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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4] 교회의 재일치에 열과 성 다한 바오로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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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훈 [saint72] 쪽지 캡슐

1999-08-29 ㅣ No.375

 

[14] 교회의 재일치에 열과 성 다한 바오로 6세

 

■ 교회의 재일치에 열과 성 다한 바오로 6세

 

교황 요한 23세에 이러 ’밀라노’의 대주교 65세의 세자 요한 몬티니가 1963년

6월 21일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그의 교황 이름으로 바오로 6세를

택했다. 이보다 앞서 그는 6월 7일 ’밀라노’대성당에서 요한 23세의 추도미사를

지내고 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가 이제 바라보아야 할 곳은 과거도

아니고, 요한도 아니고, 그가 교회의 역사를 위해 제시한 지평선입니다. 그의

무덤이 그의 유산까지 묻을 수는 없고, 그의 죽음이 그의 정신까지 죽일 수는

없습니다."

 

이 말에 암시되어 있듯, 과연 바오로 6세는 교황으로 당선되자, 선임 교황의

사망으로 중단된 공의회를 속해할 의사를 표명하고, 또한 그는 공의회의 목표로

특히 교회의 자기 이해의 심화, 교회의 쇄신, 전그리스도교인의 재일치의 촉진,

현대세계와의 대화 등 네가지 점을 내세웠다. 이리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미 그해 9월 29일에 제2회기가 개최되었고, 이어 1964년 9월에는 제3회기가,

그리고 1965년 9월에는 마지막 회기인 제4회기가 개최되었다. 요한 23세에 의해

소집되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속개하고, 마무리하는 것은 바오로 6세

교황에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그나름대로 실현시켰다. 그는 제2회기를 개최하면서

선임자의 훌륭한 모습을 상기시킨 다음, 이렇게 세 가지 질문을 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에 대해 그는 스스로 이런 감명 깊은 대답을 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원천이요 우리는 유일한 길이요 우리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바오로 6세는 1964년 1월에 3일간 팔레스티나 성지를 순례함으로써 교황사상

성지를 찾은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그는 교황직의 원천을 직접 보려했다.

팔레스티나는 베드로 사도를 길러내고 또한 그를 로마로 떠나 보낸 거룩한

땅이다. 또한 그곳은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직접 교황직의 사명을 받은

성지이다. 그래서 바오로 6세는 그의 원천으로 돌아가서 유일한 원천이요 길이요

목표인 그리스도 구세주 앞에 겸허한 순례자가 되려했던 것이다.

 

또한 바오로 6세는 그의 세계여행을 통해 교황사에서 새장을 열었다. 그것은

동시에 그가 그의 교황명으로 택한 바울로 사도를 본받는 길이기도 했다. 그는

’바티칸의 포로’에서 해방되어 세계적 복음의 여행자가 되려했다. 실제로 그는

1964년 인도 봄베이의 국제 성체대회에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1965년에는

미국을 방문하고 국제연합에서 연설을 했고, 1967년에는 파티마의 성모,

1968년에는 콜롬비아의 국제 성체대회, 1969년에는 아프리카를 방문했다. 또한

1970년 말에는 테헤란, 세일론, 마닐라, 사모아, 시드니, 홍콩 등지를 두루

여행했는데, 특히 홍콩 방문은 아주 상징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폐쇄된

중국 국경에서 국경을 초월한 사랑의 보편적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오로 6세는 그의 선임자의 정신을 따라 모든 그리스도교인의 재일치를

교황직의 중요한 임무로 인식하고, 이를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베드로의

직책은 형제들의 신앙을 굳게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반석 구실을

하면서 일치의 중심을 이루는데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이 복음의 유산을

유지하지 못하게 했고, 결국 분열을 초래했다. 동방 정교회와의 분열의 역사는

1천년을 넘었고, 서방 프로테스탄트와의 분열도 수세기간 계속되고 있다. 이

분열을 극복하려는 대화에 로마는 처음에 소극적이었으나, 그후 분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일치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요한 23세는 갈라진 형제들을 공의회의 옵서버로 초대했었다. 바오로 6세는

공의회가 폐회되기 직전, 갈라진 형제들에게 "당신들의 출발은 우리로 하여금

공의회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고독을 느끼게 합니다"란 감격적인 말을 했다.

이때부터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의 상호방문이 잦아졌다. 바오로 6세는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정교회의 총대주교를 만났다. 1966년에는

영국의 수석 주교인 마이클 램지 캔터버리 대주교가 바티칸을 방문했고 그후

아르메니아. 시리아. 곱트교회의 총대주교들이 로마를 잇달아 방문했다.

 

1967년 7월 바오로 6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비잔틴 교회의 책임자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와 역사적인 회견을 했고 이보다 앞서 1965년에 이미 1054년에 내려졌던

상호간의 파문이 철회되었으며, 1967년에는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가 답례차

로마로 가서 바오로 6세와 직접 회견했다.

 

뿐더러 바오로 6세는 1969년 제네바의 세계교회 협의회 본부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내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측의 아무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친교의 직책을 맡기셨다고 확신합니다"고 인사말을

했다. 그는 이 친교의 직책이 도리어 분열의 원인이 되고, 또한 모퉁이들이

도리어 장애물이 되었음을 같이 슬퍼했다.

 

공의회의 소집에서 이미 예측된 것이기는 하지만, 바오로 6세는 교황의

자문기관인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를 발족시켰다. 이 결정은 일찍이

로마교회사에서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바오로 6세가 추천한 일련의 개혁 중에서 추기경단의 국제화는 대내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물론 추기경의 증원은 이미 그의 선임자에게서 시작된 것이지만,

바오로 6세는 선임자의 노선을 더욱 강화했다. 그는 추기경의 수를 145명으로

크게 증원했다. 이것은 교회사상 일찍이 없었던 숫자이다. 그후 그는 추기경의

수를 120명으로 조정하고, 또 교황 선거연령을 80세 이하로 국한 시켰다.

 

바오로 6세의 사망당시, 즉 1978년 추기경은 1백 14명이었는데 그중

이탈리아인은 28명 뿐이었다. 이 선가단은 1개월 간격을 두고 두번 교황을

선출했는데 먼저 베니스의 대주교가 선출되었고, 다음 크라크프의 대주교가

선출되었다. 바오로 6세에 의해 추진된 추기경단의 가톨릭화는 4백여년의 오랜

전통을 깨고 마침내 비 이탈리아인 교황을 출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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