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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운데서 구원 얻는 이들"(고전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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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웅 [unionasone] 쪽지 캡슐

2009-03-21 ㅣ No.132137

2009, 3, 18, 수요일

 

(D.P. 234) “그 자체로 또는 신의 섭리의 법칙을 떠난 허용의 법칙은 없고 둘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용하신다(맡기는 것, 꾹 참는 것, 양보하는 것)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뜻하시는 것)을 뜻하지 않고 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막을수 없는 것을 뜻 한다. 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되는 것은 신의 섭리의 법칙에 의하여 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신의 섭리는 늘 인간 의지에는 다른 각도에서 때로는 반대로 움직이며 늘 그 목적을 의식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목적하는데서 빗나가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역사하시는 매사에 또는 진행되는 모든 과정에서 그를 악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법칙따라 그를 인도하고 굽히고, 지시하는 것이다. 악을 허용하지 않고는 이 일을 할수 없는 것은 아래에 가서 알게 될것이다. 더욱이 무엇이든지 이유없이 허락할수 없고 그 이유는 신의 섭리의 어떠한 법칙안에서만 찾아볼수 있는 것이다. 이 법칙은 왜 허용하는가를 가르친다.“

 

 

 

죄(sin) : 기독교에서는 주님에 대한 인간의 죄로서 불순종으로 칭한다.

 

<구약의 용어> : [하타] 표적을 빗나가다. 실패하다, 이와 관련된 단어들로는 [아바르] 벗어나다 위반하다. [아온] 불법, 잘못, [파솨] 반역하다, 위반하다, [솨가그/솨가] 잘못을 범하다, 길에서 빗나가다,

 

<신약용어> : 하마르티아, [포네로스] 악한, [아디키아] 불의, 부정, [파라바시스] 위반, [아노미아] 무법,

 

 

정리하면 : “표적에서 빗나가다. 벗어나다. 위반하다”로 할수 있고 이를 불순종으로 정의할수 있고, 이를 불법과 불의와 죄로서 규정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표적은 무엇이고 빗나가고 벗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를 신령섭리(D.P. 234)에서 발견했다. “신의 섭리는 늘 인간 의지에는 다른 각도에서 때로는 반대로 움직이며 늘 그 목적을 의식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목적하는데서 빗나가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역사하시는 매사에 또는 진행되는 모든 과정에서 그를 악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법칙따라 그를 인도하고 굽히고, 지시하는 것이다.”

 

 

이것이다. 표적은 다름이 아니라 주님의 목적이다. 즉 주님이 뜻하시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이 벗어날 때 이를 죄라고 한다고 하고 불순종이라 하고 불법과 불의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목적/뜻/사랑/정신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이를 쉬이 찾을수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주님의 말씀이다.

 

 

(마태22:37-4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죄란 주님사랑과 이웃사랑으로부터 벗어나 자기사랑과 세상사랑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타애로부터 자기애로 가는 것 또는 바뀌는 주체는 무엇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당사자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의 생명이요 사랑인 의지가 그렇다는 것이 된다. 의지가 이타애의 불을 꺼 버리고 자기애의 불을 켜 담게 되면 이를 주님은 죄(하타/아바르)라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 언행의 <목적과 동기>이다. 그 목적과 동기가 의도적인가 아닌가 그렇게 이타적인가 이기적인가에 따라서 그 언행의 값이 평가된다. 주님께서는 마음을 감찰하신다. 특별히 중심을 감찰하신다. 중심은 그 사람의 의지 곧 사랑이다. 그 사랑이 어떠한가 그가 늘 뜻하고 생각하는 것(지배애)이 무엇인가 또 그가 어떤 의도로 말하고 행한 것인가 이를 주님은 보시고 아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모를수도 있고 부러 모른척 할수도 있고, 긴가 민가 헷갈려 할수도 있지만 주님은 명확히 이타적인지 이기적인지 아신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자신의 언행이 쓰레기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공든 탑이 되지 않으려면(도로아미타불) 자아애와 세간애의 불을 자기안에서 반드시 꺼 버려야 한다. 바벨탑과 같이 자신의 권력과 명예와 부를 위해서 쌓은 선과 진리와 그 지식들이라면 그것이 주님에게 속한 것이라 할지라도 목적과 동기에서 볼 때 악이니 그에게는 값이 되지 않는다는 것과 돌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림을 당하게 된다는 것(마태24:2)과 이를 남에게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출애굽할 때 이집트인들로부터 귀중품들을 가지고 나왔듯이 다른 이들이 자신의 것을 가로채간다는 것이다.(출12:35,36) 또 달란트를 땅에 묻은 자가 많은 이윤을 남긴자에게 그 한 달란트 마저 빼앗기게 되듯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마태25:28)

