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4일 (월)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자유게시판

현상 너마의 의미 II

스크랩 인쇄

조병식 [goodactor] 쪽지 캡슐

2024-06-09 ㅣ No.231758

World 1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고대인들로부터 사람들은 스스로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했다
그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들이 사람이란 존재로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했다
그런 갈망들과 욕망들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인간이란 생명과 지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말이다
그 모든 것에 대한 통찰과 이해가 있기 전까지는 죽음이라든가, 고통이라든가, 불행이라든가 하는 삶의 이면과도 같은, 삶의 부정적 근거와도 같은, 삶의 비관적 실태와도 같은, 스스로들이 느끼고 자각할 수 밖에 없는 여러 '문제'들은 그만큼 언제나 그 해결이 동시성을 띨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합리적인 기원에 대해, 존재가 지금의 모습을 갖는 데에는 그 타당한 근거로부터 출발해서 성립될 수 있다는 철학적 견해를 밝혔다
어째서 사람 다리가 스카이 콩콩처럼 외다리가 아니라 두 다리로 이 땅에 버티고 서 있는지, 그것은 조형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구의 중력과도 깊은 상관이 있는 '문제'이지만 당시에는 과학적인 이해 없이 그 인식의 지평이 어디까지나 합리를 이치로 내세우는 길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논리라도 원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전혀 어처구니 없다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은 견해는 아니며 창조주가 아닌 누가 만들더라도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더 나아가 그렇게 밖에 만들 수 없지 않았을까 하는 최선이나 완전성(존재 스스로나 주변의 환경(생리, 물리, 생태 등)과의 연관성 등 개별성과 세계성을 종합적으로 충분히 고려해서), 모든 미학적, 나아가 인문학적 부분들을  다 합해서도 그런 결론에 가까운 창조성으로 모든 것이 이토록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어쨌든 다 좋은 것이다라는 통찰과 이해에는 가까울 수 없지만(세상을 살다보면 부정적 실체와 가까운 삶의 실태가 많고, 부당하다 싶은 상태들과 현상들이 많기에) 그 모든 것을 단지 자기 지성을 근거로 한 통찰과 이해만으로 결론지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행복이라든가, 만족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어떻게 그 가능성에서부터 현실태에 합리적으로 부합될 수 있는 삶의 현재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담론들은 차츰 그것에 대해 말하는 이들의 입만큼 많아질 수 밖에 없다
대체로 행복이라든가, 만족으로 가는 상태와 현상의 추구는 다분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란 생명과 지성을 지닌 인간에게 맞갖은 변함없는 삶의 진실은 무엇인가 하는 보다 깊은 차원으로 들어갈 때에는 바닥이나 한도가 보이지 않는 심연의 골짜기가 펼쳐진 밑도, 끝도 보이지 않는 길이 나 있는 문을 먼저 열 수 밖에 없다
결코 검색하거나 탐색할 수조차도 없는(막대한 데이터가 구축되어 있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 닫힌 문 안쪽의 인식가능한 범위에 불과하므로) 그 세계로의 입장은 아직까지는 요원한 '문제'이다
그러면 현재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완전성에 대한 판단과 이해는 무엇을 근거로 할 수 있을까(이 세계보다 더한 세계가 또 있을까, 또는 더 좋은, 더 나은 세계가 또 있을까, 그렇게 더한 세계에 대한 창조성이라든가(창조주의 입장에도 맞닿는), 의도라든가, 전망이라든가 하는 인본적이고, 인격적인 추구가 가능할까 하는)
인류사의 역사적 행보와 과업은 어디까지나 이 지구상에서만 가능할 할 뿐이다(창조되어진 현실성과 사실성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범위와 범주의 세계성 속에서)
그것은 인간지성의 통찰과 이해의 끝에는 열어 보아야 할 현실태에 대한 진실과 사실이 언제나 남아 있는 것처럼(계속 가야할 길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이 지닌 지성 말고도 지성이 있는 존재라면 자기 스스로나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판단과 이해는 불가분의 운명과도 같을 것이다
그러한 인식의 첫 발을 딛지 않고서는, 지성이란 어떤 통찰과 이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평화라든가 선이라든가 하는 이해의 지평이 지성의 안주와 생활을 통합해 흔들림 없는 자기 현존이 사실이 되는 지점으로 현실이 구축될 수 있는 세계성을 바라보며 그 전부가 다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지향점이 되는 것이다
그게 실제로 뭔지 몰라도 막연함과 모호함, 혼란과 혼돈이 동시에 펼쳐지고 있는 세상 속에서 그러한 지성이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오히려 그럴수록 그 지향점으로의 관심과 동력은 더욱 부추겨지고 지지되며 그 동력을 배가하기도 할 것이다

