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5일 (수)
(홍)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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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421]형제님의 지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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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훈 [saint72] 쪽지 캡슐

1999-09-29 ㅣ No.456

 

 

 먼저 필자가 앞서 올린 글-’명상의 허구성에 대하여’-에서 쓸데없이

순전히 비난과 중상모략의 의도로만 프로테스탄티즘을 거론한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형제님이 오해하신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리며 형제님

을 비롯해 여러 신자분 중에도 필자가 이제까지 올린 개신교의 오류를

지적하는 글들이 한편으로는 가슴속에 와닿는 부분이 많다고 하시면서

도 사회 일반에 널리 퍼져 있는 종교에 대해 이렇게 냉소적인 비판의

글을 전개하는데 대해 일종의 거부감이나 불만이 있음을 모르지 않습

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교회의 일치를 이야기하는 이 시대에 과연 타종파

의 오류를 까발리는 것이 제대로 된 신앙인의 도리인지에 대해서도 그

리고 이러한 것이 흔히 이야기되는 잘못을 저지른 쪽이나 잘못을 비판

하는 쪽이든 마찬가지 아니냐는 양비론적 시각을 가진 이들의 비난의

표적이 됨을 모르고서 올린 글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앞서 올린 명상에 대한 답변에 프로테스탄티즘이 거론된 것은 단 하나

의 이유 때문입니다. 인간이 생각해 낸 오류 중에서 명상과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티즘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인간에게 계시하신 진리가 아닌

사람의 조그만 머리 속에서 나름대로 하느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실 것이

라는 자기 기만의 상상을 통한 자아 도취에서 나온 인조(人造)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오류는 16세기에 비로소 나타난 새로운 사

상이 아닌 과거 로마 제국 시대로부터 나타났다 사그라든 이름도 발음

하기 힘든 각종 이단파들의 주장과 전혀 다르지 않기에 오류는 인간의

망각을 발판으로 삼아 유구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유령처럼 사라졌다

가 신기루처럼 다시 또 등장하곤 하기에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거니와 그동안 개신교와 가톨릭 신앙을 비교해 가며

가톨릭 신앙의 참됨을 변호해왔습니다. 그러한 글을 올리면서 누차 강조

했었지만 그러한 개신교의 오류를 정면으로 공박하는 글이 개신교 신자

의 입장이라면 또는 상대방의 종교를 사랑이라는 명제 아래 포용하자는

주의와 주장을 가진 지극히 관용적인 가톨릭 형제 자매님들에게 어느 정

도 불쾌감을 주었을 수도 있었음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러한 글을 올렸다고 말해야 옳은 것이 될 것입니

다. 가톨릭 신앙의 진리를 설명하는 글에서 왜 개신교가 비교 논박의 대

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될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는 김에 다시 다짐하는데, 앞서 글에서 지적한 대로 이

문제 하나만 따로 떼어놓고는 적합하게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더 깊이

파고들어가, 전체의 관점 (觀點) 밑에 있는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할 필요

가 있는 것입니다. 곧 모든 종교가 동등하게 유효하고, 똑같이 좋고 참된

가? 하는 것입니다.

 

 

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운 교회는 오직 하나뿐이고, 이것만이 사람이  

세운 어떠한 교파도 주장할 수 없는 권리와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필자는 객관적 증거에 의거해서 이를 증명하고자 이제

껏 글을 올렸음을 다시 한번 밝힙니다. 역사적 사실로, 그리스도의 언행

(言行)으로,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성전(聖傳)의 소리로, 사도 전승(使徒

傳乘)의 중단 없는 계속으로, 모든 종파의 공평한 역사가들의 압도적 증

언으로, 오직 가톨릭 교회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운 교회일뿐더러 개

신교가 탄생되기 15세기 전부터 존재해왔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

스도는 일생 동안 줄곧 신앙의 통일을 고집하였습니다. 교회도 창립자의

본을 따라 똑같이 주장합니다. 혹 가톨릭 신자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 교회 공동체나 교단 조직의 완성을 의도하지 않았다

