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도란도란글방/미나와 달란트 비유(루카19,11-27 마태25;14-30)

스크랩 인쇄

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8-28 ㅣ No.149337

 

(공동번역성서) 2021. 8. 28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도란도란글방

 

미나와 달란트 비유

 

미나의 비유(루가19:11-27)

11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덧붙여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13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14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15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16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7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18 그다음에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주인은 그에게도 일렀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20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21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22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3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24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5- 그러자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 - 2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27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탈렌트의 비유 (마태25;14-30)

14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16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17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18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19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2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4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26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7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2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30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오늘은 미나의 비유와 달란트의 비유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비유들도 그렇게 만만한 비유는 아닙니다. 사실 오늘 이 두 비유를 확실하게 하려면 자케오의 구원과 열 처녀의 비유까지도 다 다루어야 합니다. 아니 어떤 면에 있어서는 루가복음의 전체 비유를 물 흐르듯 짚어 내려와야 오늘 그 두 비유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또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간단하게 짚고 넘어갈께요.

 

지금 우리가 함께 읽은 미나의 비유는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의 비유와 아주 흡사한 내용과 구조를 가지고 있는 비유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미나의 비유와 달란트의 비유가 같은 비유인데 마태오와 루가가 각기 다른 용도로 재구성하고 재조합한 것이라고 주장을 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그 각각이 전혀 다른 곳에서 주어진 각기 다른 비유라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앞 뒤 문맥을 살펴보면 그 두 비유는 모두다 하느님의 나라, 천국에 관한 비유라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루가19:11) 11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덧붙여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에 마지막 기착지인 예리고에서 소경 발토로메오를 고치신 후, 예리고의 세리 자케오를 만나 그의 집에서 말씀을 나누시던 중, 이 비유를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11절 뒷 부분에 나오는데 그 이유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어서,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요? 이렇게 미나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비유로 주어진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어떻습니까? 달란트의 비유가 어떻게 시작이 되는지 볼까요?

 

(마태25:14) 14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여기 보면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과 같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주어를 포함한 주절 전체가 생략이 되어 있지요? 무엇이 무엇과 같다는 것입니까? 이 비유는 바로 앞의 열 처녀의 비유에 이어지는 비유입니다. 따라서 열 처녀의 비유의 시작을 살펴보면 달란트 비유 첫 절의 주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태25:1) 1 “그때에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과 24장에서 계속하여 이 세상의 종말과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해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종말과 하느님 나라의 어떠함에 대해 구체적으로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신 것이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의 비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열 처녀의 비유가 천국은 ~과 같다로 시작이 되지요? 그리고 그 열 처녀의 비유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마태25:13)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종말의 날과 시간을 아무도 알지 못하니까 늘 깨어 있으라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바로 아래 절이 달란트의 비유로 이어지는데 그 첫 단어가 헬라어 가르입니다. 그 단어는 왜냐하면, ~인 까닭에라는 뜻을 가진 기본 불변사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달란트의 비유는 열 처녀 비유의 결론에 대한, 이유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두 비유를 이해하기 쉽게 이어보면 이러합니다.

천국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은 것이다. 그 중 다섯은 신랑을 맞을 준비를 했고, 나머지 다섯은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지 않아서 낭패를 보았다. 그런즉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천국이 올 날과 시간을 알지 못 하느니라. 이제부터 너희가 그렇게 깨어 있어야 하는 까닭을 말해주마. 너희가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천국이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기 때문이다

