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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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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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형 [antoniotiger] 쪽지 캡슐

1999-02-11 ㅣ No.317

    세례를 베푸는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굳건한 분이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허리를 꾸부려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입니다.  마르코 1

 

적어도 마르코의 세례자 요한이 말하는 회개의 권유는 그 어떤 파국에 닥칠 심판에서 영원히 단죄받는 것을 벗어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뒤에 오는 "더 강한 분"을 맞기 위한 하나의 준비로서의 회개를 말하고 있지 않나? 바로 세례자 요한이 말한 자신보다 "더 강한 분"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선포한 것은 단죄가 아니라 구원와 용서와 치유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회개의 선포 자체는 곧 그 자체가 "기쁜 소식"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회개라는 것도 단죄의 두려움에서 오는 반성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에 설레이며 자신을 "단장하는 행위", "차리는 행위"로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회개를 마치 명절을 준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연인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기쁨을 가지고 우리들의 묵은 때를 씻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목욕을 하듯이 말이다.

 

사실 이는 예수님의 메시지도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라고 말씀하실 때의 하느님의 나라는 과연 파국과 심판, 단죄의이미지로 작용하는 것인가 아니면 구원과 평화와 정의와 사랑의 이미지로 작용하는 것인가? 예수님의 메세지를 잘 살펴본다면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백하다. 뒤의 것,즉 회개는 구원과 용서, 하느님과의 화해, 사람 사이의 평화등의 메세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선포는, 예수님의 오심은, 하느님의 나라는 참으로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의 촉구를 단죄로 이어지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해석하는 것은 결코 복음적이 못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소생시키는 새로운 생명,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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