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자유게시판

은자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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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8-06-28 ㅣ No.121621

 

토요일인 오늘 낮 3시에 논현동 노보텔 앰버서더 호텔에서 있은 고종사촌여동생의 딸 결혼식장에서 70세 노인이 된 은자누나를 만났다.

“어머! 이게 몇 해만이야?” 은자누나가 먼저 나를 알아보면서 반색을 했다.

여자의 변신, 50년이란 긴 세월이 지난 여자의 변신을 단박에 알아낼 수 있는 남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리 흔치 않을 것 같다. 10초쯤 지났을까, 은자누나의 옛 모습이 겨우 그 얼굴에서 어렴풋하게나마 떠 올랐다.    

어림해 보니 50년 하고도 몇 해가 넘은 것 같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였으니 말이다.

“글쎄말이야, 계산이 안 되네. 하도 오래 만이어서...” 하며 나는 누나가 내민 손을 부여잡았다.


은자누나는 우리 집 가정부였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우리 집이라고 여기며 살았던 우리 작은집 가정부, 그때 말로는 식모였다.

나보다 세살인가 많은 은자누나는 우리 고향농촌마을 이웃동네에 사는 나와는 같은 초등학교 선배누나이기도 했다.

나처럼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농촌에서는 먹고살기조차 어려워 입 하나라도 던다고 아는 사람 소개를 받아 서울에 올라와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다가 두 번째 집으로 우리집 식모로 온 것이었다. 


은자누나는 주인집 아들인 내 사촌동생들한테보다 객식구인 나한테 더욱 살가운 정을 주곤 했다.

숙모가 친자식인 내 사촌동생들과 남의 자식인 나한테 때때로 옷이나 음식으로 차별을 할 때도 있긴 했겠지만 큰 차별이 아니어서 그러려니 해도 될 일을 은자누나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보아서 그랬는지, 그것이 때로는 오히려 나를 곤혹스럽게 할 때도 있었다.

은자누나 생각에는 삼촌숙모 밑에서 남의집살이를 하는 내가 자기 신세처럼 가련해 보여서 그랬을 터이지만 나는 전혀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용돈이나 먹고 싶은 음식 같은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매우 풍족했다.

 

삼촌이 숙모에게는 비밀로 하고 용돈을 늘 넉넉할 정도로 내 손에 쥐여 주었고 그것조차도 모자라서 나는 걸핏하면 숙모를 속여서 용돈을 타내곤 했다.

영어사전 산다고 돈을 타 내고, 며칠 지나면 콘사이스 산다고 또 돈을 타내고, 또 며칠 지나면 다시 딕션너리를 산다고 돈을 타내고.... 책 한권을 가지고도 2중 3중으로 돈을 타내는 식이었다.


숙모는 시골출신에 무학이라서 내가 영어로 샬라샬라 하면 더는 물어보지 않고 돈을 주었고 몇 번은 책 사온 것을 보여 달라고 하며 확인을 하시더니 나중에 삼촌이 자재국 구매담당으로 가서 돈을 잘 벌어오면서부터는 그 확인조차도 않으셨다.

내 씀씀이가 차츰 헤퍼지면서 종종 삼촌 사무실에 용돈을 타러가기도 했다.

걸어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교통부 자재국 구매과 사무실, 납품업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삼촌 사무실에 가서

“작은아부지요. 저.....돈좀....”하면 삼촌은 곁에 있는 업자에게 눈짓을 하며

“어이, 임사장, 얘 좀 데리고 나가서 용돈 좀 줘서 보내” 하면 그 뒤는 만사오케이였다.


내 주머니에는 늘 돈이 남아돌았고 심지어 감출 데가 없어 내방 천장 무늬도배지에 면도칼로 ㄴ자로 금을 그어 그 속에 돈을 교묘히 감추어 놓고 꺼내 쓸 정도였으니 내가 먹고 싶은 것, 내가 사고 싶은 것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그다 친구들까지 사 먹이고, 또 내 사촌동생들에게는 형아 친구한테서 얻은 것이라고 하면서 먹을 것을 나눠주고...