어떠세요? 조금 이해가 수월하신가요? 이렇게 미나의 비유와 달란트의 비유는 모두 하느님 나라, 천국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리고 그 두 비유는 하느님 나라와 종말에 관해 서로를 보완하고 보충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미나와 달란트의 비유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주신 은사나 능력이나 달란트를 잘 사용해서 많은 열매를 맺어, 하느님께 상급(賞給)을 받자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두 비유 모두 공히, 이익을 남긴 종들이 칭찬을 받았거든요. 아마 이중에도 이 두 비유를 그렇게 정리를 하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은사와 능력과 물질을 십분 발휘하고 사용하여 열심히 주인이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나오는 달란트를 오늘날 우리가 쓰는 talent와 혼돈하면 안돼요. 그 시대의 달란트는 그냥 화폐단위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 달란트를 talent로 규정지어, 자신에게 주신 재능(才能)과 은사를 잘 활용해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자, 라고 어이없는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거라면 아직까지도 자기가 어떤 은사를 갖고 있는지 발견도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해요?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 쓸 힘이나 물질이나 은사가 전혀 없어 보이는, 거지 나자로 같은 이들은 어떡합니까? 그 사람들은 천국에서 전혀 상급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인가요? 만일 이 두 비유가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라면 이런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루가17:7~10) 7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8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이것도 역시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종은 주인이 시킨 일을 당연히 해야 하는 존재이지 자기가 해 놓은 일을 근거로 주인에게 사례를 받거나 상을 받는 존재가 아니란 것입니다.

상이라는 것이 뭡니까? 상이라는 것은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환경, 더 나은 소유, 더 나은 평가, 더 풍성한 잉여를 얻어내어 비교 상대적 우위를 누리고 즐기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상이잖아요? 그러나 만일 천국에도 그러한 상급의 개념이 여전히 있다면 거기가 정말 천국이 될 수 있을까요?

천국(天國)은 그곳을 사는 모든 백성들이 각자 절대 만족과 절대 행복 속에서 사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열과 비교와 차이가 있는 곳에, 절대 만족이라는 것과, 절대 행복이라는 것이 공존할 수 있을까요? 우열이 있고 격차가 있는 곳에 어떻게 절대 만족과 절대 행복이 가능합니까?

생각해 보세요. 천국이 그렇게 누구나 다 절대만족과 절대 행복에 거하는 곳이라면 그곳에서 상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한 상급의 개념은 아직도 기복주의와 인본주의와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매한 신학자들이 내어 놓은 쓰레기 같은 개념인 것입니다.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선행을 쌓아 하느님을 기쁘게 하여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상을 받자? 사람들이 요즘 너나 할 것 없이 개혁주의 하는데, 개혁주의는 이미 한계점에 다다랐고, 너무 많이 타락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두 비유에서 이윤을 남긴 종들이 칭찬을 받고, 또 여러 고을을 다스리도록 상을 받는 그런 내용은 도대체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이 두 비유가 어떤 공통된 전제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미나의 비유에서도 주인이 왕위를 받으러 타국으로 떠나고,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주인이 타국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주인의 명령을 받은 이들은 모두 종입니다. 그게 전제입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떠난 집에서의 종들의 삶. 그것이 두 비유의 주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미나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타국으로 간 이유가 좀 더 선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루가19:12-14) 12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13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14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주인이 종들에게 돈을 맡기고 타국으로 간 이유는 왕위를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왕위를 받으러 타국으로 떠난 어떤 귀인의 이야기는 당시 유대인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던 그런 익숙한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분봉 왕이 추천이 되면, 반드시 로마의 황실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알다시피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유대의 분봉왕은 헤로데대왕이었습니다. 그 헤로데대왕은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에돔 사람이고 어머니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가 로마의 황제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이 되자 당연히 유대 백성들의 반대가 너무나 극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짐승 취급을 했었는데, 이방인 중, 그것도 에사오의 후예인 에돔 사람이 자신들의 왕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헤로데는 예루살렘과 무려 3년간의 전쟁을 치른 끝에 이스라엘의 분봉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왕권을 차지한 후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성전을 재건해 주기도 하고, 세금을 깎아주기도 하면서 37년간이나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다가 BC 2년경 헤로데 대왕이 죽었습니다. 헤로데 대왕은 자기가 다스리던 지역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자신의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유대 땅과 사마리아 땅과 이두매 땅은 헤로데 아켈라오에게 주었고, 왕의 칭호도 아켈라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갈릴래아 땅은,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에게 여우라는 욕을 먹기도 한,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주었고, 갈릴래아 호수 동북부 지역은 헤로데 필립에게 주었습니다.