모든 사실들의 폭증과 폭발과도 같은 현상 속에서
지성이란 언제나 단일한 의미표상이 뚜렷해지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문제들이 복잡해 '보일수록' 그러한 경향은 더 강화되고 강조된다
지성의 안주와도 깊은 상관이 있는 현실에 대한 이해, 사실들에 대한 파악은 언제나 필요 이상의 확실시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해도, 그게 자기 삶의 사실과 세계의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고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결코 조율이 불가능한 세계 내 모든 사실과 현실은 언제나 수용 아니면 거부 이 두 축에서 삶을 강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사실 전반이 어떤 확실한 원리를 싫현가능하게 하는 입장과 대등하지 않은 인간지성이 놓여진 현실 속에서 말이다
인간지성이 상상과 현실을 분간하는 근거는 대체로 실현가능과 불가능, 미션 파서블과 미션 임파서블로 나누는 지점이다
그런 상상과 현실을 연결하는 접점이란 지성 속에서도 없다
이미 가능한 것이 현실과 사실이 될 뿐이라는 엄연한 진실만이 현실 속에서 계속 확인될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의 변화 또한 크게든, 작게든 아직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과 동시에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기대와 바램과 같은 정신의 추구가 그 상상과 현실의 중간에서 삶의 동기와 동력이 되는지 그 이해가 다소 가능해진다
삶이란 그렇게 꾸며질수도, 확장될수도, 확실시?될 수도 있는 쪽으로 방향타를 꼭 부여잡게 되는 것이다
그엏게 지성이 안주를 바라는 자기자리의 궁극은 아직까지는 세계성에 있다
본질아든가, 성격이라든가, 상태라든가, 현상이라든가 하는 지점들은 아직도 확인불가능하고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보이지 않게 두고 있는, 그 모든 것을 가리고만 있는 현실의 세계성은 아직도 충분하지 않은, 완전하지 않은 미지와 같은 현재를 이루고 있기에 그 속을 헤매이고 있다는 것을 또한 현실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지성이 확고한 의미표상을 바라는 것은 어쪄면 한계일수도, 어쩌면 현실에 대한 확실한 입장표출일 수도 있다
삶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 근심과 걱정들은 어디까지나 지성이 현실 속에 살아있는 한 현재의 입장에서 번지는 의식과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불식시킬 수 있는 분명한 원천과 근거가 필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다고 모든 것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말이다
삶이란 실제를 넘나드는 많은 사실들의 범람 속에서 온갖 아이러니가, 갖은 부조리가 공존하는 장이며 그런 입장에 계속 두어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삶이 있는데 늘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삶의 입장에서는 아주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 죽음은 캔버스에 그려진 온갖 이상과 꿈, 바램, 기대가 만발한 한 삶을 순식간에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버리고 기억과 흔적이라는 역사적 사실로 그 세계성에 남겨둔다
지금은 그 모든 기억과 흔적들이 데이터로 변환된 큰 이미지로 화한 AI를 출현시켰고 이제 그 세계성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그 그림을 더욱 크게 그리려고 할 뿐인 것이다
그런다고 삶의 모든 문제들이 아무 것도 달라지지는 않는데도 말이다
바벨이란 것은 있어도 허상이 될 확률이 높고 모든 혼란의 구심점이 될 가능성이 높기도 한 것이다
삶으부터의 그 모든 기억과 흔적들이 지성화된 세계성이란 여전히 지구상이란 문 안 쪽의 세계성만을 담보하고 확실시 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문 밖의 세계성에 대한 이해 없이, 문 안 쪽의 세계성에 대한 판단과 이해, 나아가 통찰이 언제나 인문학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에 계속 살아있을 뿐이라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게 평화라는 것도, 선이라는 것도 그 맥락에서 보다 확실시되는 의미표상으로 그 간절한 바램과 기대가 깃들어 있기도 한 것이다

인간지성의 충분한 만족, 즐거움
지성이 있는 한 고통도 있고, 괴로움도 있는 것이 지구상에 머무는 모든 지성에게 있는 공통된 현실이며 그 삶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것은 삶에 있는 일단의 진실이기도 하다
셩경책에는 유일무이한 신이 있다는 진실이 밝혀져 있다(책은 그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문제는 그 신이 이 세계성 속에 있는 신인가, 아니면 이 세계성 밖에 있는 신인가하는 사실을 밝히는 데에서부터 그 모든 이야기가 출발하고 있는데, 대체로 구약을 기록한 유다인들은 분리된 입장(신과 셰계성이 뵌질적, 성격적, 상태적, 현상적으로 그 모든 것이 결코 같지만은 않은)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원천적으로는 창조되지 않고 존재하는 것과 창조되어 존재하는 것들과 갈라 놓고 있는 것이다
그 둘 사이의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지고 이루어져 있는가는 성경책을 보는 관점 속에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일이다
인간들의 두 눈, 곧 자기실체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온전하게 만나지도 못하고 그 커뮤니케이션이 상이하게 나타나도록 이야기되어 있는 것이다
대체로 소리(인간의 눈이 배제되어 있기에 인간은 신을 자기입장에서도, 자기식으로도 결코 판단하거나 이해할 수조차 없다)에 한정시키는 소통방식이 언제나 진실에 가까운 입장들을 서로가 벗어나지 않는 최소한의 범위에서 타당하게 보여지는 선으로 구축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소리를 알아듣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입장이기도 한 것도 사실이다
점차로 세계성에 펼쳐질 신에 대한 관점과 관념을 성립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신은 자기 현존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그 신을 알아야 할 입장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3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