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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는 어떻게 페르시아 제국을 물리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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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봉철 [skanenfl] 쪽지 캡슐

2009-03-21 ㅣ No.132114

  

  <그리스 전쟁>은 서구 역사의 원형을 주조한  세 건의 주요 전쟁,  곧 그리스-페르시아전쟁(기원전 490~479),  펠로폰네소스전쟁(기원전 431~404),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정복전쟁(기원전 336~323)을  살핀 저작이다.  모두 서양 고대사를 전공한  지은이  필립 드 수자,  벨데마르 헤켈,  로이드 루엘린존스는  3부로 이루어진  이 책을  각각 나누어  집필했다.  지은이들은  해당 전쟁의 기원과 전개와 결과를 꼼꼼히 기술하고 있으며,  특히 주요 전투의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세 전쟁의 서막을 연  그리스-페르시아전쟁은  그리스와 페르시아라는  두 대립적인 세계의 첫 충돌이자,  그리스인들이 자신을 발견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역량, 자신들의 정치체제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게 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스의 전쟁 상대는  발칸반도 북부에서부터 인더스강 유역까지 거의 5000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진  최대의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동맹은 자그마한 도시국가들의 연합이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보아 맞수가 되지 않는  그리스 동맹이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지도력을 앞세워  거인을 거꾸러뜨린 셈이다.

두 세계가 맞붙게 된  1차 원인은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팽창 욕심에 있었다.  기원전 491년  제국의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 주요 도시국가들에 사절을 보내  상징적 공물로서  ‘흙과 물’을 바치라는 뜻을 전했다.  여러 도시국가들이 이 요구를 받아들였으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대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 페르시아의 사절은  범죄자 처형 장소로 쓰이던 구덩이에서 살해당했다.  다리우스 1세는  600척의 전함을 포함한  2만5000명의 병력을 모아 진격시켰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만만하게 보았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아테네 장군들은  중장보병 9000명을 이끌고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군을 선제 공격해 진형을 무너뜨렸다.  페르시아는 6400명의 병력을 잃고 퇴각했다.  아테네의 병력 손실은 고작 192명이었다.

10년 뒤,  다리우스 1세의 왕위를 이어받은  크세르크세스가  발칸반도 전체를 삼켜버리겠다는 결심으로  군사를 일으켜 직접 진두에 섰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페르시아가  출병한 군대가  육군 병사만 2600만명에 이르렀다고 썼으나,  오늘날 학자들은 육군과 해군을 합쳐 3 5만명 전후일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 수만으로도  그리스 동맹 전체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당시 스파르타는 육군 중심이었다.  직사각형의 밀집대형(팔랑크스)을 이루어 진군하는 중장보병 전술의 달인이  스파르타인이었다.  스파르타와 달리  아테네는 해군 중심이었다.  170명의 노잡이와 30명의 전투원으로 이루어진  3단노선은 아테네 해군의 주력이었다.

페르시아 대군은 테르모필레에서 그리스 연합군 선봉대와 마주쳤다.  테르모필레의 중앙부는 바다와 절벽 사이 통로가 15미터에 불과해 소수 병력이 대규모 병력과 맞서 싸우기 좋은 길목이었다.  스파르타왕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정예부대 1400명은 페르시아 대군과 처절한 혈전을 벌였다.  크세르크세스의 주력부대 지휘관은 “두려워하는 페르시아군을 전투에 밀어넣으려고 채찍까지 사용할 정도”였다.  레오니다스는 현장에서 전사하고,  살아남은 스파르타군은 “칼은 물론이고 맨손으로 싸우는가 하면,  심지어는 이빨로 적을 물어뜯으며 페르시아군과 싸웠다.”  테르모필레 전투는 스파르타 정예부대의 장렬한 몰사로 끝났으나,  전면전은 살라미스 섬 해협에서 벌어졌다.  이번에 앞장선 것은 아테네 해군이었다.  700척이 넘는 페르시아 함선을 향해 그리스의 전함 300척이 공격했다.  좁은 바다에 풍랑까지 이는 곳에서 뱃머리를 황동으로 씌운 아테네의 3단노선은 어뢰처럼 페르시아 함선의 허리를 쳤다.  한나절을 꼬박 싸운 끝에 그리스 해군은 페르시아군을 패주시켰다.  크세르크세스는 본토로 돌아갔고, 전쟁은 이윽고 끝났다.  그리스인들은 이 전쟁을 “노예제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로 인식했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자부심을 한없이 키워주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시점부터 그리스는 거대한 내분 속으로 휘말려 들었다.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나뉘어 갈등하던 끝에 두 나라는 30년 전쟁(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렀고,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굴복시켰으나  긴 전쟁은 두 나라를 모두 쇠락의 길로 이끌었다.  그때 북부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일어나 발칸반도를 휩쓸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마침내 숙적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인도 북부에까지 힘을 떨쳤다.  그의 정복전쟁은 동서 교류의 물꼬를 튼 사건으로 기록됐다.

한겨레-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그리스 전쟁〉필립 드 수자·발데마르 헤켈·로이드 루엘린존스 지음·오태경 옮김/플래닛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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