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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1일(토) 성루피치노, 성녀베네데타님..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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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경 [p33233323] 쪽지 캡슐

2009-03-20 ㅣ No.132099

 
성인명 니콜라오 데 플뤼에(Nicholas de Flue)
축일 3월 2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은수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417-1487년
같은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스위스의 옵발덴 칸톤 삭셀른 교외의 비옥한 평야에 위치한 플뤼얼리 태생인 성 니콜라우스 데 플뤼에(Nicolaus von Flue, 또는 니콜라오)는 도로테아 비스와 결혼하여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고, 5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1439년의 취리히 전쟁에서 주민들과 합세하여 싸웠고, 1453년의 전쟁에서는 대장으로 싸웠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공직자가 되는 것을 꺼렸다.

   1467년 그의 나이 50세에 때에, 그는 아내와 자녀들의 동의를 얻어서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고향 근교인 란프트 움막에서 9년 동안을 지냈다.
이때부터 그는 성덕과 지혜로 명성이 드높았고, 주민들과 지도자들의 고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481년의 스위스 연방을 확립할 때 프리부르와 솔레르의 합병에도 큰 공을 세웠고, 부르고뉴(Bourgogne)의 찰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데에도 한 몫을 하였다. 그는 스위스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수도자의 상을 정립하였고, ‘클라우스 수도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자신의 움막이 있던 란프트에서 서거하였고, 1947년에 시성되었다. 그는 스위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루피치노(3.21)
 
성인명 루피치노(Lupicinus)
축일 3월 2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원장
활동지역 콘다트(Condat)
활동연도 +480년
같은이름 루피치누스, 루피키노, 루피키누스

 

   성 로마누스(Romanus, 2월 28일)가 은수생활을 하기 위하여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지대에 위치한 쥐라(Jura) 산의 숲 속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35세였다.
그는 카시아누스(Cassianus)가 쓴 "사막 교부들의 생애"와 몇 가지 도구 그리고 종자들을 가지고 갔다. 그는 움막을 짓고 기도하면서 지냈고, 땅을 일구어 파종하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야수들과 사냥꾼들 때문에 이 첫 번째 은둔소는 파괴되었다.
이럴 즈음에 그의 형제인 성 루피키누스(또는 루피치노)가 합류하였다. 이 두 사람은 콘다트 수도원을 세웠고, 자매들을 위해서는 보므(Beaume) 수도원을 세워주었다. 이리하여 그들 주위에는 많은 제자들이 생겼으므로 성 로마누스가 원장으로 지도하게 되었다.

   그는 기도시간 외에는 주로 노동을 하여 생계를 꾸렸으며, 육식은 금했지만 계란은 허용하였다. 그리고 의복은 동물의 가죽으로 손수 지어 입었다.
성 로마누스는 오늘날의 생모리스(Saint-Maurice)를 순례했고, 테반 지역의 순교성지를 둘러보기도 하였다. 한 번은 그가 스위스 제네바(Geneva)에 갔을 때 그곳의 주교와 시민들이 그를 열렬히 환영하여 스스로도 놀랐다고 한다. 생을 마감한 성 로마누스는 보므 수도원에 묻혔고, 성 루피키누스는 그보다 20년을 더 살다가 선종하였다.
 
 
 
 
 
베네데타(3.21)
 
성인명 베네데타(Benedetta)
축일 3월 21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791–1858년
같은이름 베네데따, 캄비아지오, 프라시넬로

 

   성녀 베네데타 캄비아지오 프라시넬로(Benedetta Cambiagio Frasinello)는 1791년 10월 2일 이탈리아 제노바(Genova)의 란가스코(Langasco)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부모로부터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고 이는 그녀의 믿음에 깊숙이 뿌리를 박았다. 그녀의 가족은 그녀가 아직 어린 소녀였을 때 파비아(Pavia)에 정착했다. 성녀 베네데타는 20세 되던 해에 신비한 체험을 겪고 기도와 속죄의 삶을 살며 하느님을 위한 축성된 삶을 갈망하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그녀는 1816년 조반니 프라시넬로(Giovanni Frassinello)와 결혼하고 2년 동안 함께 지냈다. 1818년 남편 조반니는 부인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각자 '형제와 자매로서' 순결하게 지낼 것을 약속하고 대장암으로 투병 중인 성녀 베네데타의 여동생 마리아를 간호해 주기로 하였다.

