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유게시판

수정본(이성훈 신부 성직은 벼슬이 아닐세)

스크랩 인쇄

김기조 [kijope] 쪽지 캡슐

2002-05-29 ㅣ No.34176

이성훈 신부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랑과 분노가 뒤썩인 감정으로 몇자적습니다.님과 같은 길을 가는 한 선배의 충정으로 생각하고 깊은 숙고 바랍니다.이하 존칭은 형제로 통일합니다.왜나하면 우리모두는 바티칸 공의회가 가르쳤듯이 모두가 하느님 백성이니까요.그래서 이 게시판에는 굳이 자신이 사제인가 아닌가 하는 논점이 중요하지 않고 모두가 형제적 의식속에서 좋은 글 모난글 마음에 안드는 글을 공유하면서 정상의 룰안에서 서로 논박하고 또 서로의 견해가 다르더라도 종국에는 사랑으로 이해 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성훈 형제!

결론적으로 먼저 말하면 사제직은 님의 사고 언저리에 깊게 묻어 있어 보이는 듯한 권력적인 벼슬이 아니라 처절한 봉사직에 기초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글을 쓰는 저 역시 무척이나 혼란스러우나 형제가 그동안 쓴글을 통하여 안타까운 연민을 금할수가 없어 앞으로 지금 사제 생활 한 날 보다 앞으로 사제로  살아야 할 날이 더 많은 형제를 생각하고 누군가가 꼭 지적해주어야 할것 같아 고뇌어린 충고를 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요.깊은 이해 바랍니다.차후 전개될  시니컬한 어법 다시 한번 그 말의 꼬뚜리 보다 우리 안에 내재된 영원한 숙제이며 과제인  Hic et Nunc 즉 지금 여기서 한국교회의 성직자가  복음을 살지 못하면 예수를 살지 못하면 안된다는 경각심과 함께 형제의 약간은 잘못 정향된 사고를 지적하여 참으로 그 분의 올바른 충복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적은 것이니 불쾌히 생각마시고 마음으로 받아 주신다면 고맙겠구려.

 

 

 

자 이제 형제가 적은 글을 통하여 신학적 사고에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낸 부분을 몇가지 지적하고 형제의 뒤틀린 성직자 중심의 사고가 주는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첫째

형제여..형제는 어느 글에서 자신이 신부임을 밝히고 말하면 교회의 공적 가르침이 된다는 ,참으로 탈 신학적인 언설을 신학성이 약할수 밖에 없는 착한 평신도들을 향하여 반협박조및 그대 과시조의 글을 적은 것을 보고 과연 요즘 한국 신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소.내가 배운 신학과 교회론은 전혀 그러하지 않았는데 혹 형제가 나와 다른 당나라 신학교를 나왔나 하는 의구심을 지울수가 없소.

 

 

이승훈 형제. 이 평등한 인터넷 공간에서 조차 평등을 거부하고 굳이 신부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교묘히 결국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불쌍하기도 하고 참으로 선하기도 한 한국의 평신도들을 이런식으로 속이는 구나.이제 신학교를 갓 졸업한 친구로 보이는 사람이 하는 연민을 금할수가 없었소.즉 한국교회의 장래가 무척이나 염려되었단 말이요.보시요.간단히 말하면 교황의 무류권도 교황이 교황의 좌에서 선포되는 회칙이나 선언이 되어야 하고 또 동료 주교단과 일치된 견해로 발표하는 경우에 국한되는 것이요.즉 교황께서 단순히 사적인 자리나 위와 같은 형식을 빌리지 않은 가르침 내지 선언은 지극히 한 개인의 사적 견해에 불과한 것이요.

 

교황님 마저 그러할진대 일개 보좌신부가 인터넷상의 글을 쓰면서 본인이 사제라고 알려지면 이것은 교회의 공적 가르침이 된다는 참으로 놀라운 이 신부 자신이 교회다.라는 무서운 무식과 젊은 보좌 형제의 입에서 이토록 중세를 연상시키는 언설이 남발되는 것을 보면서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수가 없었소.형제는 서울 신학교에서 그러한 교회론을 배웠나요.서울 신학교 교회론 교수 신부님에게 한번 여쭤바와 할것 같군요.부디 정확한 공부와 봉사의 마인드를 가진 성직의 삶을 사시요.

