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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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요한 15, 9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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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승 [bona24] 쪽지 캡슐

2024-05-13 ㅣ No.172385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15,9)

어떤 누군가의 빈자리를 메우는 일, 그가 맡았던 역할을 대신한다는 것은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임자와 늘 비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고, 자기 능력보다는 전임자의 공석으로 인해 자리를 차지한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라는 부정적인 시선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유다를 대신해 사도의 자리를 메우게 된 마티아에게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15,16)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커다란 위안과 더불어 마음의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사도의 직책을 수행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바로 사도들과 더불어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부터 함께 동행했고, 함께 동고동락하며 예수님 파스카의 여정을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이 부활의 증인인 사도로 뽑힌다는 사실을 사도행전은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준에서 사도들과 공동체는 함께 기도하면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마티아를 사도로 뽑아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습니다.” (1,26)하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마태22,14) 고 말씀하신 주님은 다른 사도들과 달리 마티아를 사도로 직접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 가운데서, 공생활 처음부터 주님께서 승천하신 날까지 함께 한 마티아가 제비로 뽑혀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부활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 참으로 크나큰 위로와 위안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부활 후 부인하고 배반했던 제자들을 다시 뽑아 내세우심을 통해서 제자들은 불림과 뽑힘이 제자들의 선택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은총이며 호의라는 것을 새삼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다시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처음 부르심과 같으면서 전혀 다른 부르심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표현처럼, 부르심의 외적인 면에서 같지만, 내적인 깨달음의 차원에서 전혀 다른 부르심입니다. 성령강림 이전의 사도들은 하느님의 일 보다 사람의 일을 중요시했으며, 이로 인한 부인과 배반을 통해 자신들의 나약함과 무력함의 체험을 하게 되고 부활하신 주님의 용서로 하느님 일을 우선시하는 사람으로 거듭남의 여정을 통해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사도 바오로가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1코1, 26~29) 라는 말씀을 통해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부름을 받고 선택받은 사람은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1코31) 라는 사도 바로로의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은 목적이란 바로 당신이 아버지로부터 이 땅에 파견된 존재이시듯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어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원 사업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전제되는 조건이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5.12) 라는 계명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 보다 우선하고, 모든 일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다와 마티아의 차이는 바로 마티아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주님 사랑 안에 머물렀지만’ (15,10) 유다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물지 않았음에 있었습니다. 벗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 하기보다 하느님 안에서 어떤 존재가 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15,9)라는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고 원하시는 것은 단지 아버지와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까닭입니다. 부르신 분도 주님이시고 부르심의 궁극적인 근거도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아버지에게서 시작되었고 아버지 안에서 마침 되는 근원적인 사랑입니다. 또한 이 사랑에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고 이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시려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와 하나가 되길 바라는 하느님의 마음을 우리는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초대이며 부르심입니까?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다만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 달라는 주님의 이 당부가 그렇게도 부담스럽고 무리한 요구입니까? 

이 사랑 안에 머물고 이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의 가르침(=계명)을 실천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존재가 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 머물고 이 사랑을 실천할 때 자연스럽게 사랑의 기쁨이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되리라 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굳이 우리를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당부하신 까닭은 이 사랑의 실천이 우리 삶의 부활과 같고, 이 부활의 삶은 우리를 기쁨으로 넘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기쁨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기에 솟아나는 존재적인 기쁨입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고 그 사랑을 살아갈 때 기쁨은 자연스럽게 넘치고 또 넘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는 사랑 안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거듭 부활의 생명을 충만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 모두 무엇보다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마치 저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주춧돌처럼 항구하게 굳건하게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살아갑시다. 주님의 선택 받음이 기쁘지 않습니까?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사랑받음이 기쁘지 아니합니까? 오늘 하루 이 기쁨을 만끽하고 기쁨을 전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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