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목)
(녹)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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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신부님_“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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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5-30 ㅣ No.172841

<오늘의 말씀>: 연중 8 주 목요일,

<제1독서>: 1베드 2,2-5.9-12 <복음> : 마르 10,46-52

46 그들은 예리코에 들어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 <오늘의 강론> :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지 장님 바르톨로메오의 치유를 통해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눈먼 이의 치유는 어둠 속에 있는 이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을 표상하며, 이는 예언자들에 따르면 메시아의 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이사 35,5;시 146,8;마태 11,5).

<본문>에서, 눈먼 거지 바르티메오는 예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그분이 지닌 메시아의 권능을 믿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마르 10,50). 보이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우리도 오늘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겉옷”은 벗어버려야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내가 걸치고 있는 “겉옷”은 무엇일까? 나에게는, 하느님의 일을 가리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하는 ‘내 생각’이 바로 ‘겉옷’입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이 바로 던져버려야 할 ‘겉옷’입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거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줄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환히 아시지만, 우리가 진정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이며, ‘누구에게’ 그것을 청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당신께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청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믿음’으로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원해야 하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이미 성인입니다.”라는 성 프란치스코는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거지 장님은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어로 ‘보다’(αναβλεπω)라는 말은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항상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성전 휘장을 찢어놓으신 그분께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고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곧 그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눈이요, 믿음으로 세상과 형제들을 보는 눈이요, 빛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아멘.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아니 마음이 완고하여 태양을 보지 않으려 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 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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