 

둘째 형제는 한 사제로서 경고한다는 논리를 펴며 신자들의 논리를 공박하고 겁박주었소.형제여 갈수록 태산이다 하더니 형제가 무슨 논리로 자신의 의견에 반한 글과 사상이라 하여 그런 경고를 하는 것인가? 참으로 이점에서 보면 그러한 형제의 글에도 논리적으로 반박한번 제대로 못하고 형제가 스스로 신부임을 밝히고 나서는 그러한 지나가는 개도 웃을 협잡꾼에 가까운 논리를 한창 아름답고 바른 교회관을 지향하며 눈룰겨운 의식의 정화를 매일 하여야 할 일개 보좌신부의 논리에도 줄기차게 추천을 해주는 불쌍하고 아주 잘못된 신앙안에 있는  가여운 그러나 너무나 선량한 신자들의 신앙적 어두움을 보면서 형제와 앙상불로 한국교회의 아픔을 또 느끼게 해주는 군요.참으로 평신도들도 신학을 좀 공부할 시스템을 확대 시켜 그들의 의식을  깨우지 않으면 착한 평신도가 성직자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한 도구일수도 있다는 생각은 우울한 아픔입니다.

 

 

세번째로 형제는 글에서 전혀 어떠한 논리도 없이 글을 마음대로 휘갈기민서 그리고 연속 시리즈로 도배하면서도 전혀 자신이 무엇을 잘못 판단하고 있는가 하는 분별력이 없음이 안타깝소.즉 형제는 자신이 이곳 계시판 수준을 생각하여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 신학적으로 어려운 내용과 지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 또한 참으로 오만덩어리 젊은 철부지를 넘어서 형제의 의식이 참으로 걱정되는 부분이요.내가 형제의 신학교 교수 신부였더라면 호되게 일년 Suspensio를 줬어라도 바른 봉사의 마인드를 가진 자로 만들어 파견했을 것이요.하기야.신학교에서 자신을 철처히 감추고 살아가는 신학생들.신부만 되고 보자는 이들 신학생의 의식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교수 신부들이 무슨 잘못이겠소. 이점을 어떻게 해야 신학생들을 정확히 알수 있을까 하는 교수 신부및 교구의 성소 담당 신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척이나 교회의 현실이 걱정되었전 적이 있었소

 

.즉 신학교에서는 철저히 사제가 되고자 하는 일념으로 복지 부동하여 교수 신부들 눈을 철처히 속이고 나서 신부가 되고 나서 본색을 드러내며 개판치는 이들을 보면서 교수 신부들이 한탄하는 말이요.형제도 무슨 말인지 잘알겠지요.ego pater tu pater 외치면서 갓 신부된 친구가 그전의 순박한 얼굴을 싹 감추고 안하 무인하며 교회를 어지럽힌다는 이야기이죠.교수 신부님들의 그러한 걱정은 참으로 안타까운 우리 교회의 어두움이죠.

 

 몰론 형제도 아시다 시피 한국 신학교의 각 신학교의 특수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영성적 교육의 빈곤과 교수와 신학생들간의 해묵은 불신들.그리고 일부 교수 신부들의 독선등 신학교  교육적 프로그램 전반의  문제가 대단히 심각하지만. 이 시대 신부만 되고 보자는 신학생들의 잘못된 의식도 큰 문제요 그리고 그 잘못된 의식역시  이곳 게시판을 보더라도 교회에 대한 사랑의 쓴소리를 하는 다른 형제들의 의식을 전혀 이해 하지 못하고 하이에나 처럼 매도하며 성직자 섬기는 것이 최상의 구원의 지름길로 생각하는 안타까운 신앙인들 또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그러나 종국에는 우리 교회가 우리 성직자들이 그들을 참된 예수님의 삶으로 이끌지 못한 책임이 더 크니 그들 서글픈 신자들에게 이 시대 성직자 누가 무슨 말로 그들을 꾸짓을 까요

 

.답답하고 불쌍하지만 오직 신앙의 전사로 살아가는 그들,아니 차라리 신앙이라 보기 보다는 광신에 가까운 이들.이곳 게시판에도 몇 사람 눈에 띄지요.허나 그들에게 무슨 돌을 던질수 있겠는가? 모든 잘못은 그들을 잘못 가르치고 인도한 교회와 우리 한국교회의 썩어빠진 정신을 가진 일부 성직자들의 잘못인데 말이요. 인내하면서 교회가 쇄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몸으로 보여줄때 그들역시 언젠가 교회와 하느님을 사제와 하느님을 혼동하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한 자신의 하느님을 찾아 나가는  참된 신앙인이 되겠지요.그래서 형제와 나의 역할이 의식이 중요하든 겁니다.

