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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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 지금 장난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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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의 [leejeano] 쪽지 캡슐

2005-10-17 ㅣ No.12926

2005년10월17일 월요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ㅡ로마서4,20-25;루가12,13-21

 

           지금 장난하십니까?

                               이순의

 

 

지금 이 시간에도 어느 사제의 손전화기나 사제관 전화는 계속 통화 중일 수 있다. 인생이 실패하여 막다른 좌절을 풀 수 없어서 그걸 들어 드리느라고 통화 중인 신부님도 계실 것이고, 고령의 아침 단잠을 배려 받지 못하신 노인의 전화도 있을 것이며, 자녀의 진로나 부부의 갈등 등, 수도 없이 많은 경우를 격고 살아야 하는 게 또 사제의 몫이다. 살아보지도 않은 단순한 인생인 사제가, 살고 살아 본 이야기들의 주인이 되어서 함께 한다는 것은 사제이기 때문에 감당하는 가능성일 것이다. 그것을 해 낼 수가 없다면 당연히 사제의 자격이 없어야 하는.....

 

내가 섬에 살을 적에 대수술을 두 번이나 하게 되어서 목포의 본당 신부님의 신세를 져야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광주 큰오빠 집에서 대학병원의 검사를 다 하고, 다음 날 새벽에 첫 배를 타고 내 자식이 있는 섬으로 가기 위해 목포에 오면 새벽 안개 때문에 여객선이 결항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새벽 공기는 차고, 시간은 많고, 배는 고프고.... 그래서 본당 신부님을 찾아가 몸도 녹히고, 시간도 보내고, 배도 채운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그 신부님이 나에게 곰살스러우셔서 따뜻하게 대해 주신다거나 뭐 정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시는 분은 결코 아니셨다.

 

지금도 그 점에 대하여는 매우 무척 대단히 섭섭하지만 그래도 그 신부님께서 그 본당의 주임신부님이시기 때문에 오로지 내 좋은 마음으로 찾아가 나 알아서 혼자 몸도 녹이고, 시간도 보내고, 배도 채운 것이다. 그런데 한 번은 식전 댓바람 부터 트레이닝복 차림의 아주머니와 셔츠 차림의 아저씨가 신부님을 앉혀 놓고 육탄전을 불사하고 계셨다. 그날 그런 생각을 했다. <야~~! 신부노릇은 아무나 할 게 못 되는구나!> 라고. 신부님은 쇼파에 앉아서 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리시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싸움을 구경하는 타인의 모습은 더욱 아니셨다. 쾡한 눈동자로 보아 저녁내내 아니면, 깊은 새벽부터 그렇게 앉아 계신듯한..... 

 

젊지도 않아 보이는 그 어중뚱이 부부는 아침이 되도록 기세도 꺽이지 않고 고함을 지르며 싸우고 있었다. 곧 두둘겨 팰 것처럼, 곧 물어 뜯을 것 처럼,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주먹이 신부님의 코 앞을 수십 번 혹은 수백 번씩은 왔다갔다 하고.... 가운데 가만히 앉아 계시는 신부님은 말리시지도 않으셨다. 그 험한 광경을 바라보는 나는 저러다가 두둘겨 패면 신부님의 꼴이 뭐가 되나 싶은 조바심에 눈이 뚱구래졌는데, 정작 그 대포속에 앉은 신부님은 너무나 편안하신 모습으로 다 들으시고, 다 보시고, 다 느끼시며, 일상처럼 앉아 계셨다. 나는 결국 신부님께 쉬었다 간다는 인사는 커녕 그 싸움이 끝나는 걸 보지 못했다. 다음 배 시간이 되어서 사제관을 나왔다. 

 

다음에 신부님을 뵈었을 때 나는 그 부부가 몹시 궁금하였다.

<신부님, 지난 번에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어요? 이혼했어요?>

그런데 신부님의 대답은 아주 단순허셨다.

