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사제관일기74 / 김강정 시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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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탁 [daegun011] 쪽지 캡슐

2001-06-20 ㅣ No.3861

 

   사제관 일기 74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 뿐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의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오>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고,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우리가 각자 <그 한 사람> 을 갖게 될 때, 우리 모두는 만인을 갖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 자신이 이웃의 <그 한 사람> 이 되어줄 때,

우리 모두는 만인의 < 그 한 사람> 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봄볕에 얼음이 풀리듯 우리의 얼었던 마음도

훈훈한 사랑 안으로 녹아들 것이다..........

 

 

      - 함석헌  <진정한 인간관계가 그리운 날> 에서 -

..........................................................................

 

시 한 편이 꼭 지금의 제 마음 같아 조용히 옮겨 놓습니다.

제가 힘들고 지칠 때,

어둡고 험한 길을 갈 때,

아무도 없다고 여겨질 때,

바로 그때 <그 한 사람> 이 제 곁을 말없이 지켜주면 좋겠습니다.

어깨를 빌려와 그의 품에 울 수 있는 < 그 한 사람> 이면 더 좋겠습니다.

외로운 반대의 길에서 오로지 <그 한 사람> 의 박수소리로 힘을 얻고,

<그 한 사람> 의 응원만 얻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에게는 <그 한 사람> 이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습니다.

남의 아픔은 보듬어줘도 제 아픔은 보듬어달라 못 하고,

남의 눈물은 닦아주면서도 제 눈물은 남에게 보일 수 없는,

저는 사제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처연한 길이고, 얼마나 외로운 길이지,

당신만이 아실 일이라며, 그분께만 눈물지어온 나날들......

그 세월을 당신만은 꼭 알아주셔야 합니다.....

 

때론 그랬습니다.....

휘어치는 매가 너무 아파서 비겁한 길을 가고도 싶었고,

반대의 표적보다는 인기에 영합하는 타협의 길을 더 찾아나서고 싶었습니다.

알아주지도 않는 이 값없는 노력이 싫어, 이름 있는 길을 걷고도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제 길이 아니라 하시기에, 저는 당신의 길만을 따라왔습니다.

아들 이사악을 바쳐라 하셨듯,

제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라 시며, 손에 칼자루를 쥐어주시던 분.

그 단념의 칼자루를 잡고 한없이 울어버린 그 긴긴 밤을 당신만은 아십니다.

그리고, 눈물을 삼키며, 비우고 지워나갔습니다.

버려라 하셨기에 버렸고, 끊어라 하셨기에 끊었습니다.

그렇지만, 너무나 많이 아팠습니다.

당신께서 가라 이르신 길에는 온통 아픔과 상처뿐이었습니다.

당신은 영광의 상처라 하셨지만, 영광을 보기에는 상처가 너무나 깊었습니다.

 

그래서 달아나려고 했습니다.

당신이 다다를 수 없는 거리로 끝없이 달아나고만 싶었습니다.

 

그래도 ’따라오라’ 시며 끝내 손을 붙드는 당신........

당신께 붙들려 다시금 주저앉을 때마다 저의 상처는 자꾸만 늘어갑니다.

만신창이 되도록 비참의 굴레를 씌우셨고,

마지막 한장의 옷까지 마저 벗기셨는데도,

그런데도 당신은 저를 놓아주지 않으십니다.

다 가지시고도 더 달라 떼를 쓰시는 당신은 욕심쟁이 하느님이십니다.

남은 하나 그 마저도 마저 앗고야 마는 당신은 정녕 비정한 어른이십니다.

 

차마 더는 가고 싶지 않은 길.......

아니, 죽어 두 번은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길.......

주여, 이것이 눈물 흘리며 드리는, 이 못난 사제의 죄스런 고백입니다......

..........

그렇지만,

끝내 가라 이르시면, 마지막까지 이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더 힘들 거라고, 더 외로울 거라고 하시면,

고통의 마지막과 외로움의 끝만을 생각하면서 걸어가겠습니다.

사람에 대한 실망으로 더 많이 외로운 날도  

억울한 사연과 눈물지는 아픔으로 더 많이 힘든 날도

모두모두 당신이 걸어가신 길이라 여기며 흔연히 따라가겠습니다.

.......

오늘따라, 유난히 <그 한 사람> 이 많이도 그리워집니다.

아무도 없다 여겨지는 이 외로움의 끄트머리서

이름없는 얼굴의 <그 한 사람> 이 무척이나 보고싶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러분>이 제 길에서 만나는 꼭 <그 한 사람> 이면 좋겠습니다.

온 세상 다 저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뿐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한 사람>,

그가 바로 <당신> 이시면 정말 정말 좋겠습니다.......

 

         괌, 한인성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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