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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중의 ‘으뜸’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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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성 [jslee9742] 쪽지 캡슐

2008-07-05 ㅣ No.447

글 /강판권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 사람들이 소나무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나무가 늘 푸르면서도 오래 살기 때문이다. 십장생(十長生) 중에 소나무가 들어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십장생 중 실존하는 식물은 소나무뿐이다. 중국 고대 주(周)나라에서는 무덤에 나무를 심어 신분을 표시했다. 그 중 소나무는 황제의 무덤에 심었다.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에 왕의 무덤, 즉 왕릉에 꼭 소나무가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미인송 군락지. 미인의 다리처럼 가늘고 길게 쭉쭉 뻗은 금강소나무

한국 유일한 나무설화

절실한 염원은 때론 설화를 낳는다. 그래서 설화는 인간에게 꿈을 준다. 인간에게 꿈은 삶의 에너지다. 인간은 스스로 삶의 에너지를 얻지 못하면 죽는다.
소나무는 우리나라 나무 중 유일하게 설화를 가진 나무다. 그래서 소나무는 한국 사람들의 꿈이 담겨 있다.

성주대신아 지신오/성주 고향이 어디 메냐/경상도 안동 땅에/제비원에 솔 씨 받아/소평 대평 던져 떠니/그 솔 씨가 자라나서/밤이 되면 이실 맞고/낮이 되면 태양 맞아/그 솔 씨가 자라나서/소보동이 되었구나/소보동이 자라나서/대보동이 되었구나/그 재목을/왕장목이 되었구나/그 재목을 내루갈 제/서른서이 역군들아/옥똑끼를 울러 미고/서산에 오라 서목 메고/대산에 올라 대목 메고/이 집 돌 안에 재여 놓고/일자대목 다 모아서/굽은 놈은 등을 치고/곧은 놈은 사모 맞차/하개 서개 터를 닦아/초가삼간 집을 짓고/사모에 핑걸 달고/동남풍이 디리 불며/핑겅 소리 요란하다/아따 그 집 잘 지었다/그것 모도 거기 두고/시간 살이/논 도만 석 밭도 만석/해마다 춘추로 부라 주자/묵고 씨고 남는 것은/없는 사람 객을 주자.

소나무의 설화를 낳은 곳은 경상북도 안동시 제비원이다. 소나무 설화에는 이곳 사람들의 소나무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 있다. 소나무로 집을 짓고, 소나무로 땔감하고, 소나무로 관을 만드는 등 삶 자체가 소나무와 같이 했기 때문이다.
소나무의 이름에서도 우리 민족의 소나무에 대한 ‘존경’을 엿볼 수 있다. 소나무의 줄임은 ‘솔’이다. 솔의 뜻은 ‘으뜸’이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무 중에서 소나무를 으뜸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울진 소광리 금강송.수령이 1982년 조사로 약 500년 정도 되었다고 함.

진시황제가 만든 소나무 한자

소나무를 의미하는 한자는 송(松)이다. 한자 송은 목(木)과 공(公)을 합한 형성 글자다. 이 글자를 만든 왕조는 중국 진(秦)나라다. 특히 중국의 진시황제는 소나무를 아주 좋아했다. 중국 최초의 황제인 그가 소나무를 좋아한 것은 소나무에게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기(史記)』 『시황제본기(始皇帝本紀)』 『봉선서(封禪書)』에 따르면, 그는 산동(山東)의 태산(泰山)에 올랐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갑자기 내린 비라 피할 곳이 마땅하지 않았던 터에 인근의 나무 아래 들어가 비를 피했다. 소나기가 그치자 진시황제는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그 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벼슬을 내렸다. 진시황제가 벼슬을 내린 그 나무가 바로 소나무다. 지금도 태산 등산로 중턱에는 그다지 크지 않은 소나무 옆에 이런 얘기를 담은 표지판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유사한 얘기를 담고 있는 소나무가 있다. 바로 속리산의 정이품송(正二品松)이다. 어느 날 조선조 세조가 수레를 타고 이곳을 지나는데 땅에 닿아 있던 소나무 가지가 저절로 올라갔다. 이에 세조가 고마운 나머지 이 나무에게 벼슬을 내렸다. 이런 얘기는 사실 여부를 떠나 인간이 소나무에 바친 최고의 찬사다.
진시황제의 소나무 사랑은 진나라의 수도 함양의 가로수가 소나무였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나무를 가로수로 심은 것은 늘 푸른 소나무의 기상과 자신의 모습을 견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중국 고대의 가로수 수종 선택에는 식용가치가 주요한 잣대였다. 진시황제도 함양에 소나무 가로수를 심어 그곳 백성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진시황제는 소나무를 사랑한 황제였지만 대규모 토목공사에 엄청난 소나무를 남벌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마천의 『사기』에 진나라 시대 산에 나무가 없다는 기록만으로도 토목공사에 사용한 나무가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그는 병마용 건설에도 엄청난 소나무를 사용했다.