그러니 더욱더 이 시대 교회의 성직자들이 다부지게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할 역량과 영적 성숙으로 신자들을 이끌어야 할 책무가 막중하겠죠.

.

 

 

형제여.신부만 되면 무엇을 하나요.제대로 된 신부,복음적 삶속에서 복음적 징표를 판단하며 겸허한 봉사자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참된 사제가 되지 않는다면 인간적으로 미성숙하게 마치 성직이 자신의 신분상승의 도구쯤으로 생각하고 이 평등한 시대에 발가벗은 몸으로 자신이 왕인냥 우쭐거리며 온갓 시건방을 다 떨며 평신도들을 자신의 통치 대상쯤으로 생각하는 신부가 된다면 그 영혼은 성교회를 원천적으로 불행에 빠뜨리는 장본인이요.자신역시 신부가 안되었다면 정상의 사고를 가진 상식인이었을 것인데 비정상의 인간.영적으로 불행한 인간.차라리 신부이기에 불행한 자임을 공언하는 것이요

 

.나는 주위에서 이런 신부들을 자주 봅니다.그리고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을 이유로 과감히 옷을 벗는 동료들을 봅니다.그들에게 누가 돌을 던지겠으며 누가 그들의 새로운 선택을 험구 하겠어요.차라리 다른 이가 자신이 성직의 원천적 가치를 살지 못하면서도 행세하며 떠도는 불쌍한 무리 보다는 과감히 기득권을 벗어 버리고 초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선택이 더 가치 있다는 생각도 해보았어요,그러나 중요한 것은 옷을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자신을 더욱 채근하여 복음적 모습으로 회귀하는 이가 더 아름답겠죠.

 

.한국교회의 성직자들의 탈선과 문제는 바로 이점에서 신학교 교욱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고 교회의 쇄신은 바로 성직자들의 양성기관인 신학교의 쇄신에서 부터 출발하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시던 한팽생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처절한 봉사의 삶을 한평생 사신 존경하는 모 영적 지도 신부님의 말씀이 더욱더 구구절절히 가슴을 때리는 것은 비단 이분만의 생각만이 아닐것입니다.그것은  바로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바로 주교.사제등 성직자들의 잘못된 의식에서 출발한다는 필자의 확신이녀 아직도 참된 사제직을 살고자 노력하는 많은 참된 성직자와 의식있는 평신도들의 신념도 마찬가지이겠죠,그래서 교회의 쇄신은 성직자들의 의식의 봉사에 기초한 쇄신을 말하는 것이고 성직자들읠 제왕적으로 만드는 교계제도에 대한 올바른 권한 행사에 대한 쇄신이며 그러한 구조에 대한 쇄신이 되는 것이어야 하요.이런 생각으로 긴여정의 사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후배님께 다른 후배 신부들에게도 늘상 주장하는 필자의 논지를 가혹하리 만치 강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요.서운하게 생각마시요.

 

그러므로 이 선배는 신부로서 그 정체성을 살지 못하고 자신이 없으면 평생 남을 속이고 끌려다니며 기만의 삶을 살기 보다는 차라리 깨끗이 옷 벗고 나오는 이들이 모습안에서 참 인간의 양심과 우리 교회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차라리 다행으로 생각하요.형제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부지게 그러한 비참한 질질 끌려다니는 사제의 삶.즉 봉사보다는 통치에 맛을 들이고 본질을 잃어 버리며 불행의 삶을 살기 보다는 이제 초행이니 다부지게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요.형제의 의식을 바꾸지 않으면 지극히 그럴 소지가 보입니다.부디 경계하시길 바랍니다.

 

답답한 젊은 제 이보좌 신부님.

 

신부는 벼슬이 아닙니다.. 형제가  누군지 모르는 이 사람이 형제 글을 보고 오죽 화가 치밀었으면 이러하겠나 생각하시고 또 긴 성소의 삶을 동행하는 동반자로서 선배로서 깊은 충고가 필요함을 느꼈기에 적은 것입니다.몰론 입장이 난처할수 있는 부분이 있겠지요.그러나 큰 보약으로 삶는다면 아주 복음적인 모습을 가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사제가 될것임을 확신해요.

