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2일 (수)
(녹)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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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어 좀 읽어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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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선희 [cristina70] 쪽지 캡슐

2000-09-17 ㅣ No.1769

아버지는 글을 읽으실 줄 모른다.

그래서 글을 아는 이웃분이 오면 하던 일을 놓고 반기신다.

"마음속으로 기다렸다네" 하면서 <임진록>이며 <박부인전> 같은 책을 내미신다. 그 분이

아버지가 권한 마른 뜨락에 앉으면 아버지는 언제나 상체를 그 분 쪽으로 약간 기울이시고

앉아 유심히 듣곤 하셨다.

 

그러나 바빠지는 농사일로 찾아오는 이가 없으면 아버지는 슬그머니 내 방으로 오셔서는

내 엉덩이를 두드리며 그러셨다.

"자. 뭘 공부하는지 소리내어 좀 읽어 보렴." 그러고는 내 곁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신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내가 보던 국어책을 소리내어 읽었다.

다 읽고 나면 아버지는 "한번 더 읽어 보렴" 꼭 그러셨다. 그러면 나는 신이 나서 또 읽었다.

 

내가 고학년이 되었을 때에도 아버지는 내 방으로 들어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러시곤

했다. "자. 요즘 공부하는 게 뭔지 소리내어 좀 얽어 보렴."

하지만 이미 고학년이 된 나는 묵독의 재미에 빠졌기 때문에 소리내어 읽는 것의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소리내어 읽는 것이 좀 멋쩍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내가 머뭇거리면 아버지는 상체를 내게로 더 깊숙이 기울이며 재촉하셨다.

"더 크게 귀를 열 수가 없구나!" 그런 재촉에도 불구하고 나는 낮은 소리로 대꾸했다.

"소리내어 읽는 것보다 묵독을 하면 글의 뜻을 깊이 이해할 수 있대요. 우리 선생님이."

나의 대꾸에 아버지는 아주 실망한 빛으로 망설이다 엉거주춤 일어나셨다.

"선생님께서 그러셨단 말이지."

그 말 속엔 분명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이 쓸쓸히 얹혀 있었다.

 

그 뒤에도 아버지는 가끔씩 내 주변에 와 슬며시 앉았다가 가시곤 했다.

나는 아버지가 왜 그러시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때 나는 누군가의 앞에서 소리내어 글을

읽는다는 게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타관에 가 있는 형님한테서 편지가 오면 아버지는 제일 먼저 내게 편지를 들고 오셨다.

"너밖에 읽을 사람이 없구나." 나는 어색한 얼굴로 간신히 편지를 받아 읽었다.

"부모님 전상서. 추가을 양단 기력은 일향 만강하옵시고..."

 

아버지는 내가 읽는 동안에도 "으음, 공부를 하면 저렇게도 글이 훌륭하구먼" 그러며

기뻐하시곤 했다. 편지 읽기가 끝나면 나는 얼른 방을 나갔다. 또 한 번 읽어 보려므나,

그러실까 그게 싫고 멋쩍어서.

 

도회에 나와 굵직히 나이를 먹는 동안 나는 부끄러움도 멋쩍음도 다 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내게 소리내어 글을 읽어 드릴 그 분이 없다.

 

 

 

 

-  권영상 / 동화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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