울진 소광리의 황장봉계표석 안내판

조선시대의 엄격한 소나무 보호정책과 소나무의 다양한 이름

조선시대도 소나무를 무척 사랑한 시대였지만, 어떤 지역은 왕실에서 소나무를 독점했다. 어떤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독점은 언제나 후유증이 있는 법이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필요한 소나무를 확보하기 위해 좋은 소나무가 자라는 곳의 소나무를 엄격하게 관리했다. 아직도 그런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울진 소광리다. 이곳의 소나무를 흔히 금강송(金剛松)이라 부른다. 이는 소나무가 금강석처럼 단단해서 붙인 이름이다. 특히 이곳의 소나무는 곧게 자라는 게 특징이다. 실제 이곳을 가보면 여느 소나무와는 다른 기상을 느낄 수 있다. 현재도 이곳 소나무는 특별히 관리하고 있다. 소나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조선시대는 오죽했을까. 그래서 조선시대는 이 지역을 봉금(封禁)지역으로 선포한 후 소나무를 엄격하게 관리했다.

소광리 입구에 그런 표지석이 남아 있다. 이곳 소나무의 역사적 가치를 보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 흔적을 확인한 후 들어가야 한다. 위대한 존재는 언제나 이름이 많은 법이다. 소나무의 이름이 많은 것도 이 나무가 위대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른 이름은 ‘춘양목(春陽木)’이다. 춘양목은 경상북도 춘양에서 빌린 이름이다. 이는 이곳과 가까운 울진이나 봉화 등지에서 생산한 소나무를 철도가 있는 춘양에서 모아 다른 곳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적송(赤松)’은 소나무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적송을 일본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알고 있지만, 중국에서도 불렀다.

우리나라 소나무는 육지에서 자라서 육송(陸松), 잘 빠진 여자의 몸매와 닮아 여송(女松) 혹은 미인송(美人松)이라고도 부른다. 미인송은 백두산 입구에서 볼 수 있다. 소나무를 구분하는 방법 중 하나는 껍질 외에 잎이다. 한국의 소나무는 한 묶음의 잎이 두 개다.

소나무의 이름에는 물질적인 특징 외에 사람들의 느낌에 따라 붙여진 것도 있다. 예컨대 정목(貞木)·출중목(出衆木)·백장목(百長木)·군자목(君子木) 등으로도 불린다. 정목은 곧다는 뜻이고, 출중목은 다른 나무보다 뛰어나다는 뜻이고, 백장목은 모든 나무의 우두머리라는 뜻이고, 군자목은 군자의 기상에 빗댄 이름이다. 소나무를 ‘초목의 군자’, ‘군자의 절개’, ‘송죽 같은 절개’, ‘송백의 절개’ 등으로 표현한 것도 같은 이치다. 더욱이 설만궁학(雪滿窮壑)의 독립고송(獨立孤松), 즉 눈 가득한 아주 험한 골짜기에 외롭게 서 있는 소나무는 지절(志節)의 상징으로 시의 소재에 자주 등장한다. 고려시대 보우국사(普雨國師)의 게송(偈頌) 「증대송(贈對松)」과 퇴계 이황의 시 「설야송뢰(雪夜松 )」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이 소나무를 좋아한 이유 중 하나는 이 나무가 늘 푸르면서도 오래 살기 때문이다. 십장생(十長生) 중에 소나무가 들어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십장생 중 실존하는 식물은 소나무뿐이다. 이런 특징 때문인지 소나무는 황제를 상징하는 나무로 ‘간택’되었다. 중국 고대 주(周)나라에서는 무덤에 나무를 심어 신분을 표시했다. 그 중 소나무는 황제의 무덤에 심었다.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에 왕의 무덤, 즉 왕릉에 꼭 소나무가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황장봉계표석의 경계

소나무의 지명과 소나무로 만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배

우리나라 사람들의 소나무 사랑은 지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 지명 중 소나무와 관련한 게 아주 많다. 그 중에서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따르면 북한의 개성을 일컫는 송악(松岳)도 이 지역을 소나무로 사방을 둘러서 붙인 이름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4대조인 강충(康忠)이 오관산(五冠山) 밑에 살다가 풍수가의 말을 듣고 부소산(扶蘇山) 남쪽으로 군읍을 옮겼다. 드디어 봉우리가 보이지 않자 소나무를 사방으로 둘러 심고 송악이라 했다. 우리나라 소나무의 위력은 2005년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에서 발굴한 신석기 시대의 통나무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카누처럼 생긴 통나무배가 바로 200살 정도 먹은 소나무로 만든 것이다. 배는 현재 남아 있는 실물 기준으로 최대 길이 3m 10㎝, 최대 폭 60㎝, 깊이 약 20㎝, 두께 2.0~5.0㎝ 크기이다. 이 배가 중요한 것은 현재까지 한국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이전 선박 실물로는 경주 안압지 출토 통일신라시대 배(8세기), 완도선과 십이동파도선(11세기), 안좌도선(13~14세기) 등이 모두 역사시대에 속한 반면 선사시대의 배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비봉리의 배는 약 8,000년 전의 배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배로 알려진 도리하마(鳥浜) 1호나 이키리키(伊木力) 유적 출토품보다 무려 2,0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현재 이 배는 보존처리 중이다. 실물을 직접 볼 날을 기다리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소나무는 한국인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를 조사하면 단연 1위가 소나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소나무의 원산지를 당연히 한국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무도감의 학명에는 원산지를 알려주는 정보가 없다. 오히려 서양에서는 일본을 원산지로 알고 있다. 왜 서양 사람들은 소나무를 일본 원산지로 알고 있을까? 제국주의 시대 서양인들은 동양에 대한 식물정보를 대부분 일본을 통해 얻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에 존재하는 나무는 일차적으로 나무도감에 원산지로 등장할 기회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많았다. 한 그루의 나무 이름에도 제국주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위대한 소나무와의 만남

