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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28] 성베드로는 과연 로마의 주교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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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훈 [saint72] 쪽지 캡슐

1999-08-29 ㅣ No.389

 

[28] 성베드로는 과연 로마의 주교였는가?

 

♤문: 많은 학자들이 성 베드로가 로마에 간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를 로마의 주교였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답: 그리스도로부터 전 교회의 권할권을 부여 받은 성 베드로는(42-67)최초의

로마주교였다. 로마의 도착 날짜와 체류기간 및 포교활동의 세부 사항은 다소

불확실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베드로가 로마에 체류했고 또 그곳에서

순교하였음을 확실한 것으로 보고 있다.

 

베드로 자신도 그가 로마에 갔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는 첫 번째 서한에서 그

서한을 바빌론에서 쓰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바빌론은 당시 로마에 대한

비유적 명칭이었다(1베드5,13). 프로테스탄트인 엘리오트(Elliott)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다음의 사항들을 주목해야 한다. 즉, 바빌론 시는

확실히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존재한 장소가 아니었으며 고대 기록에서는 성

베드로가 갈라데아에서 머물렀거나 활동했다는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모든 고대의 저술가들은 그가 생애의 마지막 몇 해를 로마 제국의 서부에서

보냈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반면에 바빌론은 성 요한이 살아있던

시기에 소 아시아에서 로마에 대한 상징적 명칭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고대의 해석가들은 바빌론으로 로마와 완전히 같은 의미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4세기의 교부들은 로마에서의 성베드로의 활약과 순교에 대해 빈번이

언급하고 있으며, 베드로가 로마의 주교였음을 거듭 입증하고 있다. 성

이레네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오래됐으며 가장

빛나는 교회가 로마에서 영광스러운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에 의해 세워지고 의해

세워지고 구성되었으며 모든 교회들은 이에 따라야 한다" 성치프리아노는 로마를

일컬어 "베드로의 성좌이며 사제직의 일치의 근원인 통치하는 교회이다"라고

말했다. 에우제비오는 그의 <교회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리노는

베드로 이후 처음으로 로마교회에서 주교의 직에 올랐다."

 

현대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턴트계 학자들 및 합리주의자들은 성 베드로가 로마의

주교였다는 설득력 있고 신뢰할 만한 증거 자료들을 제시하고 있다.

 

케이브(Cave)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베드로는 로마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얼마동안 교황직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많은 고대 학자들과 더불어 서슴없이

단언한다. 우리는 이에 대한 증거를 가장 오래된 시대의 인물들로부터 끌어올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성 이냐시오, 파피아스, 성이레네오, 코린트의

디오니시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테르툴리아노, 로마의 가이오,

오리제네스 등을 인용하고 있다.

 

라드너(Lardener)박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것은 세계의 여러

지역-그리스계, 라틴계, 시라아계-의 고대 저술가들의 보편적이고 모순되지

않으며 편견없는 증언이다."

 

또한 피어슨(Pearson)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성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가르쳤으며 그 곳에서 순교했다는 사실이 처음부터 전해져 내려왔고 베드로나

바울로가 다른 곳에서 순교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므로 나는

확신을 가지고 신자들에게 이러한 해석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토록 위대한 사도가 아무에게도 그의 죽음의 장소가 기록되지 않은 채

모호하게 사라질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5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로마에서 갈라져나간 동방교회의 이교인들 중 아무도

성베드로가 로마에서 주교의 직에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음을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의 이교에 타당한 구실을 붙이기 위하여 쉽사리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불가능한 주장을 할 것을 전혀

꿈꾸지 않았다. 13세기와 14세기에 왈덴스(Waldenses)와 파두아의

마르시글리오(Marsiglio)가 이 역사적 진리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단지 논쟁을

벌이고자 하는 목적에서였다.

 

마침내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가톨릭 신앙에 대한 조항으로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성 베드로는 그의 후계자인 로마 주교들 안에서 여전히 생활하고

주관하며 판단을 내리고 있다."

 

1940-1960년 사이에 행해진 성 베드로 대성전 내의 콘페시오(Confession)옆의

발굴작업에서 사도 베드로가 그 곳에 묻혔었다는 고고학적 증거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160년경의 것으로 보이는 그리스어 비문은 "베드로 여기

잠들다"라고 씌어져 있다. 이 비문과 다른 여러개의 비문들로 미루어 보아

최소한 2세기 중엽 무렵부터 신자들은 현재의 교황 제단 밑의 소 제대에 의해

표시된 장소가 성베드로의 무덤이라고 믿고 있었음이 명백해진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고고학자이며 비문 발굴 작업의 가장 뛰어난 전문가인 마르게리타

구아르두치(Margherita Guarducci)박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성 베드로

의 무덤을 조사함으로써 우리는 이제 과학이 신앙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 만족할만한 협력은 오래된 전승 즉, 더욱 굳건해지고 새로워진

참된 진리의 봉인(封印)위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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