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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주님의 세례 축일 교황미사 - 주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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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 [humanaevitae] 쪽지 캡슐

2008-06-30 ㅣ No.121699

2008년 1월 13일 주님의 세례 축일 미사 장면입니다. 시스티나 성당에서 있었던 미사입니다. 성찬의 전례 부분에서 교황님께서 '주님을 바라보고'(Versus Deum) 미사를 집전하셨습니다. Versus Deum은 Versus Populum (교중을 바라보고) 에 대칭이 되는 용어로서 Ad Orientem ([전례적] 동쪽을 바라보고) 와도 같은 의미입니다.   이러한 'Versus Deum' (Ad Orientem)'을 취하는 미사에서는 "제대와 감실의 싸움"이니 하는 갈등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제대와 감실의 싸움이니 하는 것은 사제가 감실을 등지게 되는 경우에서나 발생하는 상황입니다.  사제가 주님을 모신 감실을 등지게 되니까 제대와 감실 중 어디에 더 중심을 두어야 할지 갈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감실을 성당 전면 벽 중앙으로부터 치워버리자는 전례 운동이 벌어집니다.  외국의 경우지만 감실을 성당 뒤 구석으로 옮겨버린다든지 아예 성당으로부터 추방시켜 별도의 성체조배실로 옮겨 버린 본당도 보았습니다.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역사가 오랜 유서깊은 본당들도 벽제대를 없애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노부스 오르도 미사에서는 성찬례 중에 교중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규정이 네 곳 외에는 없습니다.  노부스 오르도 미사도 교황님의 모범처럼 벽제대를 사용하여 드릴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 아름다운 전통적인 교회 건축물들이 사라지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주님의 세례 축일 교황 미사는 이탈리아어로 거행된 일반양식 (노부스 오르도) 미사였고 <로마 미사 총경본>에 충실한 미사였습니다.

교황님은 미사의 방향성을 무척 강조하십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태양이 뜨는 (우주적 의미를 지닌) 전례적 동쪽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제대 중간에 주님이 매달리신 십자고상을 배치하여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교황 미사를 유심히 살펴보면 교황님께서는 Ad Orientem의 자세를 취하지 않는 미사에서도 대부분 제대 위의 십자가에 시선을 두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사제는 구원의 순례 여정에서 양들을 인도하는 비행기의 조종사과 같은 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종사가 목적지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승객들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면 비행기가 어디로 가게 될까요?  승객들 마음은 평안할까요?

베네딕도 16세의 <전례의 정신>에서 Versus Deum (Ad Orientem) 관련 부분만 발췌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동쪽을 향해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본다. 그렇다고 이것이 태양 숭배는 아니다. 우주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이다. 시편의 태양에 대한 노래는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것이 된다.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 같고 ... 하늘 끝에서 나와 다시 끝으로 돌아가니 아무것도 그 열기 앞에서 숨을 수 없네."(시편 19.6-7) 이 시는 창조에 대한 찬양에서 곧바로 율법에 대한 찬미로 넘어간다. 즉, 살아 있는 말씀이자 영원한 로고스인 역사의 참빛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이 시를 이해할 수 있다. 그 빛은 베들레헴의 동정녀 어머니의 신방에서 나와 온 세상을 밝게 비춘다. 동쪽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대체하며 해의 모습으로 그려진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진정한 옥좌, 곧 셰키나의 자리를 나타낸다. 강생을 통해 인성은 하느님의 참 옥좌가 되었고 하느님은 영원히 이 땅과 연결되셨으며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께 이를 수 있게 되었다.

