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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벳사이다의 눈먼 이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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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7-02-16 ㅣ No.9071

 

<22절-26절 :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치시다> 

 

22절..<그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벳사이다'는 요르단 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 들어오는 입구 동쪽 호숫가에 자리 잡은 어촌인데 베드로, 안드레아, 필립보의 고향입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데리고 와서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한 것은 그 사람을 고쳐 달라고 청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낫는 것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데리고 온 눈먼 이도 그렇게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23절..<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예수님께서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데리고 가시는 것은 눈이 안 보이기 때문에 혼자서는 잘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서이고, 이것은 예수님의 따뜻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라는 말은 앞의 7장 33절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실 때처럼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따로 데리고 나가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병 고치는 기적가로만 생각하는 것을 피하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고쳐주시는 것은 기적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다만 자비와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7장 33절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실 때처럼 여기서도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십니다.고대 유대교에서 침은 특히 안질에 특효가 있는 약재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침을 약으로 사용하신 것은 아니고, 곧 도움을 받게 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랍비들은 침을 바르고 주문을 외웠는데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에게 손을 얹으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이 눈먼 이에게 옮겨 간다는 것을 나타내는 동작입니다. 이것도 역시 그에게 믿음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치료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눈먼 이 자신이 스스로 보려는 노력을 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스스로 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법입니다. 영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24절..<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치유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처음에는 어렴풋이 보이다가 차츰 분명하게 시력을 되찾게 됩니다. 이것은 치유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한 것일 뿐 다른 뜻은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눈먼 이가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나무 같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인 것 같다고 짐작하는 것은 그가 선천적인 시각장애자는 아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25절..<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이제 기적이 완성됩니다. 믿음을 가지게 되고,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된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고' 이제 그는 '똑똑히' 보게 됩니다. 즉 완전히 치유됩니다. 

 

26절..<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지금 예수님과 그 눈먼 이는 마을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23절).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십니다. 이 명령은 다른 기적 이야기에서 자주 나왔던 침묵 명령과 같은 내용의 명령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라는 명령입니다. 그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벳사이다 사람인지, 다른 마을 사람인지, 벳사이다 사람이라면 마을 밖 외딴집에서 살고 있는지, 그런 것은 알 수 없지만, 집(사적인 곳, 은밀한 곳)과 마을(공적인 곳)이 대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부터 이 이야기는 자주 상징적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은 불신앙에 젖어있는 마을에서, 또는 눈먼 이의 과거의 삶에서 그를 분리시키는 것으로, 손을 얹는 것은 신앙에 접근시키는 것으로, 또는 자신의 약함에 대한 인식이나 선행의 격려 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눈먼 이가 차츰 단계적으로 보게 되는 것은 신앙의 단계적인 발전을 나타내는 것으로, 마침내 분명하게 보게 된 것은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깨달은 것으로, 마을로 가지 말고 집으로 가라는 명령은 과거의 삶과 세속의 삶을 버리고 하늘의 집을 향해 나아가라는 권고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해석은 성서학의 해석은 아니고, 강론할 때(또는 강의나 설교할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마르코 복음 해설부분에서 일부 발췌*

 

아울러 성경에서 소경치유부분은 5번이나 나옵니다.

그만큼 보는것과 보지 못함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해하고 있지요.

영적으로 소경은 죄. 암흑. 등을 표방하고 있어요. 그리고 본다는것은 빛. 구원이라고 보지요.

구원은 인간들이 행위로 열심한다 되는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인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요.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곧 성경속에 답이 있지요.)

마르코복음 8장을 1절에서 38절까지 순차적으로 연결해 보시면서

한 고리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인지 보이실 것입니다.


 형제님의 늘 좋으신 질문과 가르침 주심에 감사드립니다.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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