나에게 자네 같은 보좌 신부가 있었다면 ,,,,

 

 

 

이성훈 형제님. 열번을 참으면서 형제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직언의 칼날을 선배가 빼들었으니 깊이 숙고하시길 바라요.내가 누군지 알 필요도 없으시고 알려고 하는 노력도 부질 없는 것이요. 단지 그대와 같은 길을 가는 선배라 생각하시요.그대 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은 선배 말이요..교구 따지지 말고,부다 사제직은 벼슬이 아니라 노파심에서 또 말하는데 철저한 봉사직이고 또 평신도와 이 신부  그리고 모든 성직자들은 평신도들은 직무상의 차이일뿐이지 수평적 카리스마를 가진 형제적 그리스도의 다 같은 신비지체임을 다시 바티칸 공의회를 공부하고 현대 신학을 공부하고 깊이 깨달아 더 이상 신부라는 헛된 헤게모니로 신힉적 정향이 약한 평신도들 위에  더 이상 군림하려는 생각을  하지 마시오.형제가 이제 갓 서품 받은 사람인데 벌써 부터 이러한 사고를 견지하는 것을 보니 무척이나 염려됩니다. 솔직히 말입니다...즉 신부는 벼슬이 아니고 SERVUS SERVOURM 한 그야 말고 종의 종일뿐입니다. 이러한 사고를 견지햐야 합니다.즉 주님께서 당신제자들에게 전생에서 그리고 최후의 만찬마시에서 행하신 세족례를 통하여 돌아가시기 전날에 또 한번 의식을 통하여 당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하신 의깃이 이것아닐까요.

 

 

그리하여 우리는 교회는 사제는 우리 주님께서 시공을 넘어서 이런 의식을 견지하라고 하는 지상명령과 같은 이 준엄한 삶을 늘 ANAMNESIS 하는 의식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 교회 구성원은 성직자이던 평신도어던 자신의 직무가 봉사직에 있음을 망각하고 어느새 주님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통치자의 권력을 휘두르는 자의 모습으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교회를 절망으로 몰아 넣는 원인이 되겠지요.

 

 

졸문의 내용 마감합니다.이성훈 형제 부디 형제안에 형제도 모르게 독버섯 처럼 자리잡은 허튼 부질없는 사제적 특권의 망상을 버리고 겸허한 봉사자의 마음으로 사제직을 자라매김하여 이제 초행의 길을 가는 제이 보좌신부의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여 머나먼 여정 끊까지 완주하는 참된 봉사자의 삶이 되길 진심으로 어느 못난 선배가 바랍니다.

 

혹 결례가 있었다면 깊은 이해 바랍니다.누가 형제에게 충고를 할수 있을까요.이시대 성직자들이 잘못된 길을 가면서도 헛발을 내딛으면서도 잘못된 것인줄 모르고 더 우직스럽게 불행의 길로 들어서는 이가 많은 것은 바로 그 누구도 옆에서 충고해줄 사랍이 없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삶을 살수 밖에 없는 메카니즘 때문이 아닐까요.그래서 잘못된 길을 갈때 동료 사제나 아니면 평신도들의 따끔한 충고는 아프나 그 열매는 받아들이는 마음자세의 의하여 깊은 보약으로 형제의 가야할 여정의 식량이 될수 있겠죠.부디 그러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부디 평신도들도 무조건 예스맨이 아니라 진정 여러분들이 교회를 사랑하고 사제를 아낀다면 아닌것은 아니요.이것은 시정해주십시요 하는 보다 큰 사랑의 예언적 틀안에서 우리 교회를 바라 볼수 있는 영적인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그렇제 않으면 사제들 일개인의 인격적인 면을 넘어서 그들에게 시스템상 그 누구도 감히 충고할수 없는 한국교회안의 현실안에서 설사 충고를 하더라도 독불장군으로 어느새 되어버린 그들앞에 무력하지만 그래도 그 사제를 진심으로 아끼고 한국교회를 아낀다면 즉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잘못된 부분은 이것은 아닙니다.하고 분명 지적해줄수 있는 깨인 신자가 되시는 것이 여러분이 열심히 기도 하는 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참된 구원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는 것이지.잘못된 교회와 성직자들의 비리및 추문등 악습들을 무조건 옹호하고 감싸주며 그들을 숭배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여러분도 일종의 방조적 죄를 저지른 자임을 직시하지 않으면 구원은 여러분곁에 없음을 확언에 찬 어조로 말합니다.부디 참된 신앙인.교회와 성직자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상에서 오늘도 교회의 어두움으로 인하여 고난을 또 겪고 계시는 에수님을 바라보는 그분을 사는 삶을 살때 그때 진정 구원이 여러분 가까이에 와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성훈 헝제 혹 형제님의 글을 잘못 독해 하여 지나친 충고를 하였다면 결례를 용서하시요.허나 제가 파악한 형제의 논지는 이렇게  파악을 하였기에 부득이 하게 벼르다 벼러서 글을 올린것이요.잘못된 점이 있으면 깊은 묵상으로 수난 받는 야훼의 종을 묵상하고 마음을 추스리시요.

