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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삶, 사랑, 한국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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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봉철 [skanenfl] 쪽지 캡슐

2009-03-11 ㅣ No.131878

세상읽기
 
현실에서 우리 삶은 단 한 번이라는 삶의 숙명적 일회성과 유한성을 상념할 때, 자신의 삶을 통해 사회와 후대에 바르고 선한 영향을 남긴다는 것은 참으로 가치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삶은 의미 있는 일을 하기엔 너무 짧고, 무가치하게 살기엔 너무 힘들고 길기 때문이다. 하여 가장 소중하고 감사한 사실은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점이며, 그 점에서 자기 생명에 대한 사랑처럼 값진 것도 없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고통조차 사실은 그것을 넘은 뒤의 기쁨을 위한 훈련인 동시에 미래를 준비하게 하는 축복인지 모른다. 그것을 깨달을 때 궁극적 자기 사랑이 시작되며, 자기보다 더한 고통에 놓인 타인들에 대한 사랑이 싹트게 된다. 우린 그때 비로소 자기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 내면에서 만나는 동시에 타인을 향해 선한 영향을 발하는 감동과 기쁨을 맛보게 된다.

많은 삶들이 어려운 때에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추모의 열기는, 우리에게 바른 삶과 선한 영향, 사랑과 기쁨으로서의 삶에 대한 성찰의 계기로 다가왔다. 김 추기경이 내면의 자기완성과 구원만을 희원한 종교인이었다면, 또 사회변혁만을 추구한 개혁운동가였다면 이러한 전사회적, 초종교적 추모의 염은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분에겐 내면의 자기완성 노력과, 타인·사회 사랑 및 구원의 가치가 거의 통합되어 있었지 않았나, 또 그 통합이 우리에게 깊은 존경의 마음을 쏟게 하지 않았나 싶다. 그악한 우리 사회에 그분이 남긴 정신적 사회적 핵심 청량은 이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분의 선종에는 우리가 말하지 않아온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 그것은 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관계를 말한다. 추기경의 나눔과 분배에 대해서는 칭송과 찬양 일변의 태도를 보인 정부, 주요 정당·언론들은 체제와 사회 차원의 나눔과 분배 정책에 대해선 좌파적·급진적이라며 극구 반대한다는 점이다. 이 말은 추기경 칭송 논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외려 그 반대이다. 개인윤리는 너무 소중하다. 그러나 그것을 강조하는 동안 사회문제가 은폐·왜곡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사회윤리와 정책이 배척되어서도 안 된다.

20세기 최대의 신학자 라인홀트 니부어가 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관계를 통찰했을 때 우리에게 던진 함의는 이것이었다. 나눔의 ‘개인’ 삶은 칭송하나, ‘전체’ 분배 정책과 논리는 반대하는 이중 도덕과 이중 정의를 계속할 경우 사회 차원에서는 종종 도덕과 정의의 충돌을 통한 급진주의와 폭력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그때 도덕은 진정한 도덕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개인도덕 담론은, 부도덕하지 않을 때에도 종종 도덕적이지 않다. 하나는 개인도덕을 강조하여 사회적 (도)덕, 전체 도덕을 은폐하고 차단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도덕의 이름으로 도덕적 사회 수단과 절차(예; 민주적 합의를 통한 나눔 정책)를 공격하는 경우이다.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개인윤리가 부분적 단편적 국부적이라면 사회윤리는 전체적 제도적 점진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마틴 루서 킹이 말한, “우리가 지금 당장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언명은, 이런 사회윤리적 의미 연관을 갖는다. 이토록 많은 신문·방송(인)에도 소통이 어렵고, 이토록 많은 학교·교사에도 참교육이 어렵고, 이토록 많은 교회·사찰·성당·신도에도 평안하지 않은 이유는, 필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괴리와 충돌 때문이 아닌가. 추기경이 보여주신 소중한 내외 통합을, 개인윤리를 넘어 사회적 대화를 통해, 사회윤리로 승화해야 할 소이는 여기에 있다. 

한겨레-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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