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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32 - 프랑크족의 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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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추자 [theresa1206] 쪽지 캡슐

2006-08-04 ㅣ No.102912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32 - 프랑크족의 개종

 ‘그리스도교적 서구’ 기반 마련

【프랑스=김상재 기자】 서유럽의 주인이 게르만족으로 바뀌면서 로마인과 게르만인 사이의 대립이 심화됐다. 이는 종교적 대립으로 더욱 확대됐는데 게르만족은 아직 이교도였던 프랑크족을 제외하곤 대부분 아리우스 신앙을 신봉하고 있었다.
게르만족의 아리우스화는 아리우스파의 주교인 울필라스(Ulfilas 311~383 )의 선교활동에 의해 이뤄졌다. 그리스도교 신자이자 로마인인 어머니와 이교도인 고오트족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울필라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체류하면서 신앙을 아리우스 형식으로 받아들였고 아리우스파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에우세비오에 의해 주교로 서품돼 고오트 지방의 선교를 위해 보내졌다. 이리하여 아리우스 신앙은 고오트인들에게서 시작하여 모든 게르만 민족들에게 전파돼 국교화 되다시피 했다.
게르만족들의 국가 형성후 점령지역 주민의 정통신앙과 아리우스 신앙의 종교적 충돌은 자연 잔혹한 박해와 파괴를 불러왔다. 동고오트의 테오데리히 왕은 가톨릭적인 로마인과 희랍인들에 대항해 모든 아리안계 게르만 부족들을 연합, 구 로마 영토에 아리우스 신앙을 신봉하는 거대한 게르만 제국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신흥강국인 프랑크의 왕 클로비스가 개종함으로써 무위에 그치고 만다.
클로비스의 개종
클로비스는 가톨릭 정통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던 왕비 클로틸데로부터 끊임없이 입교를 권유받았으나 자식들의 세례는 동의하면서도 자신은 거부해왔다. 그러나 알레만니족과의 전쟁 중에 라인강 한 골짜기에서 전멸의 위기에 처하자 클로비스는 아내의 신을 부르면서 여기서 승리하면 신자가 되겠다고 약속한다. 결국 클로비스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약속대로 496년 프랑스 랭스에서 성탄 축일에 자신의 군대와 함께 레미지오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가톨릭신앙에 귀의한 클로비스는 동고오트 테오데리히 왕의 아리안계 게르만 국가 건설 의도를 저지하며 교회의 새로운 보호자 역할을 담당했다.클로비스는 새로운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러나 클로비스의 개종에는 정치적인 면도 많이 작용했다.
클로비스가 콘스탄티누스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이면서도 입교를 주저한 것은 아직 이교도였던 프랑크족의 군 지도자들과 국민들로부터 신임을 받기 위함이었다. 당시 클로비스는 동쪽으로는 알레만니족, 남쪽으로는 아리안계 게르만족들로부터 위협을 받고있었다.
그러나 알레만니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남쪽의 게르만족들의 힘을 약화시킨 클로비스는 이제 수월한 국가통치와 자신의 메로빙거 왕조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지역주민과의 동맹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사실 정통신앙을 간직하고 있던 점령지역의 주민들과 유대를 이루지 못한 아리안계 게르만 국가들은 빨리 멸망했다.
다른 게르만족과 달리 아리우스 신앙을 신봉하지 않고 있던 프랑크족은 클로비스의 개종과 함께 급속히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이러한 프랑크족의 개종은 게르만 민족과 로마제국 국민들과의 유대를 강화시켜 프랑크 왕국의 확장과 게르만족의 개종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크 왕국의 가톨릭 신앙이 안으로는 체제의 견고함을 밖으로는 지역민과 교회에 신망을 얻게 해 준 까닭이다.
이후 모든 게르만 왕국 중에 가장 강력하고 통일된 국가를 이룬 프랑크족은 자신들의 세력의 근원으로 서슴없이 가톨릭 신앙을 꼽았고 로마의 멸망 이후 그리스도교의 사명을 위해 새롭게 부름 받은 민족으로 행세했다.
개종의 결과
프랑크족의 개종은 그리스도교화 한 고대문명과 게르만족의 융합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교적 서구가 탄생될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스도교는 침략자요 야만적 습성에 젖어있던 게르만족을 무시하지 않고 그들을 받아들여 고대의 문화사상을 전해줌으로써 문명의 단절없이 고대와 중세를 연결시키는 고리역할을 했고 프랑크족의 개종으로 촉발된 게르만족의 개종은 아리우스 이단의 확산을 막고 그리스도교를 발전시키는 방패막이 됐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사적 종교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프랑크족의 개종에는 또다른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의 개종은 신앙의 체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왕의 모범과 그리스도교 전례의 외적 화려함 등에 대한 동경으로 인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민족의 집단 개종으로 그리스도교적 교리교육도 받지않았고 고대 그리스도교의 엄격한 세례지원기도 거치지 않았으며 세례 후 재교육도 없었다.
자연 게르만족의 신앙은 오랫동안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렀으며 그리스도교에서 요구하는 윤리적이고 영적인 생활을 따라 갈 수 없었다. 신앙이 보편화 되면서 세속화하는 현상이 그대로 재연된 것이다.
또한 교회와 국가의 밀착관계는 왕과 귀족들의 교회 내정간섭을 가져와 왕이 교회회의를 소집하고 주교들마저 선출하거나 임명하는 예속화 현상을 가져왔다. 또한 신학적 토론이 활발하던 동방과는 달리 신학적 사색이 사라져갔다.
새로운 선교관
시대의 발달과정에서 새로운 사상이나 충격이 가해질 때 기층 세력의 반응은 주로 세가지이다. 첫째는 미리 예단하는 것이고 둘째는 무시하는 것이며 셋째는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1500여년 전의 교회는 월등한 문화 수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야만적인 게르만 요소들을 무시하거나 미리 단죄하지 않고 귀 기울여 받아들이고 수용하여 개화시킴으로써 한층 고양된 문화질서 체제를 이뤄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이후 강성해진 자신의 힘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상과 조류를 자신의 신앙적 준거에만 맞춰 단죄하고 파문하는 오류를 많이 범해왔다. 오늘날의 세계도 세기의 전환과 더불어 전생, 환생, 역술, 뉴에이지, 텔레파시, 악마숭배 등 현대인의 영혼의 허기를 채우려는 새로운 시도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이성적이고 교조적인 세계관으로는 현대인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반증이며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대의 표징을 해석하고 수용하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생동감 있는 선교관만이 교회의 미래를 보장해 준다는 것이다. 18세기의 신관으로 21세기의 복음선포를 이끌어 갈 수 없는 것이다.

출처 :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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