그가 로마의 황제 시이저에게 충성의 표시로 동네 이름을 가이사르 필립보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통치권의 분배가 헤로데대왕의 유지였지만, 그 분배가 로마의 승인을 받기 전까지는 아무 효력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왕의 칭호를 물려받은 헤로데 아켈라오가 실제로 왕 위를 받으러 로마로 떠났었습니다.

그런데 그 헤로데 아켈라오의 어머니는 사마리아 인이었습니다. 아버지도 에돔인에다가 어머니마저 사마리아인이었으니 유대인들이 좋아했을리가 만무지요?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표단을 파견해서 아켈라오가 자기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는 것을 결사반대한다는 편지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예수님이 비유로 그대로 구술(口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는 아켈라오의 왕직과 왕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승인해 주었고, 그는 유유히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를 반대했던 무리들은 모조리 숙청을 당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도 나오지요? ‘나의 왕 됨을 반대하던 자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아켈라오의 통치는 계속해서 문제를 유발시켰고, 마침내 로마는 아켈라오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로마의 총독들을 보내어 아켈라오가 다스리던 지역을 다스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보내진 총독들 가운데 하나가 빌라도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그 아켈라오의 이야기를 모를리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알고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그 아켈라오의 이야기에 당신의 이야기를 오버랩 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싫어했던 아켈라오, 그의 왕위를 그토록 반대했던 유대인들의 마음이 당신에게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날 것임을 미리 내다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아켈라오를 왕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고 그를 미워했던 것과, 예수님을 왕 삼으려 하지 않고 그 분을 미워했던 것은 질적으로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아켈라오보다 더 미워했고, 그 분의 왕 되심을 반대했을 뿐 아니라, 한껏 조롱하기까지 했습니다. 바로 그 모습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모든 죄인들의 실체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었지요? 우리가 알다시피 이 미나의 비유가 끝나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왕이여, 우리를 구원 하소서, 호산나라고 외쳤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만 하시면, 풍랑도 잠잠케 하며, 죽은 자도 살려내며, 보잘것없는 식량으로 수만 명을 먹여 살리는 그 기적 같은 능력으로 화려한 다윗 왕국명을 세우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그렇게 환호 속에서 반겼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오해이지요? 그 오해가 주님이 이 비유들을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민속메시아 예수의 능력이 다윗 왕국명을 회복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기대와는 달리 자꾸 수난을 받고 죽어야 그 나라가 서게 된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실제로 그로부터 일주일쯤 후에 그 분은 십자가를 지고 죽어 버리십니다. 그런 나약한 모습은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기다리고 고대했던 그런 메시아도 아니었고, 그들이 기대했던 민속 메시아의 이스라엘 재건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해서 단호하게 당신의 강함을 비우시고 약함으로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말씀을 하셨고 그렇게 시행에 옮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님을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강력한 민속메시아를 기다려 왔던 그들이 십자가에서 죽어버리는 그런 나약한 왕을 왕으로 환영할 리가 없지요?

이렇게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 속 아담의 군상들은 그들 앞에 약함이 발각이 되면 그 약함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속성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걸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인 아담들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약()함이 곧 죄(), 약함이 곧 악()입니다. 그들은 약함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솎아져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자신들을 우상삼아 살고 있는 하느님의 대적(對敵)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그들을 낱낱이 구별해 내어 심판을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실 때에는 그들 모두가 예수님의 편인듯 행동합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건 힘이니까요, 강함이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반드시 그들을 걸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약함과 비움과 당함과 섬김의 모습으로 세상과 당신의 백성들을 둘로 분류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였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는 세상의 폭력성을 폭로시키는 힘과 효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진짜 힘이며, 그게 하느님 나라 임금의 본질이요, 속성인 것입니다. 약할 때 강함이 되는 원리, 그게 바로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필립2:5~11) 5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보세요. 예수님은 수난(受難)을 당하시고 십자가(十字架)를 지심으로, 약함과 비움으로 하느님 나라의 왕으로 등극을 하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왕이 되시겠다고 하는 하느님의 방법에 동의를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하늘의 왕이신 그 분의 왕 되심을 한껏 조롱합니다.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분이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왕 되심을 비웃습니다.

