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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통해 실존에 다가가기 -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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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희 [bebe98] 쪽지 캡슐

2014-03-04 ㅣ No.1788

고통을 통해 실존에 다가가기

-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소원> -

 

이정기(freexist@nate.com)

 

들어가는 말

 

먼저 소개해야 할 인물과 단어가 있다. 프랑스 실존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과, 그의 저서명이기도 한 ‘Homo Viator’라는 단어이다. 근본적으로 마르셀은 주체적 실존과 객체적 존재가 다르다고 생각했고, ‘그것’과의 관계가 아닌 ‘우리’가 공존한다는 사실은 ‘너’와 ‘나’의 만남에 ‘성실성’의 덕으로써 자타의 자유가 실현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성실을 ‘희망’으로 지탱함으로써 신 앞에 선다는 종교적 인격적 실존을 주장하는데, 여기서 호모 비아토르는 ‘여행하는(路上) 인간’이라는 뜻으로 인간의 방랑적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이다. 나에게는 이 영화들을 읽는다는 것이 ‘길 위의 인간’을 발견하는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건을 해석하고 사건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관점은 관찰자 또는 해석가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그대로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관점들은 관찰자 또는 해석가의 삶에서 이루어진 유의미한 경험들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시간과 공간의 이동이 누적됨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생산되는 관찰자의 해석의 틀은 가변적일 뿐만 아니라 역동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틀의 한계는 어떤 사건이든 관찰자의 노상을 벗어나서 이해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사회복지 연구자이자 이러저러한 역사성을 지닌 ‘나’라는 글쓴이가 이 영화들의 사건을 해석하고 등장인물들의 변화를 바라보는 관점을 어떻게 취했는가를 성찰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좌절의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인간, 곧 Homo Viator를 영화 속의 인물들을 보고 발견하게 된 것은 분명히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나’의 인간관은 결국 개인적으로 실존주의 철학이라는 학업의 배경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내 삶에 대해 나 자신이 의미 부여를 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타인이 그들의 삶을 다루는 태도를 관찰하고 해석해 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화 속 타인으로 두 인물을 선택하였다.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장군봉

 

 

정작 영화의 텍스트는 주인공인 김만석보다 장군봉과 그의 아내, 그리고 송이뿐의 삶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고, 특히 사회복지적으로 더 관심을 갖게 한다. 장군봉은 택시 기사로 퇴직하고 주차장 관리를 맡고 있는 고령 취업자이며,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킨 뒤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와 둘이 작은 집에 살고 있다. 그는 사실 많은 강점들을 갖고 있다. 자식들에 대한 배려가 극진하고 병든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가족적인 사람이고, 송이뿐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는 친절함을 가진 사람이며, 김만석의 거친 태도에도 화내지 않고 먼저 친구로 삼는 아량과 배포를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여정은 치매 환자인 아내가 ‘너무 늦은 병’에 걸리면서 전환을 맞이한다. 그는 아내 없이 살 자신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생존 이유를 아내에게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미 그의 인생여정에는 자식들의 분가와 무관심으로 인해 홀로 남겨지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말만으로 자주 찾아봬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다시 부부다, 가족이었는데.’

 