는 저들 프로테스탄트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동조하고자 하는 마음이 만

에 하나라도 있다면 필자의 이야기가 분명 거부감이 들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에 어긋나는 어떤 신조(信條)를 타협

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즉시 교회는 그 두터운 신임을 배반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기야 교회가 그 가르침의 진리에 관해서 지극히 독선적

태도를 고집하는 그것, 자기와 모순이 되는 신조에 대해서 동등함을 인정

하기를 단연 거부하는 그 태도가 가톨릭이 아닌 이를 각별히 불쾌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가톨릭 신자 중에서도 사랑과 화해의 정신만

가지고서 이 세상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사랑과 포

용의 정신만 있다면 종교간의 평화를 이룰 수 있고 그렇게 타종교인을

대하고자 하는 많은 이들을 화나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

해 단 한점의 타협도 양보도 않는 교회의 독선적 태도는 그 창립자의 태

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엄숙하게 선언하셨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르 16, 16)

 

 

 

 필자는 가톨릭이 아닌 독자들과 아울러 가톨릭 신자 중에서도 유독 개신

교의 오류를 지적하는 필자의 글을 보고서 같은 그리스도교라는 동질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 이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뜻이 조금도 없지만, 성교회

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기원(起源)과 임무를 명확히 자각하고 있는 까닭에,

창립자이신 하느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오류를 인정할 수가 없다는 말은 반

드시 해야겠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된다

는 데에 동의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이러한 것을 못 본척 모르는 척 하

는 것이 더욱 큰 불행을 가지고 온다고 믿습니다.

 

 

 

 앞서 필자가 올린 글 - ’무슨 종교를 믿든지 무슨 상관일까?’, ’두 개

의 종파가 다 옳은가?’, ’가톨릭의 혼인과 혼종혼’-에서 비교적 상세히

상술했습니다만 흔히 가톨릭 신자라도 현대의 사람들은 종교 무차별론의

사상에 자신도 모르게 물들어 있기에 어디서든 종교의 진리에 대한 이야

기를 하면 흔히 잘못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교리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면 흔히 종교 전쟁입네 싸움 났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곤 하는데 전

이런 소극적인 자세는 본연의 가톨릭 정신에 위배된다고 감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우리 가톨릭의 과거 역사가 증언하듯이 우리는 언제나 진리를 수호하

기 위해 오류를 거슬러 싸워왔습니다. 그러나 오류를 주장하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단지 그들의 편견과 허위를 미워할 뿐입니다.

 

 이렇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가톨릭 신자 중에도 이

런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피해 가고 싶은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른 사랑과 정의입니까?  

 

사랑이 죄인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까?  그

들이 잘못하고 있다면  그들에게 경고를 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요구하고 엄격하며 단호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었습니까? 특히

사랑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자비하게 남을 속이고

착취하려는 경향과 부딪칠 때는 어떠합니까?  복음사가 마태오가 기술한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서로 자비롭게 대하는 것이 자비를 받을 수 있는 유

일한 길임을 단호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마태 5, 7 ; 25, 31-46 참조).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깨어진 질서를 되찾고 정의가 회복된 뒤에라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말을 꾸짖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그들의 말은 듣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갈라진 형제들이 성서의 문자에만 매달리는 율법적 사고와 주장을 계속

할 때 ’우리가 허허 그럴수도 있지’ 그래야 하겠습니까?

 

 

 관용의 정신과 사랑의 정신을 혼동하는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올바른 사람이라면 진정한 이성의 소유자라면 무조건 양비론적 시각으

로 양쪽이 다 마찬가지 아니냐 하는 그런 편협한 생각은 버리시기를 바

랍니다.

 

 

이 세상은 평범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세상은 극단적인 선인과 극단적인 악인을 미워합니다. 선한 사람은 평범

한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악한 사람들은 방해의 대상이 되기 때

문입니다.