현재 소나무 중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게 적지 않다. 그 중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의 소나무(천연기념물 제289호)는 소나무 애호가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으뜸으로 꼽는다. 나 역시 천연기념물 소나무 중 이곳 소나무를 가장 많이 보았다. 내가 천연기념물 소나무 중 이곳 소나무를 가장 많이 찾은 것은 다른 나무보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힘든 시절에 만났기 때문이다. 이곳의 소나무는 아주 깊은 골짜기에 살기 때문에 쉽게 만날 수 없는 나무다.

그러나 나는 천연기념물 소나무를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늘 이곳 소나무를 안내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할머니소나무’로 생각하고 있다. 마을 북쪽 산기슭에는 ‘할아버지소나무’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할머니소나무는 물론 할아버지소나무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나도 이곳을 찾을 때마다 음료수를 사가지고 나무 앞에 두고 큰 절을 올린다. 내가 이곳 소나무에게 절을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이 나무를 보는 순간 ‘경배’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신령스럽기 때문이다. 용 비늘 같은 소나무의 껍질과 기상은 나를 압도한다. 그래서 만나면 기가 죽어 절을 올릴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이 소나무를 지켜주는 마을 분들이 정말 고맙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천연기념물 소나무 중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소나무(천연기념물 제290호), 일명 ‘왕소나무’도 아주 기억에 남는다. 이 소나무는 겉에서 보면 다른 소나무와 다를 바 없지만, 속을 보면 온통 붉어서 그 강렬함을 감당하기 어렵다. 더욱이 뻗은 가지의 기상도 아주 남다르다. 이곳 왕소나무와 비슷한 느낌을 경상남도 의령군 점곡면의 ‘성황리 소나무’(천연기념물 제359호)에서도 맛볼 수 있다.


울진 소광리의 미인송

재선충과 소나무의 미래

소나무는 직근성이다. 뿌리가 곧장 땅으로 내려가고 잔뿌리가 없는 게 특징이다. 그래서 이런 나무는 옮겨 심으면 살기가 어렵다. 그런데 인근 산에 가면 뿌리가 땅 밖으로 나와 있는 소나무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런 소나무를 볼 때마다 무척 안쓰럽다. 자신의 뿌리를 드러내고 살아가는 심정을 생각하면, 내가 속을 다 드러내고 살아가는 것처럼 낯이 뜨겁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서도 매번 산에 오를 때마다 밟지 않고 지나갈 수 없다.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만 다른 곳으로 가면 다시 길을 만들어 나무를 해치기에 어쩔 수 없이 두 눈 감고 그냥 지나간다. 정말 이 순간 환장할 노릇이다.

나는 산에 오를 때마다 재선충(材線蟲)으로 죽은 ‘소나무 무덤’을 만난다. 많은 사람들이 재선충을 걱정한다. 이 땅에 소나무가 사라지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한국인의 정서에 엄청난 충격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선충은 기후 변화와 더불어 한 종류의 나무가 산을 독점하면서 생긴 현상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도 소나무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소나무에 대한 짐을 내려놓을 시점이다. 그러면 한결 마음이 편하다. 그러면 한결 대안책 찾기가 쉽다. 학창시절 늘 일등 하던 학생이 엄청난 중압감으로 살아가듯, 소나무에 대한 ‘으뜸’ 칭호도 소나무에겐 엄청 부담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소나무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 소나무의 수난을 낳고 있다. 너나없이 소나무를 조경수로 선호하면서 곳곳의 잘 생긴 소나무들이 불법으로 채취되고 있다. 소나무에 대한 비뚤어진 사랑이 소나무 값을 폭등시키고 있다. 소나무에 대한 과욕이 몇 백 년 동안 산에서 살고 있던 소나무를 도심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있다.

산도 때론 외롭다. 산이 외로우면 나무도 때론 외롭다. 나무가 외로우면 소나무도 때론 외롭다. 외로운 소나무에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평범하게 한 생명체로 바라만 보는 게 최상이다.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친구처럼 대하는 게 최상이다. 사람의 값이 모두 같은 것처럼 나무의 값도 모두 같다. 이 땅의 생명체의 값이 같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의 값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그날, 인류가 가장 행복한 날이다.

출 처 : 산림조합중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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