초기 교회에서는 동쪽을 향한 기도를 사도적 전통으로 간주했다. 즉, 이러한 변화가 언제까지 계속되었는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초기 교회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은 분명하며 언제나 그리스도교 전례의 본질적 특징 중 하나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도 마찬가지다)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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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태양이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사실은 다른 한편으로 종말론적 그리스도론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 태양이 다시 오실 주님, 역사상 최후의 일출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쪽을 향한 기도는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마중하며 동쪽을 향한 전례는 그러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역사적 과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함께 들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희망의 기도이자 그리스도의 생명, 그분의 수난과 부활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드리는 기도이다. 초기부터 그리스도교의 여러 부분에서 십자가를 통해 기도를 드리는 동쪽 방향을 강조한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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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동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주와 구원사가 하나로 통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우주도 함께 참여하며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은 그리스도교 전례의 본질을 형성한다. 전례는 결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세계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으며 언제나 우주적이고 창조라는 주제를 그 기도 속에 포함한다. 이 맥락을 잊는다면 전례는 그 본래의 위대성을 상실하고 만다. 따라서 교회 건물을 지을 때나 전례를 드릴 때 동쪽을 향하는 사도적 전통은 가능한 반드시 되살려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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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의 자리를 중심으로 한 말씀 전례가 끝나고 신자들과 주교가 함께 제대로 걸어가면 "주님을 향하여"(Conversi ad Dominum)가 들려온다. 이는 히브리서에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12,2)라고 말하듯 시선을 동쪽을 향하라는 뜻이다. 성찬 전례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루어진다. 초기 교회 건축물에는 전례를 위한 자리가 두 곳이었다. 그 중 하나인 말씀 전례를 위한 자리는 공간의 한 가운데로 신자들이 '베마 Bema'를 중심으로 모였다. 베마는 다른 곳보다 약간 높은 곳으로, 복음서의 옥좌, 주교의 자리, 강론대가 자리했다. 그리고 성체 축성은 사제와 함께 동쪽을 향해, 재림하시는 주님을 향해 ‘둘러선’ 제대에 면한 앱시스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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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베드로 대성당의 이러한 배치는 그 후 로마 지역의 다른 많은 교회에서도 나타났다. 그 과정에서 세부 사항들에 관한 논란이 일었으나 여기서는 본질상 관련이 없고 오히려 다른 부분, 즉 지정학적 사정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서쪽을 향하게 된 데서 논쟁이 일어났다.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그리스도교 전통이 요구하는 대로 시선을 동쪽에 두고자 한다면 회중의 뒤에서 회중을 바라봐야 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성 베드로 대성당의 직접적 영향권에 놓인 지역에서는 이런 배치의 교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20세기에 이루어진 전례 개혁은 이런 선례를 받아들였고, 여기서부터 전례의 형태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발전해 나왔다. ‘신자들을 바라보고 versus populum’ 미사를 거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즉, 성 베드로 대성당의 규범적 형태에서 보듯이 제대는 사제와 신자가 마주 보며 함께 성체성사를 거행하도록 둥근 형태의 공동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설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리스도교 전례의 참뜻,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요청은 물론, 최후의 만찬 본래의 모습에 부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추론이 지닌 설득력에 의해 공의회 이후 (공의회는 '신자를 향해 돌아서는 것'에 대해 한마디도 거론하지 않았지만) 도처에 새로운 형태의 제대가 세워져졌다. 오늘날 ‘신자를 바라보며’ 거행하는 성체성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이 이룬 실질적 결과처럼 보인다. 물론 실제 새롭게 변화된 모습들 중 가장 눈에 띄는 하나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전례 장소의 외적 배열 뿐 아니라 공동체적 성찬이라는, 전례의 본질적 새로운 발상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로마 대성당들과 그곳의 제대 위치가 지닌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최후의 만찬의 재현이라는 생각 역시 잘못되지는 않았지만 정확한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한 루이 부이에의 말을 들어보자. “신자를 바라보고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 본래의 형식이요, 특히 최후 만찬의 본 모습이기도 하다는 발상은 한마디로 예전의 그리스도교 잔치나 비그리스도교 연회를 잘못 생각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리스도교 초기의 잔치에서 주인이 함께 참석한 다른 사람들과 마주보는 위치에 자리를 잡는 일은 결코 없었다. 시그마 모양이나 말발굽의 편자 모양 식탁에 함꼐 앉거나 자리를 잡았다. .. 고대 그리스도교권 어디서도 잔치의 주인이 참석자들과 마주보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을 것이다. 식사에 담긴 공동체적 성격은 오히려 그 반대의 자리 배치로 강조되었다. 모든 참석자가 식탁의 같은 쪽에 함께 자리 잡음으로써 말이다.”

