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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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손희송 신부님,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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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kim7405] 쪽지 캡슐

2000-06-02 ㅣ No.859

+. 주의 평화

 

 

 

손희송 신부님의 답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기쁨을 먼저 맛보라는 말씀 소중히 가슴에 담아두겠습니다.

 

신부님의 글을 읽고 몇가지를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먼저 삶의 결과물 내지는 삶의 종착점으로서의 구원이라는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진리(구원)에 이르는 길은 참으로 다양하다. 모든 종교가 가는 것은 그 길에 있어서 어느 방향을 선택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러한 논리는 특히 가톨릭 신자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고 있는 것 같습니다.(이 사이트에 써놓은 글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해인가요?)

 

신부님이 알려주신대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은 있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길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이 말대로라면 정말 기독교가 타종교와 가지는 차별성은 아무것도 없다고 봅니다.

 

즉 타종교의 믿음이 불완전한 길(우리 입장에서 볼 때)이라 해도 기독교와 획득되어지는 구원은 동일한 것입니다.

 

길이 다르다고 해서 구원의 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그 길의 완전함과 불완전함에 따라 완전한 구원과 불완전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절대적인 형태로 주어진다는 것이 제 생각 입니다.

 

그렇다라면 제가 앞의 글에서 제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특정한 믿음의 양식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질문을 신부님께 드립니다.

 

불교를 믿는 신자에게 우리는 예수님을 알려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고 있는 나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도 불완전하지만(우리 입장에서 볼 때)구원에 이르는 길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예수님을 알리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신부님이 쓰신 글을 보면서 또 한가지 생각한 것은 신앙 생활의 인내와 희생에 따른 ’피해 의식’(이렇게 표현해도 될런지...)이 구원의 절대적 통로로서의 기독교 신앙을 고집하게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신앙 생활은 기쁨 입니다. 저 또한 많이 체험하고 있는 것 입니다.

 

신앙 생활이 부담과 의무로 점철된다면, 그것이 전부라면 그 신앙 생활은 버티기가 힘들것 입니다. 하지만 가톨릭에서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속에 분명히 ’상선벌악’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사회의 윤리, 도덕과는 별개로 하느님께는 의로운 행위로 인정될 것 입니다. 즉 어떤이가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그가 사회적 기준에서 ’도덕적이다’라는 평가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그것이 의로운 행위로 인정받을 것임은 님도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신부님의 말씀처럼 가톨릭 신자가 타종교의 사람들보다 더 어려운 삶(신앙으로 인해 희생하고 인내하고 양보하는 것들)을 산다고 해서 우리의 구원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고집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백하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상의 기준이 아닌 기독교적인 기준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 사회에서 죄 아닌 것들이 기독교 신앙속에서 보면 죄가 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다면 어떻게 윤리, 도덕 내지는 양심(양심도 교육의 영향을 받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이라는 것이 구원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사실, 자기의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의 탓 없이 하느님을 아직 명백히 인정하지는 못할지라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올바로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섭리가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치 않으신다. 사실, 그들한테서 발견되는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로서, 결국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도록 그들을 비추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교회는 생각하고 있다".(교회헌장 16항)

 

 

 

신부님이 인용하신 교회헌장을 보면

 

’사실, 자기의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구원을 위한 전제가 필요합니다.

 

’자기 탓 없이’,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교회 헌장에서 이 전제가 빠지면 구원의 조건을 이루지 못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한테서 발견되는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로서...’

 

그렇습니다.

 

타종교인들에게서 발견되어지는 ’선함’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로서 이해해야지 그것 자체가 복음을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할 겁니다.

 

 

 

신부님의 말씀대로 선교는 믿지 않는 이들을 내가 믿음으로써 느끼는 행복한 삶으로의 초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이들이 다른 종교를 통해서 행복하다면 우리가 가지는 선교의 사명이 약화되거나 혹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고린도1서 13:12)

라는 말씀대로 이 땅에서 하느님을 완전하게 이해하겠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며 결국은 하느님 앞에 가서야 우리는 하느님을 완전히 알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선교’라는 실천적인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고민들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을 더욱 열심을 내서 전하기 위하여 한번쯤은 해보아야할 고민이라고 생각됩니다.

 

가톨릭 200년 역사는 개신교 100년 역사에 비해 너무도 보잘 것 없는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양적인 성장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물량주의나 눈에 보이는 성장을 이루어야 흡족함을 느끼는 업적주의의 시각이 아니라 저를 포함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선교에 대한 방만함이 그리고 내가 믿고 고백하는 것을 너무나 쉽고 안일하게 여긴것이 오늘의 결과를 이루지 않았나 하는 반성에서 말입니다.

 

제 생각에 오류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요.

성실하게 고민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신부님 아래에 올렸던 글 입니다. 답변을 주시지 않아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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