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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8] '성하(聖下) 성부(聖父)라는 경칭의 참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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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훈 [saint72] 쪽지 캡슐

1999-08-29 ㅣ No.369

 

[8] ’성하(聖下) 성부(聖父)라는 경칭의 참뜻

 

■ ’성하(聖下) 성부(聖父)’라는 경칭의 참뜻

 

교황에 대해서는 특별한 호칭들이 많은 데 그 호칭중에서는 오해될 위험성이

있는 경칭들이 없지 않다. 특히 교황을 ’성하(聖下)’ 또는 ’성부(聖父)’(거룩한

아버지)로 부르는 것 같은 경칭들이 그러하다. 그래서 인지 몇 년 전 가톨릭

신학자들로 구성된 한 국제위원회에서 ’성하’와 같은 경칭을 쓰지 말도록 건의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경칭 때문에 오해가 생길 위험이 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성하’나 ’성부’같은 경칭에 포함된 ’거룩함’ 또는 ’성성’은

사람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직책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거룩한

교황이 없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270명 가량의 교황들 가운데에는 78명의 성인 교황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이중 대부분 즉 73명은 아직 시성식이 제 궤도에 오르지

않았을 때인 초기에 속하는 교황들이라는 점이다. 2천년 동안 5명의 교황만이

까다로운 시성절차를 통해 성인이 되었다. 그중 마지막으로 1954년에 성인품에

오른 분이 비오 10세(1903-1914)이다. ’성하’나 ’성부’를 어떻게 알아 들었고,

또 알아들어야 할 것인가? 성 그레고리오 7세(1073-1085) 교황은 모든 교황이

그의 공적인 교황직을 이해함으로써 개인적으로도 거룩함을 주장했다.

 

즉 교황직은 그 소유자를 거룩하게 만들었고 사실 교황들도 그렇게 느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왕직은 착한 사람까지도 나쁘게 만든 예가 많다. 중세기의

교회학자들은 교황직이 교황을 거룩하게 만든다는 이론을 지지했다. 어떤 이는

교황직 자체가 성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해석했고, 어떤 이는 교황직이 사도

베드로의 공적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비록 개인적으로 성성이 없고

심지어 윤리적 결함까지 있을지라도 베드로의 공적으로 대신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개인적으로 천사와 같은 성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이가 바라 마지 않는 이상적인 교황상이었다. 다시 말해서 교황은 직책을

통해서 만이 아니라 생활을 통해서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이의 한결같은

바람이었다.

 

이와 같이 환상적인 이상이 뜻밖에 1294년에 실현되었다. 1292년 니콜라오 4세

교황의 사망후 2년간이나 마땅한 교황 후보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속세를 떠나 은신처에서 거룩한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한 은수자를 교황 성좌에 앉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첼레스티노(천상적이란

뜻) 5세로 명명했다. 이 은수자 교황은 세속 사정에 어두웠을 뿐 아니라

측근자들에게 너무나 교양 없는 인물로 나타났다.

 

그는 라틴어를 몰라 이탈리아 말로 교회행정을 처리해야 했고, 자신의 무능으로

인해 오늘은 이 추기경, 내일은 저 추기경에게 교회의 주요한 일을 결정짓게

해야 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한 악의적인 동시대인은 이렇게 말했다. "교황은 그의

권위에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천진난만함(즉 우직함)으로 통치하고

있다."

 

그러니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 강생한

’천사교황’으로 모셔질 수는 없었을지라도, 그러나 5개월 만에 교황직을

물러나야 했고, 그래서 그는 교회사상 교황직을 사직한 유일한 교황이 되었다.

 

그는 그후 감방에 갇혀 감시를 받으며 살다가 1년 반만에 사망했다. 이로써

천사적인 성인교황에 대한 꿈은 깨지고 말았다.

 

첼레스티노 5세의 뒤를 이어 교황위에 오른 분이 보니파시오

8세(1294-1303)이다. 그는 불행히도 그의 선임 교황의 사적과 같이 관련되어

있다.

 

첼레스티노 5세는 그의 무능함을 깨달았을 때 철학자인 베네데토 가에타니

추기경(보니파시오 8세)에게 교황이 교황직을 사임할 수 있는 가를 물었다고

한다.

 

가에타니 추기경은 교황에게 그 가능성을 제시했고, 그래서 첼레스티노 교황은

안심하고 교황직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보니파시오 8세는 무엇보다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에게서 나타난 세계지배를 다시 한 번 과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시대가 변한 것을 깨닫지 못했다. 당시 근대국가의 대두와

더불어 나타나기 시작한 국민적 감정과 그러한 징후의 세속주의는 교황의

세계지배를 용납하지 않았고 그래서 교황직의 가장 강력한 적이 되었다.

 

보니파시오 8세는 신정정치를 통해 서구의 국제국가를 세워보려고 꿈꾸었다.

그러나 그는 그간 왕직과의 정치적 투쟁에서 교황직의 위신이 크게 손상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세계지배를 지향하던 프랑스의 필립(별명 미왕<美王>)을 상대로 정치적

우위를 관철하려 했고, 그것을 위해 그의 유명한 칙서 <우남 상크탐(Unam

Sanctam)>을 통해 양검론을 끌어댔다. 그가 양검론에 의거하여 영권과 속권을

결국 다 교회에 맡겨진 것이라고 주장하여, 교황에 대한 순종은 구원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선언했을 때 왕권과의 대결이 불가피해졌다. 교황은

필립을 파문하였고, 필립은 1303년 9월 그의 군대로 하여금 교황을 그의

탄생지인 ’아냐니’에서 체포하게 하였다. 사흘만에 교황은 ’아냐니’ 시민들의

덕택으로 풀려났고 또 로마로 돌아올 수는 있었으나, 그는 이미 재기불능이었고

사실 폐인이나 다름 없었다.

 

이때부터 교황직의 세계지배는 붕괴하기 시작하였고, 1870년 9월 20일 교황령의

최후 보루인 로마가 점령됨으로써 그 최후의 막이 내려지게 되었다.

 

보니파시오 8세는 1300년을 성년으로 정하고, 성년 전대사를 선포하였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구약에서 얻어냈다. 이 성년은 당시 사람 들에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200만의 순례자가 로마로 몰려들었고, 성베드로와

성바울로 두 대성전의 성직자들은 순례자들의 헌금을 갈퀴로 긁어모아야 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1300년은 교회사상 최초의 성년이었다. 그후 성년은 50년, 33년, 25년으로 그

기간이 점차 단축되었다. 1983의 성년은 33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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