잔치의 자리에 대한 이러한 분석에서 덧붙여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 거행하는 성체성사가 ‘식사’라는 개념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교 예배의 새로운 점을 유다교의 과월절 식사 영역에 세우시고 이를 되풀이해서 거행하라고 당부하신 이유는 그 새로움에 있지 식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새로움은 옛 맥락에서 벗어난 고유한 형태와 십자가를 돌이켜 보여 주는 성체성사를 통해 성전의 희생이 ‘로고스’에 적합한 예배로 바뀐 사실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으로 쇄신되고 심화된 유다교 회당의 말씀 전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억이 함께 녹아든 ‘성체성사’가 되었으며 “이를 행하라”는 명령에 대한 충실한 이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새로움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성전과 유다교 회당, 말씀과 성사, 우주적 차원과 역사적 차원의 연관 관계에서 규정된다. 앞서 살펴본 셈족 그리스도인들의 초기 교회 전례 구조에서도 이 점은 드러나며 로마 교회의 바탕에도 남아 있다. 또한 부이에의 언급도 있다. “이전에는(16세기 전) 사제가 미사 집전시 신자를 바라보느냐 뒤에 두느냐의 문제에 조금이라도 의미를 부여하거나 주의를 기울인 적이 없다. 시릴 보겔 Cyrille Vogel 교수는, 정작 비중을 둘 것이 있다면 사제가 성찬 기도를 다른 모든 기도들처럼 동쪽을 향해 드려야 한다는 바로 그 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교회의 방향 여건상 사제가 제대 앞에서 신자를 바라보고 기도할 가능성이 담보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제 혼자만이 아니라 전체 신자도 함께 동쪽을 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론 이런 맥락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교회 건물이며 전례 거행에서 희미해지거나 아예 사라져 버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제와 신자는 공동으로 기도할 때 ‘벽을 향해야 한다’거나 ‘사제는 신자에게 등을 돌려야 한다’고 단정을 지어 버렸을 것이고 그것은 부조리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상황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사실 외에는 식사(식사에 관해 근대 그림들도 함께 생각할 일이다)가 그리스도인들의 전례 거행에 규범이 되었음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전에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던 성직자의 계급화가 나타났다. 그러면서 사제(오늘날에서는 주재자라고 부르는 편이 낫겠다)가 전체의 실질적 구심점이 되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사제에게 귀결된 것이다. 신자들은 사제를 보아야 하고, 사제가 하는 행동에 참여해야 하며, 사제에게 응답해야 한다. 사제의 창조성이 전체를 지탱한다. 다만 전례를 위해 여러 기능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맡기고 나름의 직분에 맞게 전례의 ‘창조적’ 계획을 세우기를 바라는, 그렇게 해서 새로운 역할을 줄여 나가려는 신자들의 노력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느님은 갈수록 시야에서 멀어지고 ‘앞서 결정된 형태’를 따를 마음이 없는 사람들, 전례에서 각기 역할들을 맡은 사람들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신자들을 향해 선 사제는 공동체를 닫힌 동아리, 틀로 만든다. 이 틀은 그 구조상 앞이나 위로 열리지 않고 닫혀 있다. 함께 동쪽을 향하는 것은 ‘벽을 향한 거행’을 뜻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사제가 ‘신자에게 등을 보이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물론 사제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긴 것도 아니었다. 유다교 회당에서 모두가 함께 예루살렘을 향했듯이 사제와 신자가 함께 ‘주님을 향함’을 의미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떄 ‘전례 헌장’의 집필진이던 교부 융만 j. Jungman의 표현처럼, 사제와 신자들이 주님께 나아가는 행렬에 있음을 알고 한 방향을 향하는 것이 중요하다. 닫힌 동아리로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나그네인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동방으로, 우리를 마중하시고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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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이의들 중 나머지 하나는 동쪽을 향하거나 십자가를 우러러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제와 신자는 서로 마주보며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것이 기도의 올바른 방향이라는 말이다. 저명한 평론가가 이러한 이의를 진지하게 제기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하느님의 모습을 그렇게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 안에 ‘하느님 모습’은 사진기로 촬영하듯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볼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신앙이라는 새 눈으로만 사람 안에서 사람을 하느님과 비슷하게 만드는 선과 성실, 내적 진실성, 겸손, 사랑 등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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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방향을 잡음은 '사람의 아들의 표지', 즉 주님의 재림을 예고하는 십자가와 연결된다. 그리고 동쪽은 아주 일찍부터 십자가의 상징과 결부되었다. 모두 함께 동쪽을 향할 수 없는 곳에서는 십자가가 신앙의 내적 동쪽을 상징했다. 즉, 십자가는 제단 한가운데 자리해 사제와 기도하는 공동체 모두가 함께 바라볼 수 있도록 하고 그로써 공동체는 기도의 부름이자 예전의 외침인 "주님을 향하여"라는 말에 따르게 된다. 죽음으로써 성전의 휘장을 찢으신 분, 우리를 위해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서시고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으시며 우리를 살아 있는 성전으로 만드신 분을 우리 모두가 함께 우러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제를 향한 시야가 가려지지 않도록 십자가를 옆으로 제쳐 둔 것이야말로 지난 몇 십 년동안 행해진 부조리였던 것이다. 십자가가 미사를 지내는 동안 방해가 된다는, 사제가 주님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이는 시정되어야 하는 오류이며 거창한 개축 공사가 필요한 일도 아니다. 주님이 곧 우리의 구심점이자 역사의 떠오르는 태양이시다. 그러므로 고난을 겪으시고 우리를 위해 손수 옆구리를 찔리시고 피와 물(성체성사와 세례성사)을 흘리신 그분을 현재화하는 수난의 십자가, 재림을 상기시키며 우리의 시선을 이끄는 승리의 십자가는 중요하다. 그 주님은 언제나 한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히브리 13, 8)"


- 라칭거 추기경, 전례의 정신, 7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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