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6일(목) 성루드제로, 성브라울리오,
성카스툴로님..등..
<일 람>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5일)의 친구인 그레고리우스(Gregorius)가 지도하던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성 루드게루스(Ludgerus, 또는 루드제로)는 프리슬란트(Friesland) 사람으로서 프리슬란트와 색슨인들에게 복음의 씨를 뿌린 사람이 되었다.
그는 몸이 나약한 사람이었지만, 의지는 매우 강인하였으므로 사제가 된 후 프리슬란트로 가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선교는 성공을 거두어 많은 개종자를 얻었고 이교 신전을 파괴하였다. 그 후 그는 알퀴누스(Alcuinus, 5월 19일)로부터 명을 받고 영국 선교에 나섰다가 로마(Roma)로 왔고, 다시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에서 3년을 지냈지만 베네딕토 회원으로서 서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성무일도에 특별한 신심이 있었는데, 여행 중이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성무일도를 먼저 바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그리고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임종 날 아침에도 미사 중에 강론하고 또 다른 성당으로 가서 봉사한 뒤에, 그날 저녁에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
그는 프리슬란트, 색슨, 브룩테리 그리고 수에비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이름난 선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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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레흐트의 성 루드제로(Ludgerus)
은수자 성 바실리우스(Basilius, 또는 바실리오)의 전기는 그분의 제자인 그레고리우스(Gregorius)가 썼다. 성 바실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과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움막을 세웠는데, 레오 6세와 알렉산데르 치하 때 스파이 혐의로 누차 체포된 경험이 있다. 법정 심문에서 그는 발로 차이고 매를 맞는 등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끝내는 사자 우리에 던져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으므로 이번에는 바다에 던져졌지만 돌고래가 그를 육지로 데려다 주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성 바실리우스는 그리스도인과 이교 백성들 사이에 높은 공경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날 아침, 그는 태연하게 자신을 고문했던 그 도시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기적 외에도 수많은 기적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으며, 또 치유의 은사와 더불어 예언의 은혜도 받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세비야의 성 이시도로(Isidorus, 우)와 성 브라울리오(Braulius, 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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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브라울리우스(Braulius, 또는 브라울리오)는 에스파냐의 어느 주교의 아들로 태어나 631년에 사라고사(Zaragoza) 교구의 주교이던 자기 형을 승계하여 주교가 되었다.
그는 그 당시 교회 성직자 생활의 개혁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그의 스승이자 친구이던 세비야(Sevilla)의 성 이시도루스(Isidorus, 4월 4일)를 지원함으로써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주교가 되었다.
성 이시도루스처럼 그도 역시 학문에 전념하였고, 로마 고고학의 여러 저서들을 연구하여 그리스도인 저술가로서도 좋은 평판을 받았다.
성 이시도루스로 하여금 “어원학”이라 부르는 백과사전 편찬에 참여케 한 사람도 바로 브라울리우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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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성 카스툴로(Castu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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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재임 기간 동안 교황 카이우스(Caius)는 로마에 거주하는 신자들의 안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전설적인 행적이긴 하지만 황제의 의전관이자 열렬한 그리스도인이던 성 카스툴루스(또는 카스툴로)가 황제의 궁전 안에서 종교 의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자리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궁중 안을 수색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는 자기 집에 신자들의 은신처를 마련하였고 집회도 가졌으며 집합 장소로도 사용하였다.
이것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낀 카스툴루스와 그의 친구 티부르티우스는 개종자들을 찾아다니면서 교황께 몰래 데리고 와서 영세를 시켰다. 어디에나 배교자와 밀고자는 있는 법이다. 그는 배교자인 토르콰투스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으로 고발당하여 로마 총독인 파비아누스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은 다음 구멍 속에 던져졌다. 박해자들은 그 위에 모래를 덮었다. 이렇게 그는 생매장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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