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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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양근 성지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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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화 [7470170] 쪽지 캡슐

2007-05-06 ㅣ No.4787

2007년 3월 25일 양근성지 성전 기공 미사 및 기공식 사진입니다.
그 동안 애쓰신 권 요셉 신부님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성전이 준공될때 까지 열심히 기도 드리겠습니다.















 

 

양근 성지에서 온 편지 4  

+ 주 참으로 부활 하셨도다 알렐루야.
  
봄 향기가 물씬 풍기는 4월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습하고 칙칙한 무덤과도 같은 삶에서 벗어나 찬란한 태양이 비추고 바람이 부는 시원한 삶 으로의 초대입니다.
  어느 누구는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하는데 저는 지난 3월 한 달이 너무 길고 잔인했습니다. 성전 신축으로 대리구와 교구를 전전하였고, 주교님과 함께 하는 기공식 미사와 기공행사 준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성지는 본당과 달리 “내 신자”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계획에서 실행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일을 진행하다 보니 스트레스 아닌 스트레스 로 酒님을 접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몸은 천근만근이고, 성지에 출근하여 겨우 미사를 지내고, 오후에는 세상 근심과 걱정을 다 짊어진 사람처럼 생기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야 말로 완전히 길을 잃었습니다.  
  지난 3월 사순시기의 중반에 루카 복음 15장 11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비로소 정신을 차렸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성경의 모든 구절이 없어진다 해도 루카 복음의 위 말씀만 있으면 성경의 핵심인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의 대 문호인 도스트예프스키는 죽으면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위 말씀을 읽어 달라고 했답니다.
  눈치 빠르신 분들은 이 말씀을 성경에서 찾아보지 않아도 “잃었던 아들”의 비유임을 알 것입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올 몫의 재산을 달라고 하여 먼 고장으로 떠났습니다. 작은 아들이 그 고장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면 자기 재산을 낭비하였습니다. 그리고 배가 너무도 고파서 그 고장 주민에게 달려가 매달립니다. 그 주민은 작은 아들을 돼지를 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작은 아들에게 돼지들이 먹는 열매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제 정신이든 그는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써주십시오 ”.
  그리하여 작은 아들은 아버지 집으로 갔고, 멀직이서 작은 아들을 본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성대한 잔치를 벌입니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왔다고 말입니다.
  그 때 들에 나가 있던 큰 아들이 집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하인이 아우님이 돌아 왔다는 소식을 전하자 큰 아들은 분노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불평을 하며 나에게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하나 잡아 주지 않으면서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푼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거워 해야 하고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작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버지이고, 가장 슬퍼 한건 누구일까요? 바로 송아지랍니다. 작은 아들이 돌아 온 날이 곧 제삿날이기 때문이죠.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나는 작은 아들인가 아니면 큰 아들인가 하는 묵상을 자주 해 봅니다. 그러나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은 우리들 마음 이며, 영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내면에는 법과 정도를 무시하고 살려고 하는 작은 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모든 계명을 준수하려고 노력하는 잘 적응된 큰 아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양극을 통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작은 아들처럼 무절제하고, 방탕하게 살면 분명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큰 아들처럼 살면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삶의 풍요로움을 발견하지 못한 채 기쁨이 없는 의무감에 머무를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는 대개 작은 아들 보다는 큰 아들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든 계명을 준수하려는 이상적인 삶을 살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뜻 만 행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 대한 분노는, 우리가 계명을 자신에 맞춘 것이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노력 뒤에는 많은 경우 삶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아들이 우리의 그림자 즉 억눌러 놓은 삶의 에너지를 표출하면 분노하는 것입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잘 듣고 착하게 살려는 동기 안에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게는 벗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신 적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큰 아들이 돌아오니까 살찐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 군요”(루카 15,29-30)라는 말씀에 잘 들어 납니다. 즉 큰 아들은 아버지께 순종하고, 자기가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음으로 아버지가 자기를 더 사랑하고 인정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큰 아들의 점잖고 모범적인 모습 뒤에 억제된 성적 환상이 숨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형은 동생이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 먹었다고 비난하는데, 앞의 이야기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경건한 모습 뒤에 숨어있는 우리들의 어두운 그림자인 것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큰 아들처럼 살든 작은 아들처럼 살든 길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있는지요? 삶의 길에는 지름길이란 없습니다. 죽는 날까지 우리는 우리의 삶을 차곡차곡 살아야 합니다.
  진정 행복한 삶은 어둡고, 칙칙하고 냄새나는 무덤과도 같은 삶에서 벗어나 파아란 하늘이 보이는 밝고 깨끗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 그것은 내가 어디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지 알고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집을 나갔다 돌아 온 작은 아들의 죄를 물어보지 않고, 큰 아들의 불평마저도 감싸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길을 잃었나요?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2007년 4월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성지전담 권일수 요셉 신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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