 

(마르15:16-19, 25-27, 32) 16 군사들은 예수님을 뜰 안으로 끌고 갔다. 그곳은 총독 관저였다.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17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서는, 18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인사하기 시작하였다. 19 또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하였다. 25 누가 무엇을 차지할지 제비를 뽑아 결정하였다. 26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 27 그분의 죄명 패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쓰여 있었다. 32 분부를 받은 이들이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힘의 원리 속의 세상은 이렇게 약함과 비움과 낮아짐으로 오신 주님을 한껏 모욕합니다. 한마디로 세상은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의 유익과 자랑과 인기를 챙겨주지 못하는 그런 왕은 꼴도 보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 같은 제사장들인 우리가 세상에게 그렇게 미움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묵시록에 의하면 우리 성도들은 지금도 하느님 나라의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이들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하느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섬김의 자리, 지는 자리, 용서해 주는 자리로 몰고 내려가십니다. 세상은 그러한 삶을 약함으로 간주하고 그 위에 폭력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그러한 약함의 왕, 비움의 왕, 낮아짐의 왕의 나라입니다.

힘이 없어서 약함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힘이 없어서 비움의 왕으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약함이, 섬김이, 비움이, 낮아짐이 곧 승리인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그대로 담고 오셨기 때문에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나라의 힘은 사랑이며, 은총(恩寵)이며, 자비(慈悲)입니다. 세상은 그 힘의 강력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에 의해 하느님 나라를 성취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당신의 왕 되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놓으시고 훌쩍 하늘로 떠나 버리셨습니다. 이제 진짜, 왕의 부재 상태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왕이 가시적 세상에서 부재 상태로 보여지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나라 또한 겨자씨와 누룩처럼 감추어져 버렸습니다. 하느님나라의 은닉성입니다. 하느님은 그 하느님 나라의 왕과 은닉된 하느님 나라를, 창세전체 선택을 받은 하느님 백성들의 믿음으로만 보이게 만드셨습니다. 또 다시 하느님 나라의 왕이 그 분의 부재 속에서 당신의 약함을 미끼로 던지시고 계신 것입니다. 힘의 원리 속의 아담적 세상이 그 왕을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베후3:3-4) 3 여러분은 무엇보다 먼저 이것을 알아 두어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자기 욕망에 따라 사는 조롱꾼들이 나와서 여러분을 조롱하며, 4 “그분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되었소? 사실 조상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창조 이래 모든 것이 그대로 있지 않소?” 할 것입니다.

 

역시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예수님은 왕도 아니며, 다시 오지도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확신 속의 세상이, 대표단을 파견해서까지 그 분의 왕 되심을 반대하는 유대인 안에서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강력한 하늘 왕권을 소유한 채 지금 하느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사도2:35~36) 35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36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언제까지 앉아계세요? 원수가 멸()해질 때까지, 하느님을 대적하는 원수의 정체가 완전히 폭로가 될 때까지 그 하늘의 왕은 당신을 은닉하시고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으신답니다. 죄가 죄로 확실하게 드러나서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폭로되고, 물증을 잡힐 때까지 주님은 부재성과 은닉 성을 풀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건 하늘 왕의 가시적 귀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이미 성령으로 우리에게 와 계시니까요.

세상은 마음껏, 보이지 않는 하늘의 왕을 조롱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부인(否認)합니다. 그렇게 믿음을 부여받지 못한 세상은, 은닉된 하늘 왕을 보지 못하고, 그 분의 부재(不在) 속에서 자기들의 뜻과 야망과 비전을 쫒아, 자신이라는 우상을 섬기며 자신들의 죄 성을 낱낱이 폭로당합니다. 그게 악한 종들의 모습 안에 들어 있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렇게 원수의 정체가 완전히 드러나게 될 때, 하늘 왕의 가시적 재림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부재와 하느님 나라의 은닉 속에서 세상의 죄 성이 낱낱이 폭로가 될 때, 구원받은 우리 성도 안의 마귀적 성향도 함께 폭로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 왕의 부재와 하느님 나라의 은닉의 기간 동안에 우리의 죄성을 낱낱이 폭로당하고 하느님께 완전히 항복을 하는 자로 하늘 왕의 귀환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오늘의 비유를 해석하는 중요한 열쇄입니다.