장군봉 부부에게는 아무런 사회적 서비스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 부부는 치매 환자에 대한 남편의 부양 부담의 경감과 환자에 대한 적절한 보호 조치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장군봉의 아내를 치매어르신을 위한 데이케어센터에 정기적으로 맡겼더라면 자택에 방임되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위험 요인들을 근본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라든가, 일 1만원 이하의 저렴한 비용이므로 장군봉의 경제력에 크게 부담을 주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는 식의 분석은 사회복지 관계자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장군봉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지 못하는 설정도 갑갑하기는 마찬가지다. 김만석은 아내를 먼저 사별한 경험으로 동료카운슬링의 조건을 갖춘 친구이고, 주인공 네 명의 집단화는 공감적 사건들과 소풍 같은 야외활동으로 정서적 지지집단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특히 김만석의 손녀는 사회복지직 공무원으로서, 김만석이 요청하기만 하면 지역사회 내에서 더 적절한 자원을 연계해 줄 수도 있는 좋은 인적 자원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 따위는 분명히 강의실에서나 주고받을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장군봉에게는 어떤 변화가 필요했을까? 그의 인생은 매우 평범한 단계를 거쳐 왔다. 아내에 대한 부양 부담을 제외한다면 그의 일상과 언행은 일반적인 발달단계의 노년기의 과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도 사실은 노년기에 받아들여야 할 당연한 과제 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 그는 그것까지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내가 사라져서 자신이 혼자 남게 될 것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의 성장과정이 제시된 것은 아니므로 정신역동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추측컨대 그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 매몰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아니면 자신의 정체감을 가족이라는 타인들에게 지나치게 연결시켜 ‘미분화’된 상태였을 수도 있다. 그러한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영성 차원의 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지탱할 희망을 자기자신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충분한 의미의 부여이다. ‘상실’의 관점에서 그에게 가족이란 왔다가 가버리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는 가족이라는 존재의 끈에 대한 신뢰를 점점 잃어 갔고, 친구들의 존재마저 자신의 삶에 관여시키지 못하였기에 ‘우리’라는 의식을 형성하지 못함으로써 수평적 영성의 차원을 확보하지 못한다. ‘미분화’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족에게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에, 가족의 이탈은 ‘나’와 ‘너’의 구분과 자유를 명확하지 못하게 만들고 주체성의 확보에 실패한 채 정체성의 소멸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장군봉의 낡은 택시에 대한 김만석의 발언은 이러한 자아관의 상징이다. ‘처지가 우리랑 같구만. 팔자니 돈은 안 되고 내버리자니 아깝고...’ 그래서 장군봉은 자유의지로 자살을 선택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책임감에 대해 가브리엘 마르셀은 저서 <호모 비아토르>(1944)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하는 행위나 말에 대해 책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나 자신을 인간이라고 확언한다.’ 장군봉의 마지막 선택은 과연 책임을 수반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의 철저한 자살 준비는 자기 책임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을까? 독일의 현대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어느 저서에서 아래와 같이 인간의 책임을 추가한다. ‘현실의 범주 내에서 인간의 가치는 시공간과 혼동되지 않는다. 인간은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 인간은 죽음 위에 있으며 영원한 구도를 추구하는 주체이다.’

 

같은 관점에서 송이뿐 할머니의 선택을 사정할 수도 있다. 그녀도 자유롭게 고향 집을 떠났고, 굳센 의지로 폭력을 견뎌냈고, 김만석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마지막에 고향집에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귀향은 도피가 아니다. 자신의 온 삶에 대한 적극적 화해의 시도이자 수용이며, 현재의 사랑보다도 더 자신을 확신할 수 있게 하고 자신을 책임질 수 있게 하는 선택이다. 자신이 존재할 시공간의 분명한 선택이며 죽음을 맞이할 자기 역량을 확보하는 행위이다. 그녀의 말년은 장군봉이 ‘어쩔 수 없음’에 시달리며 선택하는 죽음과 차원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소원>의 소원이

 

 

보다 긍정적인 삶의 여정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는 아무래도 <소원>이다. 소원이의 부모는 매우 평범한 일상을 가졌던 사람들이고, 사건 이후에도 조급하고 분노하고, 그러나 사태의 진정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소원이의 가장 중요한 환경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소원이는 일단은 그러한 주변 환경과 큰 상관없이 변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텍스트는 덤벙대거나 무관심한 주변 인물들과는 별도로 꼬마 철학자 소원이의 일관된 변화에 줄곧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선 소원이의 강점을 살펴보자. 소원이는 자신이 알고 모르는 것에 대해 분명히 인지하고(수학 문제 풀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필요한 것을 요구(문제 해설, 머리 묶기)할 줄 안다. 착한 아이고 싶고(범인에게 우산을 씌워줌), 차분한 성격(느린 걸음과 사건 후 본인이 직접 신고)의 소유자이다. 수술 후 아빠에게 범인의 인상착의부터 말해줄 만큼 사리분별이 뛰어나고, 코코몽 인형을 뒤집어쓰고 따라오는 사람이 아빠임을 아는 눈치가 있으며, 배변 주머니를 들키지 않기 위해 사탕 가방을 옆구리에 차고 다니는 영리함을 지녔다.

 

물론 소원이가 유달리 강점이 많았기 때문에 더 빠른 치유의 과정을 밟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변화 과정에서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소원이의 의미 생성(meaning creation)은, 오로지 자신만의 원천을 갖고 이루어진 것은 분명히 아니다. 우선 아빠와의 관계는 그것이 긍정적 국면(범인의 인상착의를 설명한다)이든, 부정적 국면(이불을 뒤집어쓰고 대화를 단절한다)이든, 자신이 크나큰 상처를 입은 현실을 자각하는 존재 탐구의 첫 단계이다.