<그게 언젠데 지금까지 궁금해? 신부는 그런거 오래 기억하면 못써. 우리 본당 신자가 아니라서 걱정이 되어 알아 봤더니 성당에 잘 나온데. 그럼 됐지?!>

왜 그 사람들이 그랬는지? 도대체 몇 시 부터 사제관에서 싸웠는지? 왜 이혼도 안할거면서 그런 병통으로 사제관까지 와서 망신살을 뻗치는지? 그럴 때 신부님의 심정은 어떤 심정이신지? 뭐 궁금해 죽겠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신부님은 그런거 오래 기억하면 안된다고 하시니까 나는 신부가 아닌 게 분명했다.

 

그 후로 신부님들의 주변에 대해 궁금하지 않기로 한 사람이 나다. 오히려 신자들이 더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때 그 상황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후로 사람들의 사제에 관한 심리적 작용을 검토해 본 것이다. 그런데 아주 대단한 것은 나약하디 나약한 한 사제에 대한 의존심은 사제가 배려하는 관심과 무관하게 큰 작용을 하고 있었다. 사제는 그 교우에 대하여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으며,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아는 척, 대중적인 관계와 신앙의 조율 안에서 보편적 성향의 교우를 대우하고 있다. 그러나 교우들은 결코 대중적이지 않았다.

 

독단적인 관계와 감정의 조율 안에서 의존적 성향의 신부님을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라는 틀의 성직자와 나 라는 틀의 신자의 관점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더구나 사제의 주변은 등잔 밑이 어두운 반면에 신자들의 주변은 등잔 밑이 너무나 밝아서, 사제는 경우에 따라서 주변의 흐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으나 교우들은 경우에 따라서 실오라기 하나도 걸처지지 않은 알몸의 신세가 되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은 성직자나 수도자가 신자들을 지켜주고자 하는 사명적인 실행을 도모하지 않으면 그 교우의 운명은 종교로 부터 희생되는 재물이 되고 만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 말의 뜻은 교우가 독단적 시각으로 사제에게 의존하게 되면 그 틀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많은 시간과 갈등과 오류들을 거쳐서 스스로 시행착오를 인정해야만 제 자리를 회복하고, 한 단계 승화가 가능해 질 것이다. 그러나 사제의 경우는 이런 교우들의 공통적인 행보에 대하여 많은 교우들의 중복된 관심을 동반하여 받게 된다. 물론 그런 독단적인 의존심에 대하여 분별력을 상실한 보좌 신부님이나 감이 늦어지는 신부님들의 경우는 간혹 중간에 교우들 보다 더 자신의 정체성에 가닥을 잡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사제들은 그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슬기롭게 잘 지탱하고 전환하여 봉사할 수 있도록 리더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좀 어패가 있는 언어이지만.....

시대를 따라서 사제들의 세계도 변한 것이다. 더 이상 신비스런 성역의 시대를 지켜내기 힘든, 상황에 따라서 무너 뜨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몇 일 전에 수험생 기도에 모범적으로 오시는 할머니 중에 한 분이 말씀 하셨다.

 

<전쟁통에 선을 봤는데 나에게도 결혼 조건이 있었지. 군대를 마친 사람이어야 했어. 나는 죽을지도 살지도 모르는 군대에 남편을 보내고 살기가 싫었거든. 그런데 군대를 마친 남자라고 해서 약혼하고 혼인 날을 잡았는데 그 몇 일 만에 군대를 가버린 것이야. 그 그리움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지.... 전쟁통에 7년 동안이나 남편을 그리워 했는데..... 그런데 오래오래 같이 살지도 못하고 사별한지 30여년이야. 이렇게 그리운 마음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고 말고. 그러니까 남편들에게 잘햐. 남자는 여자의 품 안에서 세상을 살아. 출세도 하고, 돈도 벌고, 남자란 여자 없으면 껍데기와 같아. 그러니까 남편들에게 잘 해.>

 

구구절절이 옳으신 말씀 앞에서 나는 계단을 올라가며 농담 반 진담 반의 질문을 했다.

