들과 이벽의 지도 아래 신앙을 받아들인 역관 출신 중인들이 초기 조선 가톨릭교회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리고 한양 수표교와 명례방, 양평 한감개는 마치 사도 시대 예루살렘 교회와 시리아 안티오키아 교회처럼 복음 선교의 주추 역할을 했다. 세 차례 세례식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서울과 경기도뿐 아니라 충청도, 전라도에 복음을 선포하고 가톨릭 신앙을 뿌리내리게 한 사도가 됐다. 「한국천주교회사」를 펴낸 샤를 달레 신부는 한감개를 ‘조선 천주교회의 요람’(상권, 312쪽 참조)이라고 평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6년 2월 8일, 리길재 전문기자] 



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