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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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관일기73 / 김강정 시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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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탁 [daegun011] 쪽지 캡슐

2001-06-20 ㅣ No.3858

 

사제관 일기 73  

 

머리손질을 좀 했습니다.

어느덧 두어 달을 훨씬 넘기고 보니, 여기저기서 성화가 대단합니다.

사실, 제가 봐도 거울에 비친 모습이 오랑캐 같아서 눈에 자꾸 거슬립니다.

생긴 대로 살다보니 꾸미고 가꾸는 건 질색이어서 오늘까지 이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머리손질도 미루다 결국 붙들려 미용실로 끌려가기 일쑤였습니다

......

큰 맘을 먹고 터벅한 머리를 깎으니, 한결 인물이 난다며 벌써부터 야단입니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아니듯이, 이 인물에 빛이 나본들 빤한 꼬라지입니다

하지만, 뻔한 소리라도, 들어 기분은 나쁘지 않습니다.

..........

신부가 얼굴로 사는 건 아니니, 있을 것만 제 자리에 박혀있어도 넉넉하지만,

이왕지사 같은 얼굴이면 번듯하단 소리도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한 인물한다는 소리를 못 들어봤습니다.

때문에, 유난히 젊은 자매들이 많이 붙는 사제를 보면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용모는 물론, 사람을 끄는 매력과 호감만 봐도 존경스럽습니다.  

적어도 할머니들만 많이 붙는 저보다는 훨씬 나을거라 여겼으니 말입니다.

...........

오늘, 멀리 한국에서 할머니 한 분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스스로를 ’신부님의 팬’ 이라 소개하는 할머니......

백번을 들어도 언제나 한결 같은 끝 인사, "신부님, 옥체보존하소서."......

그 한마디로 그리움을 대신하는 할머니의 음성을 들으면서,

참 많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비록 젊고 싱싱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니어도,

바로 그 목소리가 오늘의 제 자리를 지켜주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저를 붙들고 계셨기에, 군마음 없이 제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을,

저는 그 귀한 보물들을 짐스럽게만 여겨온 것입니다.

.........

누가 그랬지요...뒤돌아보면 그 모두가 은총이었노라고....

은총이었습니다.

제 삶도 분명히 은총이었습니다.

한 인물한다는 소리를 못 듣고 산 것도 은총이요,

처자들의 눈길 한번 못 받아본 것도 눈물나게 고마운 은총입니다.

그 은총이 아니었다면, 오늘 이 자리까지 사제로서 버텨오지 못했을 겁니다.

..........

은총 아니다 여긴 것마저 은총으로 여겨지니,

앞으로는 얼굴로 불평을 삼는 일이 더는 없어야겠습니다.

비록 주어진 바탕은 변변찮아도, 이 바탕대로 열심히 살면서,

얼굴보다는 마음을 가꾸는 일에 더 많이 힘쓰겠습니다.

그래서,

꼴값도 못하는 신부라는 소리보단,

그나마 꼴값은 하고 산다는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제 얼굴을 지금보다 더 많이 감사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괌, 한인성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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