<그럼 신부님들은 여자가 없어서 어떻게 산데요?>

할머니의 대답은 간결하면서도 깊은 신앙이었다.

<그런 소리 말어. 신부님들은 우리 전체 교우들의 사랑을 먹고 살어. 남자는 아내의 사랑 하나만 먹고 살지만 신부님들이 이 험난한 세상에 저토록 강건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전체 교우들의 사랑을 날이면 날마다 먹고 마시고 사시는거여.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사랑의 기를 다 모아서 자시는거여. 그걸 감히 남편을 향한 여인의 사랑과 비교하지 말어. 그것은 죄여. 신부님들은 이 늙은이의 사랑도 자시고, 쪼꼬만 꼬맹이의 사랑부터 이 우주 만물의 생명체의 기를 다 모아서 아버지 하느님의 능력으로다가 먹고 마시고 사시는거여.>

그렇다. 그런데 요즘의 사제들은 이런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있다.

 

신자생활을 오래하고, 활동의 영역을 넓혀 가다가 보면, 교회공동체 안에서 알아가는 것도 많지만, 알지 말아야 할 것들도 많아진다. 뭐 누가 어디를 가서 술 먹고 신부님 한테 객정을 했다더라. 어느 날 밤에 누가 잠옷을 입고 사제관 앞에 서서 <신부니~~ㅁ>했다드라. 뭐 별 요사스런 소리가 다 나온다. 그것은 모두 신자들의 동석에서 퍼지고 퍼져 나오는 소리들이니까 그럴 수 있고, 또한 그 책임은 신자들의 몫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사를 집행하는 사제들의 영역이다. 사제들끼리야 스토커를 하는 신자에 대하여 인수인계를 하든, 나 같은 꼴통 신자에 대하여 <가서 살아 보면 안다.>고 인수 인계를 하든, 심부름 잘하는 교우는 축구공 처럼 차고 놀아도 된다고 인수인계를 하든, 성직의 세계에 대하여는 결코 알바 없다.

 

그러나 사제의 영역을 벗어나 교우들에게 공식화 되는 것에 대하여는 앞서 말씀 하신 고령의 노인도 아는 것을 모르는 무지한 성직자가 되는 것이다. 모든 성직자가 사랑 받을 자격이 있어서 사랑 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우들은 성직을 산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을 사랑한다. 때로는 숭고할 수도 있고, 때로는 우아할 수도 있고, 때로는 가벼울 수도 있고, 때로는 경망 될 수도 있고.... 그러나 그 모든 사랑은 그가 성직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제를 살고 있는 동안은 물론 이지만 사제가 사제를 살지 않는다고 해도 사제가 평신도의 사랑을 평신도에게 전하는 무모한 발상은----- 정말이지 생각하기 조차 끔직한 상황이다.

 

생각해 보라. 내가 사랑한 사제가 다른 사제에게 나의 문자, 메일, 쪽지등을 공개한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지 않을 교우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 공개의 대상이 그나마 사제라면 다행이지만 평신도라고 생각하면 죽고 싶은 자괴감 마져 들 것 같다. 누가 사제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을 것인가? 그 사안이 스토커 라고 해도 사제의 몫을 평신도에게 전하는 모순은 모순이라고 말하는 척도 보다도 훨씬 심각하다. 그래서 사제들에게는 스승이 있고, 아버지 신부님이 계시며, 동기들이있고, 선후배가 있으며, 장상이 있지를 않는가?! 그것도 안되면 피정이있고, 교육이 있고, 안식년까지 주어지는... 나는 최근에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앞으로의 신앙 생활에서 모든 사제를 대할 적에는 그 사제가 환속 할 경우를 고려해서 그 만큼만 신뢰심을 가져야 하고, 모든 언행은 그 사제가 동료 사제 뿐만 아니라, 주변에 믿을 만한 교우 누군가에게도 공개할 것을 대비하여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 반대로 그 대상이 되었을 때는 사제이기 때문에 부담감을 느낄 것이 아니라 문자, 메일, 쪽지등을 이미 제 삼자인 나에게 공개를 하였으므로 나는 만 천하에 공개를 해도 된다는 가벼운 마음을 가져도 되는! 그런저런 생각을 하니 이놈의 교회가 개판인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을 하니, 인터넷시대를 사는 사제들의 지침 사항이 강구 되어야만 할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는 아닐 것 같은.....