   1825년 마리아가 세상을 떠난 후 조반니는 성 히에로니무스 에밀리아니(Hieronymus Aemiliani, 2월 8일)가 설립한 '소마스카(Somascha)의 성직 수도회'에 입회했고, 성녀 베네데타는 카프리올로(Capriolo)의 우르술라회에서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을 위해 봉헌하였다. 그녀는 일 년 후 건강상의 문제로 파비아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성 히에로니무스 에밀리아니에 의해 기적적으로 완전한 치유를 받았다. 건강을 회복한 그녀는 주교의 허락하에 어린 소녀들의 교육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성녀 베네데타는 도움이 필요했으나 그녀의 아버지는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파비아의 토시(Tosi) 주교는 조반니에게 소마스카의 성직 수도회를 나와 성녀 베네데타를 도와주도록 권고하였다. 둘은 서로에게 온전한 순결을 맹세하고 도시의 가난하고 소외된 소녀들의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생활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교육적인 활약은 파비아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성녀 베네데타는 여성 최초로 이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기에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녀를 '공교육의 장본인'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녀는 젊은 여성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생활 규칙을 만들어 교회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성녀 베네데타는 일반 교육과 더불어 교리교육을 실시하였고 요리와 바느질 같은 유용한 기술을 가르쳐서 학생들을 '그리스도인 삶의 모범'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였고 또 가족의 형성을 돕고자 하였다.

   이러한 성녀 베네데타의 업적은 당시에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유력한 인사들로부터 반대를 받았고 몇몇 성직자들의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1838년에 자신이 만든 조직을 파비아의 주교에게 넘기고 조반니를 포함한 5명의 동료들과 함께 제노바 지방의 론코 스크리비아(Ronco Scrivia)라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파비아에서 했던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여학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성녀 베네데타는 베네딕토 섭리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그녀는 소녀들에게 학업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곤 했고, 가난과 봉헌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수녀회는 그 규모를 점차 확대시켰고 성녀 베네데타는 죽을 때까지 수녀회의 발전을 이끌었다. 1858년 3월 21일 론코 스크리비아에서 생을 마감한 성녀 베네데타는 초자연적인 모성애의 모범이었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용기와 충성심을 보여준 좋은 본보기였다.

   오늘날 베네딕토 섭리 수녀회는 이탈리아, 에스파냐, 부룬디(Burundi), 코트디부아르(Cote d'Ivoire), 페루, 브라질에 퍼져 있다. 그들은 어리고, 가난하고, 병들고, 나약한 이들을 돌보고 있다. 설립자인 성녀 베네데타는 보게라(Voghera)에도 수녀원을 세웠는데, 그녀가 생을 마감하고 40년이 흐른 후 그곳의 주교는 그 수녀원을 나머지 수녀회와 분리하여 설립자를 공경하는 의미에서 하느님 섭리의 베네딕토 수녀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녀는 참된 아내이자 설립자였다. 성령께서 그녀를 이끌어 결혼 생활에서부터 교육과 종교적 정화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남편의 관대한 도움으로 그녀는 젊은 여성들을 위한 학교와 종교 단체를 세울 수 있었다. 성녀 베네데타는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사회'에서 가정을 만든다는 것과 여성들이 완전한 교육을 제공받아야 할 의무를 활성화시키고 젊은 여성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개척자로 여겨진다. 그녀는 1987년 5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5월 19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히폴리토 갈란티니(3.21)
 
성인명 히폴리토 갈란티니(Hippolytus Galantini)
축일 3월 21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565-1619년
같은이름 갈란티니, 히뽈리또, 히뽈리뚜스, 히폴리또, 히폴리뚜스, 히폴리투스
 
   히폴리투스 갈란티니(또는 히폴리토)는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의 부유한 비단장수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장사를 배워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열두 살 때에 메디치(Medici)의 주교이며 후일 교황 레오 11세(Leo XI)가 된 알렉산데르(Alexander) 대주교의 주목을 받게 되어 사제 수업을 받았으나 중병으로 인하여 그만두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식과 편태 그리고 밤새워 기도하면서 뛰어난 영적 식별력을 얻었고, 돈도 없고 책도 없이 재속회를 세우는데 성공하여 남녀 신자들에게 주요 교리와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가르쳤다.
그의 단체는 1602년에 회칙을 만들고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의 재속회는 ‘그리스도교 교리회’였으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름은 ‘반체토니’이다.

   그는 45세 때에 중병을 앓고 운명하였는데, 병중에 그는 천상 나라를 잠시 보았고, 자신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께 친구하니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듯하였다고 전해온다. 그는 1825년 교황 레오 1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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