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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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신부님_2024년 5월 17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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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5-17 ㅣ No.172478

 

푸른잎새추천 0조회 4424.05.16 23:19댓글 1

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25,13ㄴ-21 

 

그 무렵 

13 아그리파스 임금과 베르니케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페스투스에게 인사하였다.
14 그들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자 페스투스가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어 임금에게 이야기하였다.
“펠릭스가 버려두고 간 수인이 하나 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갔더니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유죄 판결을 요청하였습니다.
16 그러나 나는 고발을 당한 자가 고발한 자와 대면하여 고발 내용에 관한 변호의 기회를 가지기도 전에 사람을 내주는 것은 로마인들의 관례가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7 그래서 그들이 이곳으로 함께 오자,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다음 날로 재판정에 앉아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8 그런데 고발한 자들이 그를 둘러섰지만 내가 짐작한 범법 사실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19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20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 그곳에서 이 사건에 관하여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21 바오로는 그대로 갇혀 있다가 폐하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황제께 보낼 때까지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상을 차려 아침을 먹이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며 묻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5.16.17)

뭔가 이상한 질문입니다. 

보통 일을 맡길 때면,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잘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묻는데, 엉뚱하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일까요? 

이는 일을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당신께서 맡기신 일은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일’을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 본질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양들’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15.16.17)

그렇습니다. 

당신의 양들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믿으시기에 맡기신 양들입니다. 

 

이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능력을 보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으로 맡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 하심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당신이 먼저 우리를 믿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세 번의 동문서답으로 대화를 끝내고 맙니다. 

그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5.16.17)라고 고백할 뿐,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 이전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의심하고 세 번이나 부정했지만, 주님은 그가 배신할 줄을 알면서도 그를 믿으셨습니다.

 

그러니 비록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신실하심’(헤세드)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끝내 이를 알아듣지 못한 베드로는 결국 양떼를 돌보지 않고 도망치고 말게 될 것입니다. 

폴란드 소설가 센키비치의 소설 <쿼바디스>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지하교회에 숨어있던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던 중, 갑자가 한 줄기의 빛이 그를 향해 다가오자, 그는 그 빛이 그리스도임을 알고 땅에 엎드린 채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자 빛이신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지 않겠느냐?”

그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요청받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의 일을 따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또 ‘나의 일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7)

주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심은 저의 사랑을 당신이 모르셔서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제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아침상을 차려 사랑을 먹이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훨씬 더 더 사랑하시며, 목숨까지 내주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십니다.

하오니,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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