 

 

그리고 끝으로 조상들의 제사문제로 인한 순교부분.즉 당시 교회의 역할에 대한 부분에서 형제의 의견만 고집하지 말고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분의 내용도 깊이 새겨 들었으면 좋겠군요.객관적으로 솔직히 교회사를 공부한 형제보다 형제의 논리에 반한 한 평신도의 주장이 필자에게는 더 설득력있게 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저는 평소 교의신학과 교회론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죠.그러므로  형제와 같은 공간에서 공부하여 최상의 성적을 낸바 있읍니다.즉 바로 형제들의 논쟁이 있는 그 문제를 즉 선교의 적용문제의 논조로 풀어 A+을 받았었지요.즉 평신도 형제의 글을 무조건 내가 그래도 신부인데 니보다 더 안다하는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그 평신도의 논거가 형제의 논점보다 더 탄단한 논리를 가지고 있음을 겸허히 한번 살펴 보시기 바래요.

 

즉 세계 교회사에서 도미니꼬회와 프란치스꼬회가 끊임없이 대립한 것이 이 논점이 바로 아답시옹의 문제였지요.결국 근대화 시대에 16세기 이후 이 두 수도회를 제치고 동양 그 중 중국의 선교에 성공한 것은 바로  그 문회에 대한 적응주의를 표방하며 중국인의 제례와 의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토양안에서 그 문화안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한 아답시용.즉 문화적 적응주의를 표방한 예수회의 탁월한 선택이며 복음적 선택이 주는 결과였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한국에서는 예수회 같은 수도회가 전교를 한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일어난 신앙의 한계와 수도회를 통하지 않고 바로 중국을 통한 로마의 가르침에 역점을 두었던 탓에 부득이 하게 많은 안타까운 순교가 다른것도 아닌 제사 문제로 인하여 일어난 측면이 있지요.이는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서 다를 것이나 한국의 제사 문제를 예수회처럼 적응주의 노선으로 교회가 인정했다면 부당한 순교가 덜 했젰지요.즉 로마 교회와 한국교회의 직접라인이 없었고 예수회의 맛테오 릿치 같은 의식을 가진 수도외화 선교사가 아니라 중국의 교구를 통한 한국교회가 지침을 받은 성격이 강한바 당시 한국의 선교와 중국의 선교가 이중잣대로 적용된 부분때문에 많은 안타까운 순교가 조선에서 일어나게 된것이 아닐까요.이것은 저의 논지이고.

 

부디 교회사를 그 민족의 토착화와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와 함께 TABULA RASA정책을 편 도미니꼬 및 프란치스꼬 선교사들의 라틴아메리카의 민족문화 압살정책으로 인하여 보프 신부가 "하느님은 선교사보다 먼저 오신다"라는 책의 서문에  말했듯이 "아 우리가  슬프고 괴로운 것은 그들이 도착한 때문이다.그들은 우리를 그리스도교화했지만 우리를 마치 동물인 양 한주인에게로 팔아 넘겼다. 광란의 시기에 미친 것 같은 사제들을 통해서 복음이 들어왔고 그들은 참되다는 하느님을 가지고 들어와서 우리의 문화를 완전히 말살하였고 그들은 한손에는 복음으로 한손에는 칼로 무장하여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르쳤고 꼿을 시들게 했다.자기네 꼿을 살리려고 우리 꽃을 훼손하고 없애 버렸다"라는 내용에서 많은 묵상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럼 영적으로 이성훈 형제께서 봉사의 마인드를 가진 아름다운 사제로서 영원히 살아가시길 바랍니다.쓴소리 깊은 보약으로 받아들인다면 좋겠군요.그래야 이 긴글이 쓸데 없는 낭비의 시간이 안되겠죠. 형제님 성직은 벼슬이 아니라 봉사직임을 늘깨닫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건강하시길.

 

어느 못난 선배가



3,220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