 

잘 보세요. 하늘 왕의 부재 기간인 말세(末世)의 기간 동안에는, 끝까지 자기 자신의 배만을 위해 사느라 하늘 왕의 귀환을 조롱하며, 자신들의 죄와 악을 완전하게 폭로 당하는 세상의 죄인들과, 자신들의 마귀(魔鬼)적 성향을 완전하게 폭로당하고 하느님 앞에 완전히 항복을 하는 성도(聖徒)로 뚜렷이 이분이 되는 것입니다.

둘 다 그들의 어두움과 죄성을 폭로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한 쪽은 하느님을 향한 충성과 순종으로 돌아오게 되고, 다른 한 쪽은 계속해서 그 왕의 부재를 조롱하며 여전히 자신의 배를 우상삼아 사는 죄인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이미 창세전에 하느님 안에서 결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기름을 준비한 자와 준비하지 않은 자의 성실성과 열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혹자는 그 기름을 성령이라고도 하고, 믿음이라고도 합니다만, 만일 그렇다면 나중에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갔다가 와서 문을 두드리는 장면은 어떻게 설명을 할 겁니까?

성령이나 믿음이 그렇게 막 살 수 있는 것들인가요? 그리고 시간상으로 좀 늦었다고 성령과 믿음을 사 가지고 온 다섯 처녀를 천국 문 앞에서 쫓아낼 수 있는 것입니까? 나중에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도 기름을 사가지고 와서 혼인집 문을 두드렸단 말입니다. 그건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열 처녀의 비유는 이미 결정이 나 있는,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이 그들의 정체가 완전히 드러났을 때에, 하늘 왕이 갑자기 찾아오셔서 문들 닫아걸고 심판을 하신다는 종말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나 어리석은 처녀들이나 모두 자고 있었습니다. 열 명이 다 자고 있었단 말입니다. 절대 슬기로운 처녀들이 깨어 있었기 때문에 혼인 잔치 집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닙니다.

두 무리가 다 자고 있었는데 어떤 무리만 잔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다는 것은, 어떤 무리에게는 자비가 부어지고(편애), 어떤 무리에게는 그 신랑의 자비가 부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했기 때문에 잔치 집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신랑의 자비(慈悲) 때문에 잔치 집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유의 결론(結論)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입니다. 그 말은 우리에게 깨어있음의 정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주는 말입니다. 분명 함께 자고 있던 자들이 신랑의 자비를 입어 잔치 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들을 깨어있던 자로 인정을 해 주셨다는 것에서, 우리는 깨어있음이란, 우리 쪽에서의 열심과 성실에서 격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랑 측에서의 자비와 은총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준비한 기름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慈悲)와 하느님의 은총(恩寵)과 하느님의 열심(熱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이 이미 와 있는 것처럼, 신랑의 부재 속에서 신랑의 존재를 의식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졸수도 있고, 잠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랑은 반드시 그들을 깨워 잔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랑은 준비가 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들의 정체가 폭로가 되자마자 바로 당신의 나라 문을 닫아걸어 버리십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극심한 편애(偏愛)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만을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편애 속에 들어있는 하느님 백성들이 왕의 부재와 왕의 나라의 은닉 속에서 깨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떤 것이 주인에게 칭찬 받는 이윤을 남기는 삶일까요?

달란트와 미나의 비유에서 달란트와 미나는 주님의 부재 속에서 주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주님과 백성들 간의 접촉점(接觸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접촉점은 다름 아닌 주인의 명령, 즉 말씀, 다른 말로 언약(言約)입니다.

