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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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 1374] 답답하신 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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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24 ㅣ No.1377

+ 찬미 예수님 !!!

 

   우선 오랜 냉담에서 벗어나 다시 하느님품으로 돌아오신 것에 대해 축하드립니다.

 

   아마도 성령 피정에 많이 놀라신 것 같군요.  여기에 거부감을 느끼고 계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아울러 교회 안에서도 논란이 많은 부분들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의도야 어찌 되었던 모든 신자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한다면 문제점도 있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문제의 발단은 아마도 성령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결여가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성령에 대한 정확한 인식부터 확립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방대한 <성령론> 중에서 님께서 답답해 하시는 부분의 답이 될 수 있는 부분만을 간략하게 발췌하여 나눔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1. 성령의 역할

   첫째 : 성령은 인간을 진리 쪽으로 인도하고 안배하십니다.  여기서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말하여, 이는 곧 인간이 구원을 받아서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셨던 신적 생명을 얻게 해 주는 진리입니다.

   둘째 : 성령은 인간에게 사랑의 힘, 봉사하고자 하는 힘, 회개의 힘, 정의 평화, 사랑, 복음 전파 등 구원적이고 해방적이고 보이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인간의 역사를 이끌어 왔던 많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는 능력을 부여하심으로써 인간이 공동선을 추구하게끔 해주고, 또 인간을 성화시켜 주십니다.

   셋째 : 무엇보다도 성령은 교회의 영혼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공동체에 생명의 역할을 하십니다.  교회의 영혼이신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교회를 항구히 거룩하게 하시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성전으로 삼아 그 안에 거처하시면서 기도하시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중명해 주십니다.  또한 성령은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시고, 교회를 가르치시고 지도하십니다.  예수님 승천 후의 시대를 흔히들 "교회 시대" 혹은 "성령의 시대"라고 부른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2. 성령의 은혜(이사야서 11장 2-3절)

   슬기(지혜), 통달(깨달음), 의견, 굳셈(의지력), 지식, 효경, 외경(두려움)

 

3.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

 

4. 성령의 특은(카리스마)

   <성령의 특은>이란 성령께서 각별한 호의로 내려주시는 몇몇 호의, 곧 예언, 영의 식별 능력, 기적 등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전서 12장 8-10절에서 성령 특은의 몇가지 예를 열거하고 있는데, 예언, 가르침, 지혜를 밝혀주는 은사, 지식을 전해주는 은사, 믿음, 병 고치는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 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5. 나눔

   1) 우리는 성령을 언제 받을까요 :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은 바로 성사의 생활입니다.  성사 자체가 인간들의 일생을 외형적 상징을 통해 표현하는 하느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성사에는 7개의 성사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성사인 세례성사(성세성사) 때가 바로 우리가 성령을 받는 때입니다.  세례성사가 바로 성령을 받는 성사이고, 그로 인해 지금까지의 죄를 벗어버리고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새로 태어나는 때입니다.

   2) 우리는 성령을 받기만 하면 될까요 :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받기만 해서는 안되지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성령과 함께 하면서, 그분의 일을 함께 해야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성령의 역할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미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도와서 그분의 일을 함께 해야 할까요?  바로 견진성사를 받는 때부터입니다.  견진성사가 바로 그런 의미를 가지는 성사입니다.  이때야 비로서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역할이 시작됩니다.

   3) 정말 성령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실까요 : 그렇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 14장 16-17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협조자(위로자) 성령을 보내주시고, 또 그 성령께서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알아차리든, 알아차리지 못하든 성령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만약 우리의 삶의 일상 속에서 성령이 함께 하심을 못알아차린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허약함 때문이겠지요.  아니면 악령의 농간이든지요.

   4) 우리의 평범한 삶의 일상 속에 언제 성령을 체험할까요 : 성령의 역할을 잘 묵상해보시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몇가지 들어보겠습니다.  토요일 오후 KBS 제1 TV에 <사랑의 리퀘스트>란 프로가 있습니다.  힘든 이들의 갖가지 사연에 많은 분들이 눈시울을 붉힙니다.  자기와는 직접 관계도 없는 이들의 힘든 삶에 왜 눈시울을 붉힐까요?  복잡한 버스 안에서 자신의 무릎도 아픈데 젊은 아기 엄마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나서 괜히 어색함 가운데서도 가슴 깊숙히에서 은은히 우러나오는 그 기쁨은 무엇일까요?  항상 맞아들이는 남편의 퇴근길인데도 어느 날 갑자기 식구를 위해 고생하는 모습에 고맙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면서 사랑의 감정이 새롭게 새록새록 돋아옴은 무슨 이유일까요? ~~~~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셨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이것을 하느님 안에서 느끼신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의 체험이 아닐까요?

   5) 그렇다면 성령 봉사자들이 강조하는 성령체험은 무엇일까요 : 아마 님의 답답함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겠지요.  성령 봉사자들이 강조하는 성령체험은 바로 성령특은에 해당합니다.  성령특은도 바로 성령의 한 모습이겠지요.  단지 성령의 외적이고 감각적인 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특은은 성령의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취지의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가 막 태동한 초기에는 보다 많은 이들에게 하느님 현존의 증명이 필요하여 기적이나 방언, 치유의 은사 같은 성령의 외적인 표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초기의 사도들이나 많은 선교사들에게는 특은의 은총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고 또 실제로 그들에게는 많은 성령의 특은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누구나가 알고있는, 그래서 하느님의 존재를 특별한 방법으로 굳이 알릴 필요가 없어진 이 시대에 성령의 외적 표지는 필요가 없다."라고 말입니다.  조금 과격한 표현일지는 몰라도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 바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것은 종말론적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내적인 일치를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갈 때에야 가능합니다.  영적 존재이신 하느님과의 관계 맺음은 어쩌면 외적인 표지보다는 내적인 일치가 더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성령특은도 성령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특은도 소중한 체험입니다.  자신의 신앙에 회의가 들 때, 자신의 신앙이 권태기에 빠질 때, 삶의 고통 중에 하느님이 자꾸만 미워지고 멀어지려 할 때, 이럴 때 성령의 외적인 체험은 자신의 신앙을 다잡아주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표지보다는 내적인 일치를 추구해야하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무엇이 더 가치가 있고, 어느 방향에 지향을 두어야 할까요?

 

   문제는 이러한 외적인 표지만이 성령의 전부인양 인식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신앙이 외적인 표지만을 추구한다면 참된 신앙의 모습은 사라지고 오직 형식주의나 신비주의가 판을 치는 신앙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말입니다.  또 문제는 성령특은적인 특이한 체험을 가지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부족하다고 매도하는데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들의 삶은 전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는데도 방언 한번 경험했다고 해서 자신은 성령을 받았다고 착각하는데 있습니다.  문제는 삶의 일상에서 성령을 체험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성령 세미나나 피정만을 쫓아다니는 일부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성령은 그렇게 좁고 작은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 범위를 훨씬 넘어서 존재하시는 광대무변의 초월적, 초자연적, 초역사적 존재이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분이십니다.  결코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 간섭받고 살고있는 인간의 외적 감각 안에 갇혀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외적 표지의 좁은 품보다는 그분의 그 넓으신 품에 안기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삶 하나하나에서 그분을 느끼고, 우리의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영성 서적도 도움이 되겠지요.  그러나 성서 공부를 먼저 권하고 싶습니다.  어느 책보다도, 어느 체험보다도 더 정확하게 성령을 알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함께 하시기를, 그리고 삶의 작은 일상 속에서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시도록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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