 

소원이의 자의식은 침묵에서 시작하여 창피함으로 표현된다. 친구들과의 관계를 걱정하고, 가족들에게서 소외될까 두려워한다. 그러한 걱정들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아이구 죽겠네.)으로 수렴되며 ‘왜 태어났을까’를 고민하는 실존적 단계로 넘어간다. 즉, 상처 너머에서 상처 자체를 함유하고 있는 육신과 영의 존재를 인식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코코몽으로 분장하고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아빠의 정체를 밝히고 ‘집에 가자’고 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단계가 명확해지는 때는 모두의 걱정과 긴장 속에 법정진술을 마치고 최종 판결 후 분노가 폭발한 아빠의 다리를 붙들고 ‘집에 가자!’고 울며 외치는 장면이다. 소원이가 자신의 실존을 가족에서 찾았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이는 분노도 폭력도 보복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닌 주변 인물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실존은 오로지 평화로운 가족 안에서만 가능하고, 아이는 그런 존재감을 선택했다. 마지막 단계는 동생을 보고나서 완결된다. ‘나는 아빠를 닮아서 만들고 고치는 것을 잘하는 것 같다.’라는 발언을 통하여 자신의 실존을 완전히 가족 안에 정립시키고, 아기에게 ‘니 참 태어나기를 잘했다.’라고 말함으로써 존재의 긍정을 이루어내는 희망찬 결말을 맺는다. 현실에 대한 자각 이후 이루어진 단계별 의미 생성은 고통, 가족, 생명의 순으로 점차 지평이 확장됨을 보여준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Homo Viator>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며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가족은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그 무엇이라는 점에서 존재의 진리라고 할 만하다. 가족이라는 존재 진리에 근거하지 않은 존재자들은 상상할 수 없다. 이러한 범주를 통해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가족적’이어야 한다.” 마르셀은 가정을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로 규정하며, 이것은 인간이 가족적으로 됨으로써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가정이란 사람이 그의 ‘어떠어떠함’, 곧 외모나 성격, 재능과 소유한 재산 등으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장소가 아니라, 자기자신이 ‘있음 그 자체’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소원이의 동생이 태어난 신생아실에는 다음과 같은 익명의 문구가 적혀 있다. ‘가장 외로운 사람이 가장 친절하고 가장 슬픈 사람이 가장 밝게 웃는다. (그리고 상처입은 사람이 가장 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들이 자신과 같은 고통을 받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도 같은 문구가 등장하는데, <소원>에서는 괄호 안의 내용이 빠져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실존을 찾아가는 소원이에게 가장 어울릴 말은 바로 괄호 안의 말이 아닌가?

 

덧글: 사랑이라는 매개, 환경의 자원들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송이뿐이 김만석을 통해 상당히 역량이 강화되었음은 틀림없다. 그의 주선으로 인해 주민등록이 되었고, 수당을 받게 되었으며, 자신의 실패한 결혼생활을 보상할 새로운 사랑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향을 선택한다. 생활환경의 임파워먼트(empowerment)와 변화들은 그녀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 추구에는 부수적인 요소들일 뿐이다. 그녀가 김만석에게 진정으로 힘을 얻은 것은 오히려 그녀가 귀향한 후 이별의 아쉬움을 잊지 못할 때 그녀를 찾아 온 김만석의 용기 때문일 것이다. 김만석의 방문은 그녀의 인생여정에 완결점을 찍어 주었고, 김만석에게도 웃으며 임종할 수 있는 희망을 선사한다. 이들의 사랑은 두 사람의 실존을 ‘우리’라는 관계 안에서 완결로 이끌어 준다. 그러나 이 사랑은 젊은이들의 육감적 사랑과는 너무나도 다른 유형으로 진행된다. 조만간 죽음으로 맞이하게 될 이별을 전제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김만석이 장군봉의 택시로 송이뿐을 고향 집에 데려다 주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이미 그 사랑은 이별을 시작한다. 김만석이 송이뿐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보름달을 배경으로 하늘을 나는 장면, 이것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ET>에 나왔던 장면으로서 예고된 이별을 상징한다. 배경음악의 가사는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의식이 어떻게 인간의 실존에 영향을 주는지 말해 주고 있다. ‘아름다웠던 그 날을 부디 기억해요. 아름다웠던 그대여 정말 고마워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노인들이 사랑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수용하고 언어로 고백하고 서로를 인정하는 ‘지혜로운’ 공존의 방식으로 사랑을 이루었다면, <소원>에서는 땀흘리고 부단히 노력하는 가족들의 힘겨운 결속의 형태로 사랑이 드러난다. 그들은 사랑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사랑한다. 인간에게 사랑은 본질이지만,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마르틴 하이덱거).’