 

 

 물론, 형제님이 말씀하신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는 비록 세상 사람으로부터 악인으로 낙인찍힐망정 이 세상의

평범함은 거부하겠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저의 생각만이 아니라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인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공통된 것이라고 저는 굳게 믿

기에 말입니다.

 

 

 이런 글을 올리면 저를 비롯한 다른 가톨릭 신자들 모두 종교 광신자

라고 여기신다고 해도 그건 순전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적 자유’입니다.

 

 

 아래 글에서 보듯이 갈라진 형제들을 비롯한 현대인의 대표적인 태도

를 스스럼없이 떠벌이는 무리들에 의해 2,000년 전 옛날 예루살렘의 빌

라도 법정에서 보았던 같은 광경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반복되

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오늘도 또한 인류의 법정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세운 가톨릭 교회를 통하여 자기가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아들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무사주의자(無事主義者) 빌라도의 도배(徒輩)들은 민중의 만족을 얻기  

위하여 거리낌 없이 바라빠 대신에 죄없는 그리스도를 적의 손에 넘겨

십자가에 못 박고 있습니다.

 

 

 "내가 유다인인 줄로 아느냐. …진리가 무엇인가."  

 

결국 자기만 좋으면 어찌 되어도 좋지 않은가. 진리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있어도 인간이 알 수 있는가.

 

 

 누가 단언할 수 있건 초연하게 스스로 ’좋은 사람들’, ’옳은 사람들’,

’열린 마음’의 소유자라고 자부하는 현대인은 말합니다.

 

 모세의 율법 대신 과학과 역사를  내세우는 학자와 위선자인 바리사이

파 사람과 사이비(似而非) 중과 신주(神主)들은 민중을 선동하여 그리스

도를 죽이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 구실까지 지금도 옛날과 똑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거짓 예언자로서 백성을 현혹하여 국체(國體)를 손상시키며

그 제자는 비국민(非國民)이라고 소리칩니다. 거기에 덧붙여 그리스도

의 진리를 이야기하면 여지없이 과대망상에 걸린 투쟁가로 그리고 종교

전쟁의 광신자로 몰아세웁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제자들은 역시 지금도

옛날같이 겁쟁이들로서 여차하면 스승을 버리고 도망가 소리를 죽이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리스도를 무시하며 인생의 행로를 걸어

갈 수는 없습니다. 그는 너무나 의연하게 만인 앞에 서 있습니다. 다음

의 성서 말씀은 오늘날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진리에

대해서 오로지 자신의 주관적 견지에서만 판단하려고 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

였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

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

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루가 2, 34-35)

 

 

 

 

 다음의 성서 말씀이 주는 의미를 무사주의자(無事主義者) 빌라도의 후예

인 현대인들은 마음 속 깊이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힘에 눌리고 있습니다. 힘쓰는 자들이 그것을 강탈합니다."

 

   (마태 11, 12)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고상이 뜻하는 바가 있다면 우리의 인간

적인 선(善)의 부족을 의미할 것입니다.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는 우리

현대인에게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주인이라고 하면서도 나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빛이라고 하면서도 나를 보려 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길이라고 하면서도 그 길을 따라가지 않는다.

 

 너는 나를 생명이라고 하면서도 그 생명을 갈망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지혜롭다고 하면서도 나를 따르지 않는다.

 

 너는 나를 아름답다고 하면서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부요하다고 하면서도 나에게 그 부를 청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영원불멸적인 존재라고 하면서도 나의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자비롭다고 하면서도 너를 나에게 맡기지 않는다.

 

 너는 나를 고상한 존재라고 하면서도 나를 섬기지 않는다.

 

 너는 나를 위대한 분이라고 하면서도 나를 존경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의로운 분이라고 하면서도 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꾸짖더라도 나를 비난하지 말라.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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