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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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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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corenelia] 쪽지 캡슐

2024-03-10 ㅣ No.170464

[사순 제4주일 나해] 요한 3,14-21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젖과 꿀이 흐르는 복된 땅으로, 참된 기쁨의 삶으로 이끌어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분께 불평 불만을 늘어놓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 속담처럼, 이집트에서 온갖 무시와 핍박을 받으며 고통 속에 신음하던 자신들을 구해내신 하느님께 ‘이집트에서 멀쩡히 잘 사는 우리를 왜 이런데 데리고 나와서 죽을 고생을 시키느냐’고 따진 것이지요. 하느님이 아니었다면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다가 맞아죽었을 그들입니다. 하느님의 보살핌과 사랑이 아니었다면 물도 양식도 없는 척박한 땅 광야에서 굶어죽었을 그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덕분에 먹고 사는 문제로 걱정하지 않게 되니 마음이 나태해지고 믿음이 약해져 팔자 좋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그들의 나태함과 약해진 믿음을 바로잡으시고자,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맹독을 지닌 불뱀들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불뱀에 물려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게 되지요. 그러자 제 정신이 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와 살려달라고, 저 무시무시한 불뱀들을 자기들에게서 치워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불뱀들을 치워주시지 않고 구리로 불뱀의 형상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으라고, 불뱀에 물렸을 때 그 구리뱀을 보면 살아날거라고 약속하십니다. 왜 불뱀을 없애주시지 않고 구리뱀을 쳐다보게 하셨을까요? 만약 하느님께서 불뱀을 없애주시는 것으로 끝났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렸을 겁니다. 그러나 구리뱀이라는 상징을 통해 고통과 시련이라는 불뱀에 물려 힘들고 괴로워도, 나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그 믿음의 눈으로 고통을 바라봄으로써 그것을 극복하고 더 나은 모습으로 성장할 힘을 얻게 됩니다. 그게 하느님의 뜻이지요.

 

예수님은 당신께서 그 ‘구리뱀’ 역할을 하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고통을 겪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소중한 외아들을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걸, 그런 사랑의 하느님을 굳게 믿고 따르면 누구도 멸망에 이르지 않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걸 우리가 깨닫게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한건 구리뱀이 아니라, 구리뱀이라는 표징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뜻을 보여주신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참된 믿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표징을 통해 당신 아드님의 목숨까지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신뢰하고 따르는 참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자 구원의 표징이 되어주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런 하느님의 ‘사랑’에 집중해야 합니다. 구원을 위한 ‘희생’도 물론 중요하고, 구원 이후에 이루어질 ‘심판’을 제대로 준비하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아보고 온전히 바라보아야만, 구원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며 이끌어가시는 하느님 섭리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이자 주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그 사랑을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심으로써 그 ‘사랑의 메시지’를 완성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메시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온전히 믿고 따르면 누구나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시니, 이 말씀은 듣는 이들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이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왜 ‘믿음’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실까요? 그것은 모든 관계를 지탱하는 기본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라는 것이 시작되는 시점은 믿음을 가지는 순간입니다. 최소한의 믿음이 있어야 성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이 나와 상관 있는 ‘살아있는 말씀’이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하고 바라는 ‘기도’가 시작되고, 믿음이 있어야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가기 위한 생활 속의 작은 변화들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변화의 과정을 두려워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나 자신을 변화시키려면 하고 싶은 것들이 있어도 참아야 할 때가 있고, 귀찮고 힘든 일들을 꾹 참고 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러기가 싫은 겁니다. 그런 상황에 마주하는 것을 하느님 때문에 피해를 보는 일로 여기기에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들지요. 즉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진리의 빛을 피해 숨어버립니다. 그 빛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 양심이 찔리기 때문입니다. 그 밝은 빛이 나를 비추면 내가 지닌 허물과 잘못이 낱낱이 드러나 부끄럽고 창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죄의 어둠’이 익숙하고 편해지면 점점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느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그리고 결국 그분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옥’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는 상태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상태로 몰아가신게 아니라, 제 발로 지옥으로 걸어들어간 겁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심판하신게 아니라, 쉽고 편한 것만 쫓는 그의 욕망이 그를 심판한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굳게 신뢰하는 이들은 그분께서 자기 삶에 일으키시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삶에 고통과 시련이라는 ‘불뱀’을 보내시는 것이 나를 미워하셔서 괴롭히시려고, 혹은 나를 심판하시거나 벌주시려고 그러시는게 아님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굳게 믿으며,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분 뜻을 실천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그 노력을 통해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진리의 빛 가까이로 나아갑니다. 그 빛에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죄와 허물, 부족함과 약함이 더 분명하게 보이기에 부끄럽고 괴롭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잘 보여야 더 잘 끊어버리고 바로잡으며 채울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죄를 용서받고 영적으로 성장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잘 알기에, 또한 그것이 자신이 바라는 바이기도 하기에 기꺼이 순명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순명을 통해 구원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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