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헌, 그 끝없는 죽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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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681 이숙희 [srlidia] 스크랩 2019-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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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가 당신 뜻대로 다시 한번
제 존재를 뒤집어
미세 먼지 만한 티끌도 남기지 않은 채
다 털어 내 놓아
엎디면
그리고 그 순간
제 육신을 거두시면
저는 이 세상에서
기억되지 않을
흙먼지로 돌아가겠나이다.
처음부터 너는
없는 아이였느니라
아무 것도 없는 무한의 시간에서
너를 점 하나로 있게 해
유한의 시간 안에
점 하나로 있게 한 이가
바로 나이니
너는
내 뜻대로 될 것이다
너와 네 사랑하는 가족들을
무로 돌려 주랴?
주님
당신 뜻대로 저를 쓰시고
제 집 식구들을 살려 주소서
당신께로부터 얻은
모든 것을 바치겠나이다
몸과 육신과 생각과 지능과
자아와
그로 인해 얻은 모든 것이
이제 당신 것이니이다
가엾은 제 식구들을 살려 주소서
18세 때
강제로 뜯어 내신
이 봉헌 계약
수시로 들이미시며
저를 무덤 속으로 이끄시는
참으로 사랑하올
내 하나 밖에 없는
주님
내 사랑, 내 연인
참으로
내게만 잔혹하신
끝간 데 없이
자비로우신 내 주인님
내 심장을 꿰 뚫어
추를 박으시고
그리로부터 나를
잡아 채시니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신께 당하나이다
이제 시체 본 이리떼 처럼
달려 들어 나를
물어 뜯는
참으로 진실해 보였던
내 친구였던 이들을 위해
또 한번의
존재의 뒤집음으로
희생을 해라
하시나이다
나는 당신을
아무도 모르는 나 만의
비밀로
구석진 내 공간으로
모시어 애지중지
들킬까 뺏길까
감추어 돌보는데
느닷 없이 당신은
내 존재의 심연을 뒤집어
다 내 놓아라
호통을 치십니다
그래서 또 한 번 털리어
다시 투명한 껍질만 남은
나
살려고 당신을
마음에 모시었는데,
당신은
번번이
나를 죽이십니다
그래도 끝까지
당신 만을
바라고 또 바라는 이유는
제가 당신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당신을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당신을 못 떠나
고무신을 다시
바로 신고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한 발을 내미오니
부디
이 걸음 헛되지 않게
많은 이들을 건지는
그물질이 되게 하소서
항아리를 가득 채운 물이
향기로운 포도주가 되게 하신
내 둘도 없는
자애와 능력의 주님
내 예수님
성모님을
네 시어머니로 모시라 하셨으니
다시금 민며느리가 된
리디아
혹독한 시집살이를
달게 받으리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