우리의 왕은 우리에게 다시 오신다는 말씀 하나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주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성도(聖徒)들은 바로 그 주님이 남기고 가신 주님의 말씀과 언약을 붙들고 그 분이 다시 오셔서 영원한 나라의 왕 노릇 하실 그날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성도의 삶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 주인이 남긴 것을 가지고 주인의 말에 순종하고 있는 종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자꾸 종들이 무언가 이윤을 남겼다는 결과에 집착하지 마세요. 그들이 얼마를 남긴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들이 주인의 말을 듣고 장사를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루가19:13) 13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마태25:16) 16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장사라는 것은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이윤을 남길 수도 있는 그러한 것입니다. 어떤 장사가 이윤을 남기고, 어떤 장사가 손해를 본다는 것을 미루어 추측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종들이 겁도 없이 주인의 돈으로 장사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충성된 종은 주인의 인격을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만이 손해를 감수한 자유로운 장사를 할 수 있습니다. 주인을 믿는다는 것은, 주인이 시킨 장사를 통해 자신이 이윤을 남기든, 남기지 못하든, 주인이 자신의 충성을 인정해 줄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이윤을 남기면 주인과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 질 것이며, 자신이 장사를 해서 손해를 보면 주인과의 관계가 서먹해 질 것이라는 그런 우려가 없습니다. 그런 우려 속에서 힘겹게 주인의 비위를 맞추려 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주인은 그들이 남긴 이윤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인의 말에 어떻게 충성했는가를 귀하게 여깁니다. 심지어 졸아도, 잠이 들어도, 주인은 그들을 나무라지 않으신단 말입니다. 주인에게 중요한 것은, 그 종들이 주인의 말씀을 붙들고 있느냐 아니냐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이나 두 달란트를 남긴 종이 동일한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분명한 예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품꾼들은 제 3시에 왔건, 6시에 왔건, 11시에 왔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그들이 일한 양이나 성과에 따라 차별된 상을 받지 않는단 말입니다. 동일한 칭찬을 받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충성된 종들에게는 1등 종과 2등 종의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뭘 많이 하면, 1 등 종이 되어서 상급을 많이 받고, 조금 덜 하면, 2 등 종이 되어서 상급을 덜 받게 될 것이라는 조바심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위의 경쟁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자신이 손해를 보던 이윤을 남기던 모든 소유와 노동가치 또한 주인의 것으로 환언이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윤에 욕심을 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충성된 종들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 종들의 개인적 성취 정도는 주인의 칭찬에 아무런 근거로 작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인의 자비와 은총을 알지 못하는, 다른 말로 주인을 믿지 못하는 종은 어떻겠습니까? 함부로 장사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인의 자비와 은총을 믿지 않기 때문에, 손해는 바로 주인의 꾸중으로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율법주의이며 인본주의인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 주인의 말을 이행할 수가 없습니다. 장사, 손해를 봐도, 이윤을 내도 괜찮은, 주인의 그 넓은 은혜의 품속에 들어있는, 그 자유의 복음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절대 손해는 보지 말아야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자신의 지혜를 사용하여 주인의 뜻과는 다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달란트와 미나를 수건에 싸서 땅에 묻어둔 종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인이 장사를 하라고 했으면 주인의 인격을 믿고 손해를 보던 이윤을 남기던 장사를 해야 하는데, 주인에게 손해를 입히면 자신에게 돌아 올 상급이 적어질까봐, 혹시 버림을 당할까봐, 자신의 힘과 지혜를 사용하여 다른 방법을 강구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바리새인들의 율법지킴이었습니다. 이 두 비유를 읽으시면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내용이 있습니다.

 

(마태25:27) 27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루가19:23) 23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주인이 남긴 돈은 반드시 저절로 이윤이 생기게 되어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인이 남기고 간 것을, 이자 놀이 하는 사람이나 은행에 넣어두기만 해도 그 돈에는 이윤이 붙습니다. 그 돈은 땅에 묻어두지만 않으면 자연스럽게 이윤이 붙게 되는 힘이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악한 종들은 그 돈을 율법과 행위라는 땅에 묻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느님의 진짜 종들은 그들의 현실과 그들에게 나타난 현상들이 어떠한 모습을 띤다고 해도 절대 이 땅에서 손해 볼 수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삶이 성도(聖徒)의 삶이거든요.

그런데 주인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들은 그 자유와 은혜의 복음 속에 들어 있는 주인의 진짜 참 모습을 알지 못하고, 자기들의 지혜로 주인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한단 말입니다.