 

소원이의 가족들은 사랑의 매개이기도 하지만 정말로 부단히 노력한다는 점에서 소원이의 환경에서 유용한 자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원이의 입을 열게 하고 의미 생성을 이끌어 내는 역할은 해바라기아동센터의 소아정신과전문의에게 상당히 의존한다. 사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소원이에 대한 사회복지 서비스의 전문가적 역할을 모두 담당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데, 이러한 전문기관의 연계는 피해자에게 매우 중요한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밖에도 소원이 가족의 중요한 인적 자원들은 물심양면 지원하는 아빠의 친구와 소원이를 그리워하는 친구들이다. 영화는 이들을 지나치게 착한 사람들로 그리고 있지만, 인적 네트워크의 구성은 피해자들의 회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원일 수밖에 없고, 이와 같은 네트워크의 결핍은 비단 사건 후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사건 당일에 학교 주변에는 아이들의 등교를 지도하는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문제의 예방과 회복이 단순히 개인이나 친지들의 책임으로 전가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에 있어서 알려지지 않을 권리와 지역사회 자원의 효용성 사이에 발생하는 괴리는, 사건의 예방과 대처에 세밀한 사회적 설계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덧글: 가해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감옥에 방문하는 일은 사실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보아야 하는 일들이 모두 너무 힘들고,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제가 그곳에 가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대면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나는 어느 학생에게 ‘죄수들에게 숙식조차 제공하는 것도 아까운데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들어가는 봉사가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대답은 ‘그렇다’이다. 세계인권선언이나 세계자원봉사헌장은 ‘모든’ 이에 대한 존중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휴먼 서비스의 대상이 범죄와 연관되어 있을 때, 그 양상은 매우 복잡할 수밖에 없다. 서비스의 내용보다 법적 처리가 우선이고, 대상자들의 심리적 특성도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가해자가 소원이나 다른 등장인물들과 완전히 다른 점이 드러난다. 적어도 영화에서 소원이와 가족이 자신들의 고통을 넘어서면서, 즉 회복단계를 거치며 인격의 새로운 지평을 창조하는 것과는 달리, 가해자(조두순으로 대표되는)는 거짓으로 점철된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에게 소원이를 비롯한 타인은 그저 익명의 객체일 뿐이다. 사랑의 매개로 ‘우리’가 되려고 노력하는 김만석 커플이나 소원이의 가족과는 달리, 가해자는 철저하게 자신을 타인과 분리시킨다. 소원이에게 정신적 신체적 고통은 자신의 실존을 발견하는 인생여정의 첫 단추였지만, 가해자에게 12년이라는 감금의 고통은 자유의 구속일 뿐이다. 두 영화의 여러 주인공들이 책임과 자유를 전제로 한 선택을 계속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선택’하려 하지 않고 다만 회피할 뿐이다.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주체, 즉 모든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할 자기자신의 확립이다. 에리히 프롬은 ‘~로부터의 자유’에서 더 나아가 ‘~를 향한 자유’를 모색하자고 한다.

 

맺는 말

 

지금까지 서술한 등장인물들에 관한 내용은 일단 글쓴이의 의식의 흐름 안에서 일방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규정되어야 한다. 만약 등장인물들을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혹시 완전히 다른 구성이 벌어지지 않을까? 만남은 역동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영상텍스트의 해석을 통해 내가 그들의 삶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과, 그들이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 것의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것이다. 철학 사전에 따르면 ‘해석적 탐구는 항상 저자가 염두에 둔 것을 능가하기 때문’에, 역사는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우리의 예언과 계획을 좌절시킨다. 역사는 의지와 결과 사이의 간격이고, 의도와 의미 사이의 비-동일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는 항상 노상에 있고, 인간은 호모 비아토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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