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화)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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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영혼 [222.110.253.*]

2015-10-04 ㅣ No.10997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고초가 크시겠습니다. 아버님의 영육건강을 기원합니다.

요즘 필자가 관심갖게 된 부천 요양전문 가은병원의 사례를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이 병원은 의사이신 복자 요한 원장님과 행정실장 마리아 자매님이 부부로서 예수성심전교회 지도 사제 고무찬 베네딕도 신부님께서 병원 사목중이신 곳입니다.

 

필자는 현재 이곳의 미사를 세 번 참례하였는데 오는 6일(화요일) 오전 11시 미사에 세례성사가 있다고 하는데 시간 허락되시면 한 번 왕래하시는 것이 어떨런지요? 주간 정기 화요 미사외에 매월 둘째 수요일에는 암환자와 가족 및 봉사자들을 위한 미사가 신설된 바 있는데 기도중 기억해주시면 좋을듯 합니다.

 

신설 수요일 미사에서의 소 회의실 열 두 분 함께한 신부님 강론에서는 어떤 임종 환자 소식을 듣고 황급히 듣고 달려가신 은사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환자의 고통속 생명 바이오선이 무척 불규칙적으로 움직여 의사들도 더이상 손 쓸수 없었기에 신부님을 황급히 모시게 되어 기도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어느사이 바이오선은 평온을 이루었으며 의사도 간호사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는 소식입니다. 더불어 환자는 평화속에 잠드셨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의학적으로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은사로서 나중 우연히 이 병원 노래자랑이 있다하여 신청중에 병실을 입회한 바 있는 수간호사의 신비롭다는 채험론을 다시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필자는 절두산 제단에 올라 미사곡을 8년 부른 경력이 있기에 암 환자들 모이는 이 노래자랑에서 무엇을 부를까 검토하게 되었습니다.

 

노래 치유(치유는 하느님의 완전한 치료, 치료는 내가 응답하는 것)를 위하여 우리는 남성성(시음), 여성성(청음)의 공유로서 고, 저음등을 하느님 권세음과 인간의 권력음 사이로 시소를 타게 됩니다. 아무리 세속 프로가수라고 한들 이러한 음들 관심만 가지면 식별은 눈을 감을수록 더 잘 보이기 마련이지요.

 

이에 필자는 요즘 각광중인 알리의 '서약'이라는 노래를 단시간 내에 100번 넘게 연습해 왔기에 그 가사를 살필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매님이 전례 및 자모회 봉사를 통해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 참 많다고 보여집니다. 필자는 시, 청음의 원칙 준수를 위해 검색하고 엔터만 누르면 금새 나오는 악보와 원곡을 통한 연습을 필수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용중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암 환자들에 대한 배려차원에서 어렵게 다가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대만을 사랑하다 죽으렵니다"에 가사들이 생과 사를 연결짓는 신앙인들에게는 이해가 수월켔으나 다수 이방인들 관점에서 옥의 티로 남은 것입니다. 이에 유익종의 '마침내 사랑이여' 아니면 작년 나온 신곡으로 한설민의 '어떡하니"라는 곡중 하나를 택일해야겠다는 생각중에 노래자랑 신청자가 너무 많이 몰려 이곳 병실의 어느 보호자를 따라간 필자는 준 보호자였기에 사전 탈락자가 되었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역시 그날의 임종 환자 생명선 은사 소식 청취처럼 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좋은술은 나중에 나온다는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첫 기적처럼 현세보다 내세를 지향하는 천주교인으로서 신비의 사례는 너무나 많이 듣고 보았기 때문인데 전례 봉사를 하시면서 내 자아를 버리는 현상들 자매님도 참으로 많이 경험하셨을줄로 봅니다. 한편 환자의 생명선이 요동치다가 수평적으로 바뀌는 사례는 오늘날 종부성사를 노인들이 노자성사를 받으면 죽는다고 두려워할 수 있기에 병자 성사로 바뀐 사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세속 호스피탈도 하느님 사랑 엄존하시기에 그 어원 호스피스도 그냥 있는것이 아니고 인간의 모든 트라우마 해법도 하느님 사랑 망각할 시는 보복심 등이 앞서고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필자도 매우 공격적 성향입니다. 아홉살 때 아버지 숙환으로 돌아가시어 필자처럼 철없던 당시 어린 큰형의 폭포수같은 매를 맞고 자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격적인 아버지의 딸인 자매님도 공격성향이 엿보입니다. 선수가 선수를 알아보는 현상이라 할 수 있지요. 자매님은 이곳에서 답을 달라고 했는데 어찌 인간들이 하느님의 답을 밝힐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어렴풋 장님이 장님과 손을 맞잡고 눈을 감으면 더 잘보이는 주님의 길을 더듬어 가는 정도로 이해해주심은 어떨런지요? 우리 인간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공격적인 사람들이 수비의 중요성을 더욱 인식하기 마련일 것입니다. 요즘 독일 대표 수비수 출신 슈텔리케 감독이 한국 축구 대표팀을 잘 이끄는 현상 속에서도 고무적인 현상들이 보일 것입니다.

