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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시성] 가경자 최양업 신부 시복 기적 심사 첫 단계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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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6-04-07 ㅣ No.2516

가경자 최양업 신부 시복 ‘기적 심사’ 첫 단계 통과

 

 

- 청주교구 배티성지 최양업 신부 동상.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한국교회 두 번째 사제 가경자 최양업 신부(토마스, 1821~1861)의 시복이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교황청 시성부 의학자문위원회가 가경자의 전구(轉求, intercession)로 이뤄진 치유를 기적으로 인정했다. 

 

주교회의는 3월 30일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로마 교황청 시성부에서 3월 26일 열린 의학자문위원회 심사에서 7명의 의학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가 장시간 논의 끝에 제출된 치유 사례가 최양업 신부의 전구로 이뤄진 기적적 치유임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아직 복자 선포까지 남은 절차들이 있지만 이번 의학자문위원회 심사 통과는 한국교회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1996년 청주교구 배티성지에서 최양업 신부의 시복 청원을 준비하기 시작한 지 꼭 30년, 2016년 4월 2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최양업 신부의 영웅적 성덕을 인정하는 시성부 교령을 승인하면서 가경자로 선포한 지 꼭 10년 만에 이뤄진 기념비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시복시성 역사에서 교황청의 기적 심사를 통과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더욱 값진 결과이기도 하다. 2014년 시복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는 모두 순교자들로 기적 심사를 면제받았다. 이처럼 순교자의 경우 성덕 심사를 통과하면 복자로 선포되지만, 최양업 신부처럼 증거자인 경우에는 성덕 심사 이후 기적 심사를 거쳐야 한다. 

 

주교회의에 따르면, 향후 남은 시성부의 기적 심사 절차는 두 단계다. 먼저 제출된 치유 사례에 대한 신학위원회 심사다. 신학자들은 이 치유 사례가 신학적으로도 아무런 흠결이 없는지 최종적으로 확인한다. 이어 신학위원회 심사를 통과하면 마지막으로 시성부 의원 추기경들과 주교들의 회의와 토의를 거치게 된다. 회의 결과가 긍정적이면 교황에게 보고되고, 교황의 최종 승인으로 가경자 최양업 신부는 복자로 선포된다.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김종강(시몬) 주교는 “의학자문위원회의 긍정적 결과는 그동안 많은 교우가 정성을 다해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을 위해 기도해 주신 덕분”이라며 “다만 시성부의 기적 심사 절차 가운데 첫 단계를 통과한 것일 뿐이기에 앞으로 최양업 신부님이 복자로 선포될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로 함께해 달라”고 당부했다.

 

최양업 신부 시복 ‘역사 및 고문서 전문가위원회’ 위원 차기진(루카) 박사는 “시복 과정에서 가장 힘든 절차라고 할 수 있는 의학자문위원회 심사 통과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기적”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하느님의 큰 선물을 받은 한국교회가 약해진 신앙을 되살리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1970년대 말부터 최양업 신부 현양 운동을 전개해 온 한국교회는 1997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시복 추진을 결정했다. 2001년에는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시복 안건 심사에 착수했고, 15년 만인 2016년 최양업 신부가 가경자로 선포되는 결실을 얻었다. 아울러 2024년부터 최양업 신부의 선종 기념일인 6월 15일을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 시성을 위한 전구 기도의 날’로 정하고, ‘길 위의 목자’이자 ‘땀의 순교자’였던 최양업 신부의 시복과 시성을 위해 기도해 왔다.

 

 

■ 가경자 최양업 신부는

 

1821년 3월 충남 청양 다락골의 새터 교우촌에서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성례(마리아) 복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인 1836년 김대건(안드레아),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조선 교회 첫 신학생으로 선발돼 그해 12월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고, 1844년 12월 김대건 신학생과 함께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았다.

 

먼저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지 1년 만인 1846년 병오박해로 순교하자, 최양업 부제는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이후 최양업 부제도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같은 해 12월 고국 땅을 밟았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하자마자 흩어지고 길 잃은 양들을 찾아 전국 120여 개의 교우촌 순방을 시작했다. 12년 동안 해마다 7천 리(2,800km)가 넘는 길을 쉼 없이 걸으며 사목했고, 휴식 기간에는 한문 교리서와 기도서를 한글로 옮기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했다.

 

최양업 신부는 1861년 여느 때처럼 사목 방문을 다 마친 다음 서울에 있는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다. 그러나 계속된 과로에 장티푸스까지 겹쳐 1861년 6월 15일 40세의 나이로 선종했고, 그해 11월 제천 배론에 안장됐다.

 

[가톨릭신문, 2026년 4월 5일, 박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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