 

 

 

아래의 글(고전3:10-15, 금은보석나무풀짚비유)에서 바울사도는 불에 타서 남는 것이 없는 사람도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말하는듯 여겨지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한 사안이 아닌 것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늘 그래왔듯이 이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를 드러내는 가르침이다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라는 것이지요. 기독교에서는 입술만의 믿음을 말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바울사도가 말한 믿음과 주님이 말씀하신 기적의 믿음 또는 구원하는 믿음은 겉사람의 믿음이 아닌 <속사람의 믿음>을 말 합니다. 즉 “목적과 동기에서의 믿음”입니다.

 

 

경험적으로 살펴보면 주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는 마음으로 언행을 발하려 하지만 뜻대로 안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 의지가 여러 가지 이유로 지연이 되면 처음의 그 의도를 상실하게 되고 어느 순간 자신만을 위한 언행을 발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이 주어진 것 자체는 주님의 은총이나 그렇지 못한 가운데 스스로를 속이며 또는 스스로에 대하여 눈감고 선을 행하고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불가운데서 구원을 얻는 사람들이다>라는 것입니다.

 

 

단지 <입술만으로>, “죽기전에 회개합니다.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그런 믿음을 바울사도나 주님은 말한바가 없습니다. 그런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고 구원을 획득하게 할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죽음이 두려워서 병의 고통이 괴로워서 또는 감옥에서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서 하는 신앙고백은 참된 믿음 즉 속사람에서 우러나온 믿음이 아니라 겉사람에서 튕겨나온 믿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믿음에도 계도가 있고 차별이 있다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주님과 이웃을 의도하였는데, 겉사람의 정욕과 탐욕 때문에 또는 주위의 시선이나 방해와 미혹 때문에 길을 잃고 자기만을 위해 살게되는 그런 일이 사실은 신앙인들 사이에 비일비재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대한 성찰의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흔히 “내 죄를 사해 주옵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더럽고 가증스러운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주님 앞에 지렁이만도 못한 죄인 입니다”라고 회개의 기도를 하는데, 단지 그것 뿐입니다. 죄인이라는 말 뿐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왜 내가 죄인인가(잘못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짚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깊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깊은 성찰은 단순히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것 타인에게 친절하지 않은 것과 같이 외적인 것, 드러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짚어보고 살펴보라는 것은 언행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사랑 그렇게 목적과 의도 그리고 동기 입니다. 이를 분석해야 합니다. 이를 살펴서 내가 죄인입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회개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지를 검토하지 않고 단순히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으로부터는 주님의 은혜가 있을지는 몰라도 회개로 인한 성품의 성화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발전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잠시동안 이기적이지 않게 이타적으로 행동할수 있을지 모르나, 무지하기 때문에, 보는 눈이 까막눈이어서 또 다시 과거의 올무와 함정에 걸리고 빠지는 일을 반복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다람쥐가 채바퀴를 도는 것과 같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비슷한 같은 자리를 멤도는 그런 형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고전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 3: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고전 3: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고전 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 3: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영적으로 살펴보면 금과 은과 보석은 천적 선과 영적 선과 자연적 선으로서 말할수 있을 것입니다. 보석이 동이 아니어서 대응이 완전치 않지만, 또 나무와 풀과 짚도 상응지식으로 볼 때 부적절하지만 바울사도가 말한 주제안에서는 불에 타도 끄떡 없는 것은 금은보석이고 불에 타서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은 나무와 풀과 짚이니 후자는 이기적인 의도와 목적으로 행한 공적이 되고, 전자는 이타적인 의도와 목적으로 행한 공적이 됩니다. 즉 전자는 속사람의 선을 뜻하고, 후자는 속사람의 악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후자는 겉으로 전자와 동일하게 선을 행하였으나, 이는 사람이 볼 때 동일한 것이고, 주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를 분별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금은보석은 천계의 선을 나무와 풀과 짚은 지옥의 악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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