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4일 (월)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자유게시판

현상 너머의 의미 II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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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 [goodactor] 쪽지 캡슐

2024-06-09 ㅣ No.231765

World 2


생명의 신비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숙연할 수 밖에 없다
창조주의 손길로 빚어진 그것들은 자기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들로서 살아있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스스로가 환경 속에서 살아 있고자 하는 생명의 발상을 낼 수 있다고 한다면 모든 것은 그저 그렇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태양빛으로 광합성을 하는 식물들은 산소를 내뿜는데 그것은 경험적으로 이산화탄소로 결합된 기체에 작용해서 탄소를 식물에서 쓰고 불필요한 산소를 내버리는 과정으로 작동하는 식물이 살아있을 수 있는 이치이다
이미 있어야 할 것들이 순차적으로 작용하는 구약의 창조이야기는 존재의 구축을 위해서는 선험 곧 앞서의 경험들로 구축된 실제가 뒤에 있는 것들을 끌고 들어온다는 논리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선험이란 그런 맥락을 구조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의 창조이야기는 그 모든 경험들을 앞서 있고(첫째) 그 모든 경험들이 있기 전에 그것을 실현가능하게 하는 실체적 진실이 신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첫째 이전의 기원적 시초) 암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제임스 와트가 자가동력의 원리로 삼은 증기를 어떻게 사물을 구동시키는 동력으로 쓸 수 있는지의 과정속에서 맺혀진 동력장치의 발상은 결국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아이디어가 되었다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이 결국 모든 움직이는(구동하는) 기계의 동력발생장치가 되어 인류에게 그 경험적 산물로 선사된 것이다
인류는 그 이전에는 우마차를 사람이나 물품들을 운반하는 수단으로 썼는데, 이제 증기기관을 시작으로 더 폭넓은 삶의 수단들을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경험들은 필요성이 있는 한 그 기억들의 재경험들로 축적되어 지워버릴 수 없는 흔적, 곧 유산으로 계승되는 것이다
그러면 생명체들은 진화한다고 찰스다윈이 밝혔는데, 생명체들이 얼마만큼 태양이나 대기를 자기경험이 가능한 바탕과 영역으로(자기삶으로 실현가능한 삶의 공간과 서식환경으로) 삼을 수 있는지에 대한 경험의 기원과 동력은 생명체가 그런 자기입장에서구체적인 자기화가 가능한  유전적인 인자로 스스로를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먼저 성립되어야 그 실제가 가능해진다
그것은 인간생명의 경험적 유산들과는 대체로 상반된 궤적을 그리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경험에 유리하거나 유익한 방향으로 구조를 만들어내는 가능성을 풍부히 가지고 있고(일정 정도의 제한과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생명체들처럼 스스로를 진화의 맥락에서 구현하는 것이 아닌 자기자신은 있는 그대로 두고 외부나 세계의 변형이나 변화를 추구하는 쪽으로 가는 동시에 자기본성과 습성을 강화하고 증진하는 방면으로) 본능과 습성이 유기적으로 조합되도록 짜여진 생명체들은 진화의 맥락에서 종이 보전되는 차원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생명처럼 자기경험을 유리하고 유익하게 가져가는 유산의 축적으로 계승되고 발전되는 차원과 세계실현으로의 궤도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것이나 저런 것이나 본성이나 본능이나 습성이나 발전이나 생명체라면 모두 경이로운 것이다
경험을 기억하는 차원이 무엇인지는 생명체들의 유전자를 통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다
그것이 지워질 수 없는, 생명체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은 기억되는 차원, 곧 본능에 새겨지는 차원이 설계도처럼 내장되어 발화된다는 것이다
중력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갓 태어난 망아지는 1분 이내로 그 경험들을 놀랍게 복원해 낸다
그것은  구조의 역할 이상으로 경험이 쌓여야 가능한 실제이다
인간에게 직립보행이 가능해지려면 보통 수 만 번은 넘어지고 일어서야 하는 경험들을 통해야 한다
그만큼 직립보행은 중력과의 균형을 잡는 경험이 축적되어 자기화가 가능해야 실현된다

그냥이 논리야
노예제는 인류사에서 오랜 동안 지속된 국가, 사회의 제도였다
이 제도가 계속될 동안 누구도 이런 말을 도전적으로? 내뱉지 않았다
나는 너와 똑같은 사람인데 왜 너는 나의 주인행세를 하고 왜 나는 너의 종살이를 할까
그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인간들의 세계수용성은, 그 적응력은 기본적으로 순응적이다
자기가 아떤 식으로든 살아남을 가능성을 첫눈에 알아보는 것처럼 일단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산다
그런 사실은 역사가 곧 증인이고 그 역사적 사실들이 그 증언들이다
그냥 태어난대로, 주어진 조건대로 사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모든 계급들이 세상은 다 그냥 그런 줄 알고 산 것이다
차별이 왠 말이고, 신분이 왠 말이냐는 식의 토는 일절 달지 않았던 것이다
시대의 위력은 그런 것이다
지금 시대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자기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세상의 지배자들은 자신의 양들을 짓눌러 지배하려고 하지만 너희는 그러지 말고 그들을 섬기라고 말이다
그러나 말이 통하면, 그것도 신의 말이 통하는 인간들이라면 이 세상에 어찌 문제들이 생기랴
예수는 위선자들인 당대 유다교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런 복음의 날선 비판을 오늘날의 종교지도자들, 아니 지배자행세를 하는 자들이 피할 수 있을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달라진 건 언제나 거의 없는 게 세상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탈출을 계획하고 제안한 것은 분명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었다
이집트 종살이의 핍박과 고생을 모를 리 없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 탈출의 종착지인 가나안이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며 말이다
그러면 인간이라면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한 역사의 깊은 뜻을 말이다
무엇이 좋은 세상인지, 사람들이 함께 사는
하느님이 역사까지 일으키고 이루신 그 크나큰 일들의 진실을 말이다
결코 해방신학의 관점으로만 수용되는 차원의 구원이 아닌,

한 사람이 살아야 할 삶의 진실로서 성경전체가 비추는 진리에 입각해서 말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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