 

어쩌면 사제라는 직분을 믿었던 문자나 메일, 쪽지로 인하여 사제와 평신도가 법정에 서야할 일이 생기지 말란 법도 없을 것만 같은.... 사제의 직분이 무엇인가? 검은색 수단을 입는 의미가 무엇인가? 사제는 사제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 의지로 사제를 살기로 했다면 자기 자신에게 어떠한 곤경이 닥처도, 목숨 줄이 끊어져서 순교를 해야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걸 주님의 이름으로 영예롭게 받아드릴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신의 이름을 대신한 사제를 향하여 쉬지 않고 메일을 쓰거나, 손전화기의 문자를 누르고, 쪽지를 보낼 것이다. 그것이 사심일 수도 있고, 타락한 암내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사제의 직분으로 받은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지켜져야만 한다.

 

그것이 지켜지지 못했을 때는 주님을 욕 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제 자신의 욕 됨이며, 보낸 사람을 욕 되게 하고, 받은 사람을 욕 되게 하는..... 간단히 생각을 해도 교회 공동체의 사슬이 모두 꾸정물통이 되는 것이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도 그런 신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정보의 발이 둔탁하여 그 피해가 크지 않았다. 시대는 바뀌어도 사람의 심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 전달의 속도는 광속으로 날아 다니고 있다. 한 발 늣게 걸러 질 겨를이 없어진! 더구나 저장까지 되어서 두고두고, 복사에 또 복사꺼정 할 수 있는! 그러므로 때로는 이런 말이 하고 싶어지는!

<신부님, 평신도의 사랑을 놓고 지금 장난하십니까?>

 

내가 사제관을 찾아가 주방에 들어 먹을 것을 찾아서 먹고 배를 타러 간 것도, 어리버리한 부부들이 사제관에서 싸울 수 있는 것도, 그리움에 사무치신 할머니께서 우주 만물의 기를 모아서 신부님께 주시라고 기도 하시는 것도, 귀찮은 수화기에 끝도 보이지 않는 음성을 쏟아 내는 것도, 취중에라도 신부님을 한 번 안아보는 것도, 잠옷을 입고 사제관 앞에 서 보는 것도, 메일에 쪽지에 문자꺼정 날리느라고 시간을 아까워 하지 않는 것도..... 모두가 한 마음이다. 신부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신부님은 그들 중에 누구에게 그만큼의 사랑을 돌려 줄 수 있는가? 아니면 단 한 번이라도 돌려드린 적이 있는가? 웃기지 마라. 사제라는 인격체는 결코 받은 사랑을 돌려주지 못한다. 그런 사랑에 인간적인 답례를 했을 때는 상처만 남길 뿐이다. 오직 사제라는 그리스도의 신성만이 그들의 사랑을 만족시킬 수 있다. 그것만이 그토록 다양한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다.

 

인터넷 시대의 사제지침 10계명을 하루라도 빨리 정립해야만 할 것이다.

1- 받은 쪽지나 메일이나 문자는 즉각즉각 삭제하는 것을 의무로 한다.

2- 저장에 복사꺼정 해 놓고 그 사사로움에 감동하고, 심취하지 않는다.

3- 웃기는 짬뽕이라고 해도 삭제를 하고, 침묵한다.

.

.

.

이런.......

 

이는 현대의 모든 종교 뿐만 아니라 성사의 권위를 무엇보다 절대시 하는 가톨릭 교회의 중대한 사안이며, 모든 성직자에게 해당되는 긴급한 대안이 우선 되어야만 한다.

 

            

 

 

ㅡ어떤 탐욕에도 빠져 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루가 12,15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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