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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기 선양 교육자료(2004,09)-국가보훈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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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기 선양 교육자료(2004,09)
국가보훈처
9월의 독립운동가 최 재형(崔在亨) 선생
이후 러시아말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된 선생은 러시아 관리와 한인 노동자들 간에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군용도로 건설공사 등 관급사업을 맡아 경제적 성장을 이루고, 인심을 얻어 한인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그리하여 1893년 읍장에 해당하는 연추 도헌으로 선출된 이후 한인 지도자로서 재러 한인의 생활안정과 동포 자녀들의 교육사업에 힘썼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정책이 본격화되자 의병운동을 적극 후원하며 국권수호운동에 나섰다. 1908년 이범윤■이위종■안중근 등과 함께 동의회를 조직하여 의병부대의 무장투쟁을 지원하고, 대동공보의 사장으로 취임하여 항일 언론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연추에 1910년 국민회를 설립하여 회장으로 활동하고, 1911년 권업회를 조직하여 표면적으로는 한인의 실업 진흥과 교육 장려를 활동 목적으로 내걸고 내면적으로는 항일 민족역량을 강화하였다. 특히 1917년 러시아 혁명 후에는 전로한족중앙총회의 의원, 대한국민의회의 외교부장 등으로 활약하며 진보적 민족주의 활동을 펼쳐갔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상해에서 성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총장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20년 4월 연해주지역의 러시아혁명세력과 한인 독립운동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일본군이 대대적인 체포, 방화, 학살 만행을 자행하여 4월 참변을 일으켰다. 이때 선생도 일본군에 의해 납치되어 4월 5일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성 관식(成灌植) 해병대 소령
1952년 9월 6일 중공군은 대대규모의 인해전술로 성관식 소대장이 방어하고 있던 장단 사천강가의 36전진진지를 포위공격해 왔다. 이에 성 소대장은 연대의 포병지원으로 적의 후속부대를 차단시킨 가운데 교통호까지 진입한 적과 격렬한 수류탄전과 육박전을 벌이며 진지를 사수했다. 특히 적군의 포격으로 참호가 무너지면서 대원 5명과 함께 매몰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매몰된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무전기를 찾아 교신을 재개, 아군 포병의 지원사격으로 고지를 포위하고 있던 적군을 격멸하고 진지를 성공적으로 방어함으로써 임진강 일대 아군 주저항선의 핵심요충지를 확보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6■25전쟁이 끝난 후 성관식 소령은 해병대 교육단에서 신병양성 교육에 힘썼으며 1958년 해병대 항공대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1958년 9월 안타깝게도 비행훈련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31세를 일기로 순직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9월의 문화인물 조 헌(趙 憲)
보은 현감 재직시에는 당시 충청도에서 치민제일(治民第一)로 牧民官의 모범으로 평가되었고 교서관 박사때에는 <주자대전■어류>를 교정하였다. 또한 토정 이지함■우계 성혼■율곡 이이에게 수학하였고 특히 율곡의 학덕을 배우고 기린다는 뜻으로 후율(後栗)이라 자호(自號)하였다. 1584년 겨울 충청도 옥천군 안읍 밤티의 궁벽한 산골로 은거하여 後栗精舍를 짓고, 생애의 마지막 7■8년을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강학(講學)에 정진하였다. 16세기 조선사회에 대한 현실 인식과 실천적 학문관을 토대로, 정치■교육■경제■군사에 관한 근본적인 개혁론을 제시하였던 바, 철저한 민생의 안정을 시종일관 주장하였으니, 그의 경세사상(經世思想)과 나아가 실학의 선구적 경향을 고찰할 수 있다. 여러 차례에 걸친 강직한 상소와 도끼를 들고 올린 지부상소(持斧上疏) 등으로 함경도 길주로 유배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왜적의 침입을 예견하고 대비할 방책을 거듭 상소하였다. 그의 예측대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의 고경명■김천일, 영남의 곽재우■정인홍과 함께, 충청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5월에 칭의(倡義)하여 보은군 수리치재(車嶺)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수차례 의병을 규합하여, 8월 1일에 의승장(義僧將) 영규(靈圭)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함으로써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곧이어 의주로 북상하기 전에,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흩어지고 남은 700명의 외로운 의병을 이끌고, 의승장(義僧將) 영규(靈圭)와 함께 8월 18일 왜군에게 함락당한 금산 공격을 강행하였으나, 후원군이 없는 상태에서 중과부적으로 모두 장렬히 순국하였다. 유학을 천명하고 충절의 의리를 실천하여 한국 도학의 정통을 계승함으로써 文廟에 배향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열(文烈). 칠백의총 종용사와 우저서원, 표충사, 창주서원, 후율사 등에 배향되고, 문집으로 <重峯集>이 있다