그렇게 돈을 마음대로 쓰는데 아무리 숙모가 눈치를 준들 그 눈치가 내 안중에 들어올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전혀 내 속을 모르는 은자누나는 늘 내가 안쓰럽고 불쌍해 보였던 모양이다.

런닝셔츠를 빨아서 나눠줘도 그 중 제일 새것은 나를 주고, 맛있는 것은 감추어 놓았다가 몰래 내게 갖다 주고, 그래봤자 그보다 맛있는 것을 실컷 사 먹은 내게는 그게 별로인데도, 은자누나가 자꾸만 그러다가 숙모한테 야단을 맞는 경우도 여러 번 보았다.


이심전심이랄까 나 또한 은자누나에게는 진심으로 잘 해 주었다.

내가 살던 용산역 철도관사동네 앞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생기면서 쓰리꾼들이 모여들었고 그 밑에서 망봐주고 앞잡이 역할을 하는 똘마니들을 잡아다 패 주는 과정에서 얻은 진짜금반지(지금 생각하면 그게 장물인데) 하나를 은자누나에게 몰래 끼워준 기억도 있고, 그 반지가 은자누나 손가락에 커서 맞지 않으니까 은자누나가 손가락에 실을 감고 그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을 본 기억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은자누나가 결국은 나한테 이상하게(?) 대해서 더는 곁에 두면 위험하겠다는 억울한 누명까지 쓰고 숙모에게 쫓겨나 가까이 사는 우리 고모네 집으로 식모살이를 옮겨 갔고, 고모네 집에서 몇 해 동안 식모살이를 하다가 시골로 내려가 시집을 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을 끝으로 은자누나에 대한 소식은 두절 되었다.


계산해 보니 52년 만에 바로 그 고모네 딸의 딸 결혼식장에서 70백발이 된 은자누나를 만난 것이었다.

“왜 부인하고 같이 오지 그랬어.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은자누나가 내게 그랬다.

“동창 아들 예식이 있어서 그리로 가고, 누나는 왜, 부군 모시고 오지 그랬어?” 나도 바깥분이 궁금했다.

“4년 됐어. 우리 그 양반 가신지가.....”

안타까웠다. 곱게 늙은 것을 봐서는 아내에게 큰 고생을 안 시키고 산 것 같아보였는데.

“텔레비에 나온 것도 보고 언젠가 라디오 무슨 프로에 나와 얘기하는 목소리도 들으면서 그 양반한테 자랑했었는데.......”

은자누나가 그랬다.

“그럼 나한테 소식을 좀 주지 그랬어?”

은자누나에 비하면 나는 참말로 너무 무심했었구나 하는 후회를 하며 내가 그랬다.

“향이(고종사촌여동생) 편에 그쪽소식은 잘 듣고 살았어.”

그런데도 내게는 연락을 안 했던 모양이다.

“이젠 우리 서로 연락하고 살아요, 같이 늙어 가는데....옛날 생각하면서.....”

내가 그러자

“그래 그때가 참 좋았는데 말이야. 그럼 한번 내 잔치에 올래?” 은자누나가 그랬다.

 

9월초에 은자누나 7순 잔치를 한단다. 원래는 부군하고 같이 해외여행을 하기로 했었는데 부군이 세상을 떠나 2남2여인 자식들이 그 대신으로 7순잔치를 하겠다고 해서 차리는 잔치라고 그날 우리 내외가 꼭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전화번호도 주고받았다.

“그래 누나, 그때는 내가 우리문화원 민요명창들을 왕창 데리고 가서 한번 신나게 놀아줄게.” 하고 헤어졌다.

 

늙으면 추억으로 산다더니 장마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늘밤은 내 어릴 때, 철없이 살았던 그때가 너무 그리운 밤이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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