율법주의나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굉장한 종교적 열심을 가진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저변에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거 안하면 주인이 꾸중할 것 같은 그런 오해에서, 절대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아야겠다는, 어리석은 충정과 열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주인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없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악한 종들의 모습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태25:24-25) 24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루가19:20-21) 20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21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잘 보세요. 게으르고 악한 종이 주인을 어떻게 묘사를 하고 있습니까?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분이라 합니다. 그게 바로 창조(創造)의 법칙(法則)인 것입니다. 악한 종이 그걸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법과 하느님의 능력을 압니다. 그런데 그 법을 쥐고 계신 주인을 믿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냉혹하신 분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주인의 법을 오해한 자들은 주인마저도 오해를 하게 되고,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고작 내어놓는 것이 자기 지혜, 자기 뜻으로 쌓아놓은 자기 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게 수건에 싸놓은 한 달란트요, 한 미나인 것이며, 그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윤을 남긴 종의 삶, 그 속에서의 이윤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우리 성도들이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어떤 열매를 맺기를 원하시지요? 어떤 이윤과 유익을 남기시기를 원하십니까? 자기부인의 열매입니다. 그래야 그 부인된 그릇 속에 당신의 생명력을 가득 채워 하늘의 백성으로 삼으실 수 있으시니까요. 바로 이 열매입니다.

 

(요한12:24~26)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왕 위를 받아가지고 오실 우리 주인을 기다리며 섬기는 성도라는 종들은 주인의 부재 속에서도 그 주인이 함께 계시는 것처럼 주인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섬김의 삶, 충성의 삶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매는 우리를 대신하고 대표하여 죽으신 예수라는 밀알에 의해 이미 맺혀졌고, 가시적으로도 맺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15:4-5)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보세요. 열매는 나무가 맺는 것이지 가지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 혼인잔치 집으로 들어가게 된 슬기로운 처녀의 기름으로 비유된 그들의 열매는 신랑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와 자비의 열매였단 말입니다. 그래서 충성된 종들의 장사는 늘 수지맞는 장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의 주인은 그 장사가 이윤이 남을 수밖에 없게끔 그 장사를 주관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겉으로는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망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겉으로는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인은 그 속에서 반드시 당신의 이윤을 챙겨 가시는 능력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의 주님, 은혜의 주님, 사랑의 주님, 자비의 주님을 신뢰하며 계속해서 자신을 부인(否認)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기 사랑이 벗겨지고, 비로소 그 자기에게만 향해있던 사랑이 이웃과 하느님께로 돌려지는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나 미나의 비유에서 종들이 남긴 이윤을 종들이 챙겼습니까? 아니지요? 종들이 남긴 이윤은 전부 주인이 챙겨 갔습니다. 종들은 주인의 말씀을 듣고 그 주인이 현존하고 있는 것처럼 매순간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 삶을 산 것 뿐입니다. 종들은 자신들의 힘과 노력과 시간을 빼앗기며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맺다가, 장사를 하다가, 결국에는 다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게 충성된 종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주장, 자아 숭배, 자기사랑, 옛사람, 세상 힘에 대한 집착, 중독 등을 하나하나 빼앗기다가 결국 주인에게 몽땅 빼앗기고 주인이 주시는 상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성도인 것입니다.

주인이 주신 상이 뭡니까?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칭찬만 받지만 미나의 비유에서는 열 고을,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십니다. 정말 큰 상이지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충성을 하면 우리에게도 열 고을,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지나요?

오늘 본문의 바로 앞 장인 루가복음 1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케오를 건지시고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시기 바로 전에 그 예리고에서 소경 발토로메오를 고치십니다. 바로 그 발토로메오를 고치시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야고보와 요한이 자기 어머니와 예수님을 찾아와,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면 하나는 좌편 하나는 우편에 해 달라고 청탁을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른 제자들이 그 둘에게 크게 화를 내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보세요.

 

(마르10:42~45) 42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44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주님은 다른 이들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통치자와 하느님 나라의 통치자가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세상의 다스림은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는 다스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은 강자가 약자를 섬기는 다스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미나의 비유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미나의 비유에서 한 미나를 가지고 열 미나를 남긴 이에게 어떤 상이 주어집니까?