 

치매라는 것은 좌뇌와 우뇌를 연결짓는 뇌량 세포의 상처 문제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지 않고 믿는 마리아가 보고서야 믿는 마르타보다 더 행복하다는 예수님 말씀이 성령 은사임을 믿기에 자매님이 그동안 교회 봉사 등으로 수고해 왔기에 (믿고, 듣고, 보는)신앙과 (보고, 듣고, 믿는)과학의 만남을 고려해 보라는 계시인듯 합니다.

 

따라서 "나는 치매가 아니다!"라고 강변하시는 아버지 입장을 조금 더 할애해주심은 어떨런지요? 필자가 공격적이라 여기에 큰 답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아버님의 그동안 율법주의 및 바리사이 주의가 지금도 가족들을 피곤하게 만들어 주시겠으나 반대로 몸도 마음도 더 불편해진 아버지 입장에서는 더욱 그 율법 이면의 바리사이 기질 작용으로 누구보다 더 외로우시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실 것이라 사료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기도를 더해 드리십시오. 전례, 자모회 등 봉사생활을 더욱 깊이 하실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필자의 공격성 이면에는 인간의 결벽주의 등으로 전례 봉사는 제일 나중에 하리라.는 생각으로 지난 25년 교회 봉사 활동 중에 갓 입교 신자들을 왜 전례 봉사를 시키실까? 전례들 참 잘한다. 가톨릭의 전례는 참 자랑스러운 거야 등의 독백을 이뤄오기도 하였습니다.

 

필자를 폭압적으로 때리고 맞아와야 했기에 죽은 침묵으로 대처중인 큰형이 최근 꾸르실료를 출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기도 하였습니다. 베드로 닮은 공격성 핏줄로 지난 9월 1일 9주기를 맞는 큰 형수 카타리나 영혼의 기도등이 점철되어 익명의 신자로서 아버지 선종 이후 냉담사 이루었다가 교회로 돌아간 큰형이 열정적으로 봉사 생활을 이루었는지 신부님께 남성 총구역장 권고를 받았나봅니다. 그런데 호미나 쟁기에 연연하며 주님 부르심에 망설인다는 느낌입니다.

 

필자는 은평구 신사동 성당 울뜨레야(자! 가자!) 1대 남성 부간사로서 2년간 매우 열정적인 봉사 활동을 수행, 성공적인 결과로서 신앙 황금기 추억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레지오 마리애와 시작, 마침 기도가 같은 레지오 크리스티들의 꾸르실료(짧은 코스) 이전과 이후의 관점은 자매님의 현세와 내세 관점과 같아질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입니다. 따라서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의 준비성으로 아버지 요양원으로 모시는 문제를 검토하심이 더 필요할듯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자주 고려장으로 모시는 범죄인이기도 하였습니다.