일본은 3■1운동의 발생으로 종래의 무단정치(武斷政治)의 한계성을 느껴 하세가와 요시마치[長谷川好道] 총독을 경질하고, 문화정치를 내세우면서 사이토를 새로운 조선총독에 임명하였다. 강우규는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를 암살하기로 결의하고,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울로 잠입, 이날 남대문역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사이토 부처가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사이토는 의복이 조금 탔을 뿐 무사하였고, 동행한 경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미국 뉴욕 시장의 딸인 해리슨 부인 등 약 30명이 부상하였고, 일본인 기자 2명이 즉사하였다. 재거사를 위해 도피한 강우규는 9월 17일 순사 김태석(金泰錫)에게 체포되어, 1920년 4월 25일 사형이 언도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되었다. 공범으로 최자남(崔子男)■허형(許炯)■오태영(吳泰泳) 등이 투옥되었고, 장익규(張翼奎)■한인곤(韓仁坤) 등은 심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한국 광복군 창설 (9. 17)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조직된 항일군대. 1932년 이후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규모는 축소되었고 재정상 운영의 내용도 부실하였다. 더욱이 1937년 중 ■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각지에 흩어져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단체들은 충칭에 이전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된 군사활동과 외교활동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에 의하여 광복군이 조직되었는데, 광복군의 편성문제는 치장[숴江]에 있을 때부터 추진되어 오던 일로서,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을 시안[西安]에 파견하는 한편, 광복군은 많은 경비가 필요한 군사조직이므로, 중국정부의 양해를 얻는 교섭을 벌였다.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로 광복군의 조직을 찬성하였지만, 한편으로 임시정부와 분열 상태에 있는 김원봉(金元鳳)계의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과 이미 합동하여 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韓國光復軍總司令部)의 성립전례(成立典禮)를 가지고 우선적으로 광복군을 발족시켰다. 발족일을 전후하여 광복군 조직의 포고문과 그 밖의 선전 전단(傳單)이 배포되었고,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는 관계법규를 정비하였으며, 총사령에는 지청천(池靑天, 일명 이청천이라고도 함),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이 취임하였다. 광복군의 편성은 임시정부에서 제정한 군사법규인 육군임시군제(陸軍臨時軍制) ■육군임시군구제(陸軍臨時軍區制) ■임시육군무관학교조례(臨時陸軍武官學校條例) ■군사경위근무조례(軍事警衛勤務條例) ■경위근무세칙(警衛勤務細則) ■군무부임시편집위원부규정(軍務部臨時編輯委員部規定) 등 군사활동의 기초를 마련하는 규정에 따랐다. 광복군은 3개의 지대(支隊)로 편성되었는데, 제1지대장에 이준식(李俊植), 제2지대장 공진원(公震遠),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가 취임하였다. 또, 41년 1월에는 제5지대가 편성되어 나월환(羅月煥)이 통솔하였는데, 제5지대는 원래 전지(戰地) 공작원들이 많아 편성 후에도 주로 전후방 공작업무를 수행하였다. 소대 ■중대 ■대대 ■연대 ■여단(旅團) ■사단(師團) 등의 6단(段)으로 기본적인 편성이 되었다. 또한 《광복(光復)》이라는 간행물을 발행하는 한편, 방송과 선전지를 전후방에 살포하여 애국 청년은 물론 일본군에 징병되어 온 한국청년을 유치하는 데에도 힘썼다. 1941년 11월에는 중국정부 군사위원회에서 광복군은 항일작전 기간 중에는 중국 군사위원회에 직속되어야 한다는 등 9개 항(項)의 조건을 내세워 지원을 제의해 왔으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가, 1941년 12윌 1일 수락선언문을 발표하여 군수물자의 충당은 일단 해결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9일 대일선전(對日宣戰)을 정식으로 포고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분열상태에 있던 공산진영(共産陣營)과의 합류가 추진되어 1942년 7월에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었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副司令)에 취임하였다.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있던 광복군은 1944년 8월에 임시정부로 이관되어 임시정부 통수부(統帥府)가 통할하게 되었다. 광복 직전에는 한미합동작전으로 국내 정진대(挺進隊)를 편성하여 진격하려다가 출동 시기가 임박하여 일제가 항복함으로써 실현되지 못하였으며, 해방 후 일부는 귀국하였다.