 

(루가19:16-17) 16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7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다섯 미나를 남긴 사람에게는요? 다섯 고을이 주어집니다. 이것을 보고 오늘날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하느님의 상급 운운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충성된 종들이 주인의 부재 속에서도 그 주인과의 접촉점을 놓지 않고 주인의 말씀에 순종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순종과 충성의 대가로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과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 등의 다스리는 권한이 주어집니다. 거기까지는 쉽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주님은 그 다스리는 권한이 바로 섬김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재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의 실체로 붙들고, 다른 말로 믿음으로 말씀을 예수로 받아들이며 그 말씀에 순종한 이들이 받는 상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더 많은 이들을 섬길 수 있는 권한, 즉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의 절정인 것입니다.

그게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많이 수고한 자들은 더 많은 섬김과 용서와 사랑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다섯 고을이고 열 고을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백성들 각자가 천국에서 차등 있는 섬김과 비움의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 똑같은 자기 비움과 섬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나의 비유에서는 열 고을,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으로 상이 주어지지만 달란트의 비유와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는 똑같은 칭찬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두에 이 두 비유는 서로를 보완해 주는 비유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차등 있는 상급이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힘써 추구하여 살아내야 할 삶이 바로 자기 부인의 삶이며, 그 삶이 성숙되면 될수록 하느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성도가 주인이 주고 가신 달란트와 미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남겨야 하는 이윤은 빼앗김이며, 자기부인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재능과 은사와 소유로 업적을 쌓아 상을 받으시겠다고요? 어떠세요? 달란트와 미나의 비유, 이제 이해가 가시지요?

 

우리 성도(聖徒)는 모두 충성(忠誠)된 종입니다. 하느님의 편애 속에 들어 있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입니다. 우리의 삶은 반드시 이윤을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우리를 비워내고 다른 이들을 위해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며, 이웃을 섬기고 하느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우리의 선택이나 우리의 열심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종의 선택에 의해 주인이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는 주인에 의해 선택되고, 주인의 말과 언약에 끌려 갈 수 있는 능력까지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어줍지 않게 우리의 종교 행위나 선행 등으로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려는 시도를 하기 전에, 그 주인의 사랑과 자비와 은총 앞에 자신을 먼저 던지세요. 매 순간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고백하시면서 내 안에 이미 살아 역사하고 계신 우리의 주인에게 도우심을 구하세요.

그게 멀리 떠난 왕을 내 곁에 두고 사는 충성된 종의 삶인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주인은 우리의 마음을 빼앗고 있는 이 세상 다른 것들을 하나하나 탈취해 가실 것이며, 결국에는 모두 빼앗아 버리시고 진짜 섬김의 삶, 진짜 비움의 삶, 진짜 낮아짐의 삶인 십자가의 삶을 살게 만드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게 있는 자입니다.

 

두 비유의 말미에 공히 있는 자는 더욱 풍성히 받는다고 하지요? 자신의 현실과 상황 속에서 하느님도 없는 자처럼 사는 그런 이들은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율법과 도덕과 윤리와 선행 등의 업적을 내어 놓아도 다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어,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이들은 더욱 더 풍성한 하늘의 풍요를 맛보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앞에 내어 놓을 수 있는 충성은 지극히 작아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이 우리에게 다섯 고을, 열 고을로 보상이 되어 결국 온전한 충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극히 작은 우리의 충성 속에서 바로 그 완성된 충성을 믿음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달란트와 미나의 비유에서도 남의 것,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라는 권고가 나오는 것이고,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도 지극히 작은 것과 남의 것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극히 작은 것과 남의 것에 충성된 삶을 살다보면 지극히 큰 것과 내 것이, 나에게 주어져 완성이 되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입니다.

이게 달란트와 미나의 비유 속에 들어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입니다.

많이 빼앗기세요. 많이 부인(否認)당하세요. 그게 우리들이 맺을 열매이며, 우리가 장사를 해서 남겨야 하는 이윤인 것입니다. 열심히 부인 당해서 열 고을, 다섯 고을을 섬기는 하느님나라의 백성들로 성숙되시기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4,376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