 

치매 간병이 힘들어 당장 요양원으로 모시고 싶은 생각 어찌 인간적으로 탓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자매님의 현재 상태는 자칫 믿음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이분법 사고로 정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과학의 만남으로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시고 그것을 현대판 고려장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도 교회 봉사 활동을 더욱 치중함도 좋은 것이라 보여집니다. 하지만 아버지도 요양원 생활의 고독을 두려워 하기에 그것을 완강히 부인하고 계십니다. 이때에도 답은 하나입니다. 성령을 초대하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이미 함께 하심을 더욱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찬미를 위해 교회 봉사를 한다지만 인간적 계산으로 더욱 큰 갈등을 빚기도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를 가던지 교회문을 나서든지 그리스도미사=크리스마스의 문은 하나일 것입니다. 이왕이면 성부의 침묵과 성모의 자모 지금의 고행 세 가지를 더욱 쇄신하시면 좋을듯 합니다. 답을 더욱 주님께 의탁할 수 있음에 감사와 찬미를 곧 올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살며 기도하며 수많은 삶과 죽음을 미리 경험하기도 합니다. 거부, 분노, 타협, 우울, 수용 죽음의 다섯 단계를 아버지와 딸 지금 경험하고 있는 마당에서 과연 저마다 믿는 하느님께 무엇을 간구하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아버지의 침묵이 더 고독하게 다가오기도 할 것입니다. 그 침묵조차 거룩한 주님의 침묵에 안기는 강물같은 평화의 침묵으로 노래하기 위하여 우리는 인생이라는 길을 순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두려워 합니까? 영혼까지 죽이시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필자는 전례를 나중에 봉사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왔기에 연일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죄인입니다. 그런 가운데 요즘은 차비조차 떨어지는 마당에서 성가 순례 작전을 수행중입니다. 오리지날 전례 봉사자가 되기 위한 수단이지요. 하느님과 씨름하다 보니 지난달 아산병원 가은병원 등의 실적은 10만원 적자에 햄스트링 부상을 안고 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날 잠에서 깨어날 때 성 금요일 태생 아들 태성이 베드로가 신부님 따라 제대 오르던 마지막 순간이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복사 선배 형들보다 머리 하나가 작고 맞는 옷이 없어 계단 오르다 걸려 넘어진 귀여운 녀석의 일화를 보며 가족들 양평 사랑의 성모원으로 떠남을 배려해주시던 신부님 은사였습니다.

 

결론 없는 의견을 드려 죄송합니다. 다만 과거와 미래로 도둑맞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현재에 최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내 죽은 침묵을 되살아나는 침묵으로 이끄시는 주님 은총에 감사 드리며 생각도 침묵으로 성체조배를 이루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찬미하며 아버지를 위해 더욱 기도 기억하시면 좋을줄로 믿습니다.

 

필자는 익명의 신자로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께는 십자가의 성요한 가 세례명을 붙여드린바 있는데 반목중인 큰형 요셉과 냉담중인 작은형 요왕 일가 그리고 지난해 연중 마지막 날 선종하신 연희 마리아 큰 어머니 바램으로 어머니를 장례미사로 보내지 못한 이방인 사촌 형들께도 선교여행 더욱 성공리에 이뤄질 수 있기를 기원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전에 부족하고 염치 없는 죄인이지만 신 사도행전을 성공리에 써 나갈수 있도록 간절한 청원 담아 기도하는 자매님은 아름답습니다.

 

끝으로 영화 사랑과 영혼 개봉되던 싯점 필자 성당으로 돌아온 날 성체조배중이시던 필자 어머니와 갑장이신 85세 정 이사벨라 수녀님 고리 은사로 명동 성당 어느 수녀님께 얻은 우리의 아름다움이라는 시 한 수를 전해드립니다.

 

☆ 우리의 아름다움


기대한 만큼 채워지지 않는다고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믿음과 희망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더 사랑하지 못한다고 애태우지 마십시오.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지금 슬픔에 젖어 있다면

더 많은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고 자신을 탓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흘리는 눈물,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누군가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한다고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아파하면서 용서를 생각하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모든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고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비우면서 괴로워하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빨리 달리지 못한다고 내 발걸음을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내 모습 그대로 최선을 다하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세상의 모든 꽃과 잎은 더 아름답게 피지 못한다고 안달하지 안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피어난 거기까지가 꽃과 잎의 한계이고

그것이 최상의 아름다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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