인천 상륙작전 (9. 15)
6■25전쟁이 일어난 후 조선인민군은 남진을 계속하다 국제연합군의 참전으로 낙동강에서 교착상태를 맞게 되었다. 이에 국제연합군은 조선인민군의 허리를 절단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워 첫 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되었다. 제1단계로 9월 15일 오전 6시 한■미 해병대는 월미도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작전개시 2시간만에 점령을 끝냈다. 2단계로 한국 해병 4개 대대, 미국 제7보병사단, 제1해병사단은 전격공격을 감행하여 인천을 점령하고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함으로써 인천반도를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 마지막 제3단계로 한국 해병 2개 대대, 미국 제1해병사단은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고 20일 주력부대가 한강을 건너 26일 정오에는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작전을 끝냈다.
-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서울 수복 (9. 28) 6 ■25전쟁 과정에서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수도 서울을 한국군과 유엔군이 같은 해 9월 28일 탈환한 일. 같은 달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그동안 열세에 있던 한국군과 유엔군의 전세가 역전되기에 이르렀고, 이로써 서울탈환의 교두보가 확보되었다. 상륙작전의 선봉에 선 미국해병 제1사단과 한국군해병대는 18일 김포비행장을 탈환한 다음, 행주나루터의 맞은편에서 한강을 건너 그 일부는 영등포와 여의도비행장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미군 제7사단과 한국군 제17연대는 서빙고 방면을 공격, 서울의 동쪽을 포위할 태세를 갖추었으며, 그 일부는 시흥■안양■수원 방면으로 진격하여 낙동강전선에 있는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19일 행주 방면에서 강습도하를 감행한 한■미해병대는 행주산성을 점령하고, 21일 수색을 지나 서울의 서쪽을 감싸고 있는 안산■연희고지 일대로 진격하였다. 여기서 한■미해병대는 북한군의 필사적 저항으로 고전을 면하지 못하다가 함재기와 포병의 강력한 화력지원하에 돌격을 감행, 24일 오후 연희고지를 점령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서빙고 부근에서도 한강도하작전이 이루어져 미군은 남산■왕십리 방면을 제압하고, 한국군은 망우리 일대를 탈환하였다. 이와 같이 북쪽의 의정부 방면을 제외하고 서울 시가지를 3면에서 포위한 한■미연합군은 25일 오후부터 시가전에 돌입, 밤이 깊어가면서 점차 서울 중심부로 조여들기 시작하였다. 26일을 고비로 해서 북한군의 저항은 기가 꺾여 다음날 오전 6시 10분 한국군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고, 28일 수도 서울은 90일 만에 완전 수복되었으며, 다음날 정오 의사당에서 감격의 수도탈환식이 거행되었다.
나이테 있는 돌 - 김 세 영(내동중학교 3학년) -
내 몸에는 빛바란 슬품이 새겨져 있다 푸른 동산이 붉은 함성에 젖어 그 것들을 내 몸에 새기었다 나를 똑바로 보지 말라 내 몸에는 별빛 가득한 영혼이 숨쉬고 있다 이 삐뚤어진 시간을 우리들이 살고 있는 오늘을 위해 내 몸에는 이 삐뚤어진 시간을 죽어간 이들이 바라던 소망을 그 것들을 내 몸에 새기겠으니
이강년선생 기념비
● 개요 ● 건립취지 및 유래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일제의 앞잡이인 안동관찰사를 처단하였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단양산중에서 다시 일어나 경상 북부지방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12월 13도 의병연합부대가 결성되자 호서군 500여명을 이끌고 호서창의대장을 맡아 서울 진격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좌절되고 단양에서 13일간이나 격전,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힌 후 가평 광악산으로 퇴각, 항전을 계속하던 중 적에게 기습을 당하여 총탄을 맞고 체포되었다. 13년간의 의병항쟁을 통하여 30여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이민족의 침략에 맞서는 불굴의 민족정신을 국내외에 과시하고 1908년 9월 19일 적의 교수대에서 51세의 일기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
● 건립취지 및 유래 ● 현 황 ● 비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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