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4일 (월)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자유게시판

현상 너머의 의미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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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 [goodactor] 쪽지 캡슐

2024-06-07 ㅣ No.231715

죽을 죄가 장난인가

강도짓을 하려고 아는 게 과연 지식인가 하는 문제는 깊이 있는 이해와 판단을 요구한다
하느님은 한 처음에 아담과 하와에게 그 원죄가 되는 행위에 따를 죽음과 세상사의 모든 사실들을 일러 주었다
원죄라는 개념은 그리스도교에서 인간 실존을 다루는 데에(인간의 현상태와 세상사 속의 모든 현실태에서)있어서 반드시 이해가 가능해야 할 문제이다
결국 아담과 하와의 행위가 원죄라는 개념으로 정립되면서 죽음과 세상사의 모든 사실들은 당연히 그 벌, 곧 징벌의 개념으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원죄라는 개념이 과연 아담과 하와의 모든 후손들에게 연좌제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성질인가는 깊은 이해와 설명이 필요하다
죽을 죄, 그것은 이미 세상창조에 대한 모든 것에 있는 가능한 상태와 그것이 실현가능해지는 현실태로 계획되었다는 것은 선악과라는 실체와 이미지, 이로 인해 벌어질 모든 사태 속에서 그리고 현실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이해는 곧 하느님이 그렇게 창조했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는 하느님의 깊은 뜻이 있다
하느님이 사람에게 창조해 놓은 지성이란 본성과 이미지는 오로지 선만을 알고 선의 가능성 속에서만 살아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라는 것은 사실이다
보통 악이라고 여겨지는 그래서 말해지는 실상은 선악과 때문만도, 선악과를 시초로 그 모든 것이 발원된, 그렇게 선악과를 기원삼는 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인간지성의 행위에 닿는 선악과의 발화는 선악과의 힘도, 선악과가 유력한 역사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것은 분명하고, 인간과의 접점과 연계선상에서 어떠할 것이라는 것도 분명해진 그 선악과는 인간지성의 행위에만 그 가능성이 두어진 것이라는 것도, 그 사후의 모든 일들도 그러하다는 것도 이미 사실이다
진리의 모든 이야기를 여러 모로 종합해 보면 말이다

사랑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진리의 최종적 알고리즘
성 바오로는 사랑의 불가해성을 결코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성 바오로의 서간 전체에는 하느님에 관련된 부분들만을 제외하면 거의 분명한 사실들을 다루는 것처럼 그 확신에 찬 어조가 뚜렸하다
그것은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랑만큼의 그리스도인의 대전제가 있을까
정의는 최소한의 사랑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랑은 인간삶과 인간행위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진실이다
그런 진실에 논리의 비약은 황당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건너뛰고 넘어간 부분만큼, 이해와 설명의 여지를 남겨 두기 때문에 그 부분의 간극과 폭이 논리 전체에서 얼마만큼인가에 따라 난해함으로, 부실함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일이다
성 바오로가 구약 성경, 토라에 정통했다는 것은 스스로도 밝힌 사실이다
구약은 철저한 율법체계이기 때문에 사실을 두고 사실을 말할 때, 전제와 조건을 따지는 일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인간행위에 있어서만큼 하느님으로부터의 비약이 지배적이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맹목의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체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행위는 곧 생명체에게 해가 되는 일을 벌이고 저지르는 것이다라고 십계명은 분명히 그 의의를 전달한다
그렇게 사랑은 생명체 스스로에게 최선이 되는, 곧 최고선이 되는 모든 것이다
그게 진리의 핵심이며 전체인 것이 성경이다
그 성경은 그래서 2000년 전에 그 역사가 끝난 일이 아니다
그 성경은 이후 모든 이들의 사랑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사랑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진리는 모든 현실과 사실들을 증언한다
그 증언은 경전 상의 말마디로 맺음해 더 이상 사랑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종언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 이후 더한 표현 더한 이해는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관점은 그 시대, 그 이후 더 좋은 인간, 그 사랑을 다하는 인간들의 역사는 기록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런 이들의 본보기도, 그게 더 훌륭하고 더 위대하더라도 다 필요없을 기억과 역사인 것이다
성경근본주의자들은 성경지상주의, 성경만능주의를 앞세우며 성경을 왜곡하는 경향이 더 뚜렷하다
성경을 보전해야 하는 차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성 바오로는 사랑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진리를 증언했다
지금 시대를 보며 예수의 예언이 얼마만큼 사실인지를 어느 정도는 알아 볼 수 있다
그것은 때론 비관적일 만치 암담한 현실이다
많은 이들이 떨어져 나가고, 붙어 있는 것마저도 이탈한다는 의미가, 낙엽이 떨어진다와 같은 떨어진다의 의미상관이다
그래서 그 모든 일은 사람들이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서 개선되거나 나아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죄를 죄로 잡는 것이 정의인가
깡패들의 폭력과 경찰들의 공권력은 같은 행위라도(권투니, 이종 격투기니 태권도니, 유도니 하는 것들도 깡패들이 배웠거나 선수출신들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무엇이 다른가
먼저 경찰들은 그 공권력 사용의 목적이 있다
바로 체포와 제압, 범죄자들의 손목에 수갑을 체우고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는, 경찰직무의 완수 때까지이다
그러나 깡패들은 친구라는 영화도 있듯이(실화라는 말도 있다) 그 폭력이 살인하고 살해해야 끝이 나는 경우도 있다
대낮에 호텔에서 칼부림해 여럿을 살해하고 잡힌 깡패는 과거 유명했다
보통 죄는 유혹과 충동이란 인간성에서 발화될 수 있는 성질을 전제한다
그리고 탄소화합물과 공기중에 널리 퍼진 산소를 불붙이는 스파크가 일어나면 불이 나듯이 인간성의 그런 성질들이 세상사와의 접점에서 그 죄가 되는 사건을 일으키는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죽여야겠다는 의지와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은 인간성 속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만드는 일도 그 인간성을 결코 비껴서지 않는다
이런 부분들에 하느님을 원인이나 발화점으로 보는 것은 무리이고 맞지 않는 관점이다
십계명을 내리고,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친 그 하느님을 말이다
같은 인간들이나 세상의 모든 사물들에 대해서도 인간에게는 어떤 마음이 생긴다
그 마음은 대체로 욕망이란 말로 기울고, 의지라는 말로 강화된다
성 바오로의 사랑에서 그 사랑이란 말을 나로 바꾸면 모든 것은 분명해진다
그 나를 너로, 우리로 바꾸면 모든 것은 어떤 세계성까지 가능하게 해 준다
바로 Heaven인 것이다
그렇게 이 땅에 그 Heaven이 가능한 것으로 올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그래서 진리의 모든 진실은 사랑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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