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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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활은 자신의 죽은 몸을 바라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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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원 [silver0824] 쪽지 캡슐

2017-04-15 ㅣ No.111481

 




2017년 가해 예수 부활 대축일


<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 >


복음: 요한 20,1-9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다.


 (1400)

 

 

요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이전부터 부활카드와 선물들, 그리고 문자들이 쇄도합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예수님은 부활하실 테니, 아니 부활하시니까 축하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카드들이나 문자들은 머리로는 예수님 부활을 축하해야 하는 줄 알게 하지만 마음으로 기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이는 마치 저희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지만 하늘나라에 살아계시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저와 더 가까이 계시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 기쁨이 아주 오래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도 매년 계란을 그리며 기뻐하고는 있지만 오래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은 부활하셨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라는 감히 물을 수도 없는 의문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올해도 특별히 기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족한 기쁨을 채우기 위해 또 먹고 마실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 그 부활이 나의 기쁨이 되게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미녀와 야수는 어쩌면 우리에게 참다운 부활의 의미를 전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한 왕자는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기만 아는 사람으로 컸습니다. 외모만을 중시하는 젊은 시절에 어떤 가난한 노파가 바치는 장미 한 송이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무서운 야수로 변하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저주는 그 장미 한 송이의 꽃잎이 다 떨어지기 전에 한 사람으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받을 때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미녀의 아버지가 우연히 그 성에 들어오게 되고 장미 한 송이를 훔치려다 야수에게 잡혀 영원히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의 딸이 와서 자신이 대신 감옥살이를 하겠다고 하고 그 과정에서 이 미녀와 야수는 외모를 넘어서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저주는 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녀의 아버지가 위험에 처한 것을 마술 거울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미녀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야수를 떠나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장미 하나 훔쳐도 사람을 평생 가두어 두고자 했던 야수였지만 그는 여자를 보내줍니다. 오늘이 지나면 영영 야수로 살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보내주는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돌아오지만 야수는 총에 맞아 죽어갑니다. 그러나 그녀가 돌아온 것을 알며 행복하게 죽어갑니다. 죽은 야수를 안고 미녀는 울며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저주가 풀려 야수의 옷을 벗고 왕자의 모습으로 되살아납니다.

 

미녀를 만난 야수는 자신이 조금씩 죽어감을 느낍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세상이 보이게 되고 이전에 하지 못했던 행동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만남은 나를 변하게 합니다. 상대가 나를 변하게 한다기보다는 상대 때문에 생긴 사랑이 자신을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이었던 자신이 죽고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새로운 내가 살아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자신의 사망선고를 자신이 직접 듣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것이었다면 자신의 죽음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기에 자신의 죽음을 자신이 보게 됩니다. 자신의 시체를 자신이 보아야 부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누우셨던 무덤을 보셨습니다. 이전의 당신은 완전히 죽으신 것입니다. 자신의 주검을 보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있을까요? 그래서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 이후에 커다란 평화를 느낀다고 합니다.

야수도 이전의 자신이 완전히 죽고 새로운 자신으로 살아나는 부활 체험을 합니다. 이는 미녀가 주는 선물입니다. 미녀가 돌아왔지만 자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돌아온 사실이 영원히 자신을 기쁘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녀가 돌아온 사실이 자신을 완전히 변하게 했기 때문에 그 기쁨이 영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부활은 자신 밖에서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체험됩니다. 아무리 부활하신 예수님이 눈에 보인다고 해도 자신을 완전히 변하게 하지 못했다면 그 부활의 기쁨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나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당장은 기뻤지만 그 기쁨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세상으로 나아가 그 부활을 선포할 힘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강림이 있자 그들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그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죽음과 부활이 수반되어야만 나에게 참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 고레띠 성녀는 열한 살 때 알렉산더란 오빠에게 끝까지 순결을 지키기 위해 14번의 칼을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알렉산더가 30년 형을 받고 감옥에 갇혀있을 때 마리아 고레띠가 알렉산더에게 백합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알렉산더는 그동안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끊임없이 저항했지만 그 이후에는 죄를 뉘우치고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이것이 부활을 체험하는 방식입니다.

누군가의 부활은 나의 죽음과 부활을 가져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실 때 베드로도 또한 물 위를 걸었던 사건은 그분의 부활이 베드로 또한 인간으로 죽고 영적으로 주님의 부활에 동참할 것임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나의 옛 자아가 죽고 그 지독히도 고쳐지지 못했던 무언가로부터 탈출하여 그것이 마치 홍해에서 파라오의 군대가 죽는 것처럼 완전히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게 했다면 그때서야 그분의 부활이 나에게 의미가 있어진 것입니다.

나를 얽매고 있었던 죄로부터 나 스스로는 결코 탈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분의 부활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출해 주신 것입니다. 이 기쁨이 그분의 부활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쩌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오랜 동행 끝에 그분을 알아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오랜 기다림 끝에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내 자신이 그분의 부활로 새로 태어남을 경험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에게만 그분의 부활의 의미 있다는 사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또한 옛 자신의 죽은 모습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그 기쁨을 미리 축하드립니다. 나의 죽음은 결국 내 안에 있었던 것이고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게 하실 분이 먼저 그 과정을 겪으시고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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