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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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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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silver0824] 쪽지 캡슐

2012-01-04 ㅣ No.70173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2년 나해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2006년 MBC 설 특집 ‘여성! 100대100’ 고부간 설문 조사에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하는 거짓말 1위는 452명의 시어머니가 응답한 “아가야, 난 널 딸처럼 생각한단다.”였습니다. 그 외에도 “생일상은 뭘… 그냥 대충 먹자꾸나.”(227명), “내가 얼른 죽어야지.”(175명), “내가 며느리 땐 그보다 더한 것도 했다.”(87명), “좀 더 자라. 아침은 내가 할 테니.”(59명) 등입니다.

반대로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하는 거짓말을 순위가 낮은 것으로부터 2위까지 보면, “전화 드렸는데 안 계시더라고요.”(172명), “어머니가 한 음식이 제일 맛있어요.”(202명), “용돈 적게 드려 죄송해요. 다음엔 많이 드릴게요.”(245명)입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하는 거짓말’ 대망의 1위는, 모두가 공감이 가는 것인데, “어머님 벌써 가시게요? 며칠 더 계시다 가세요.”(362명)로 조사되었습니다.
 

 

양 편의 1위만 보고 판단하자면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딸이나 가족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며느리는 그런 시어머니와 오래 있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관계’와 ‘함께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은 마음’은 서로 비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관계를 원하지 않고, 며느리는 그런 시어머니와 머물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듣고 그의 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십니다.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시는데 대답은 좀 물음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라삐는 스승님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오후 네 시쯤이었다고 합니다.

왜 요한은 라삐의 뜻과 그 때의 시간을 기록해 놓았을까요? 그들에겐 아직 그 분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스승님일지라도, 또 시간이 아주 늦어서 돌아오지 못할 정도가 아닌데도 그 분과 함께 머무르려 했다는 그들의 의지를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닐까요? 그들은 그 날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하룻밤을 라삐, 즉 선생님과 함께 묵습니다.

다음날 안드레아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요한은 또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의미라고 씁니다. 즉, 하룻밤 지내기 전의 그 분은 스승님이었지만 하룻밤 지내고 나서는 그 분을 메시아로 봅니다. 다시 말해 그 분과 함께 머물면서, 그 분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겼기에 그 분과 오래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래 머무르려는 ‘의지’가 있어야 믿음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는 한 분이 찾아와서 신앙생활을 10년 넘게 했는데 믿음이 커지지가 않는다고 고민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아직도 아내를 따라서 성당에 억지로 나올 뿐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분께 하루에 그리스도와 어느 정도나 함께 머물려고 노력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런 분들의 대답은 늘 같습니다. 일상이 바빠서 거의 그분과 머물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분과 함께 머물지 않으면서도 믿음이 증가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방법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 분은 성경말씀과 성체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그것과 관련된 모든 신심행위가 그 분과 머무는 방법입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는, 성경을 읽고 듣고 쓰고 묵상하고 배우는 등의 방법이 있겠고, 성체를 통해서는 미사와 성체조배 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무엇 하나라도 하려고 하는 의지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 의지가 있는 사람, 그래서 당신을 찾아와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당신께서도 머무십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한 예로 자케오는 그 분을 만나고 싶어서 나무 위까지 오르는 노력을 합니다. 창피하면서도 자신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 그 집에 머무시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믿음과 구원이었습니다. 그 분께 다가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리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랑은 서로 자신을 떠나 상대방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이 아버지 안에 계시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두 제자 중 하나는 안드레아고,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랑은 머무는 것입니다. 함께 머물기 원하지 않는 것은 관계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분과 머물기 위해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루에 ‘얼마나’ 그 분과 머물기를 원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믿음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입으로는 그 분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하루에 그 분과 함께 있는 시간이, 자신이나 사회에 살기 위해 투자하는 시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면, 우리 또한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하는 거짓말 1위를 하느님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벌써 가십니까? 더 계시다 가시지요?”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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