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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29] 성베드로의 세력이 수세기 계승되었음을 증명할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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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훈 [saint72] 쪽지 캡슐

1999-08-29 ㅣ No.390

 

[29] 성베드로의 세력이 수세기 계승되었음을 증명할수 있나?

 

♤문: 성 베드로가 사도들의 우두머리였고 또 초대 교회의 우두머리였음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의 세력이 수 세기 동안 계승되었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처음 3세기 동안에도 교황의 수위권이 행사되었었는가?

 

♠답: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이 성베드로의 합법적인 후계자임을 신조로

가르치고 있다. "누구든지 로마 교황이 성베드로의 후계자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파문을 받는다."

 

성베드로의 수위권은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같은 개인적인 특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 위에 세워진 본질적인 부분, 즉 반석이었다.

 

교회가 지속하는 한 즉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베드로는 그를 후계하는 로마

주교들 안에서 계속 교회를 다스리게 되어 있었다. 하느님의 집은 항상 그

’기초’를 필요로 한다. 즉, 하느님의 집은 항상 형제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고

그들을 인도하고 다스릴 목자를 필요로 한다.

 

초기 교회상의 많은 문헌들이 처음 3세기간의 박해로 말미암아 소실되었으나

남아있는 기록들 만으로도 로마의 주교들이 가르치고 재판하고 통치하는

수위권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한사도가 아직 죽기 전에 로마의

클레멘스(90-99) 교황은 직접 코린트의 그리스도교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신자들

간의 화합과 교회의 장상들에 대한 복종을 촉구했다. 비록 에페소가 로마보다 더

가까웠을지라도 이때 사도요한이 중재했다는 기록은 없다. 코린트 사람들은

로마로부터의 메시지와 사절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또한 교황의 서한은 거의

1세기 동안 성서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2세기 말에 교황 빅토리오는(189-198)는 부활절의 날짜를 정하기 위해 주교들을

교회회의로 소집했었다. 아시아의 주교들은 유대인들의 유월절을 부활축일로

받아들인 반면에 로마에서는 유대인들의 유월적 다음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고

있었다. 이때 아시아의 교회회의에서는 파피아스와 성 폴리카르포와 더불어 성

요한과 성 필립보 사도들을 그들의 권위자로 호소하였으나 교황은 주교들에게

그들의 이러한 관습을 버리지 않는 한 파문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이보다 더 명백한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다른 어떤 교회에서도

그러한 권력이 행사된 일이 없다.

 

리용의 주교 성 이레네오는 180년에 당시의 그노시스파들에 대한 그의 유명한

반박서를 저술했다.

 

이 반박서에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의 일치, 로마의 수위권, 사도적 전승의

수호자로서 다른 모든 교회에 대한 로마 교회의 우위성에 대한 명백한 주장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로마 교회의 현저한 우위성은 모든 교회, 즉 로마 교회의 사도적 전승이 끊이지

않고 보존되어 온 모든 교회가 반드시 로마교회와 일치되어 있어야 하는 데에

있다."

 

256년에 이단자들이 준 세례문제를 둘러싸고 교황 스테파노(354-257)와

카르타고의 성 치르리아노 주교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로마에서는 이단자들의

세례를 정당하다고 인정했으나 카르타고에서는 그것을 무효한 것으로 선언했다.

성 치프리아노는 교회회의에 참석한 그의 주교들과 함께 그의 이런 주장을

포기할 것을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 스테파노는 전통적인 가르침을

고수하였고 또한 교황 빅토리오가 부활절 논쟁에 대해 취했던 것처럼 스테파노

교황도 반대하는 주교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195-265) 대주교는 삼위일체론과 이단자로 로마에

고발되었었다. 교황 디오니시오(259-268)는 대주교에게 해명을 요구했고

대주교는 <논박과 변명>이란 저술을 통해 교황에게 대답했다.

’동질(同質)’이라는 말이 비록 다음 세기에 가서야 정식으로 받아들여졌을지라도

교황은 대주교에게 ’동질’이라는 용어를 버리지 말도록 요청했다. 이에 대주교

디오니시오는 그의 말을 수정했고 이로서 그에게 해명을 요구한 로마의 주교의

권위를 받아들였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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