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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훈 [saint72] 쪽지 캡슐

1999-08-23 ㅣ No.355

 

        

               - 가톨릭의 종교 체험관 -

 

 

 이제 가톨릭 신앙과 개인의 종교 체험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겠

다.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이 개인의 종교  체험을 종교적 진리의

규범으로 하는 데 반대한다는 이유로 가끔 체험 그 자체의 가치

마저 부정하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 그래서 형식적 신조를 강조

하고 있다든가 신조를 관념적으로 승인하는데 그친다고 말한다.

 

우리는 종교적 진리가 체험되고 음미되며 개인이 그 내심의 사실

에서 진리에 대하여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

이 아니다. 그저 그런 종류의 심증은 그 본인에게는 대단히 유력

하며 어느 경우에는 조금의 의심도 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그것

을 가지고 타인에게 임하는 것은 심증의 성질상 무리라고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가톨릭 신자가 자기 체험을 제멋대로 휘두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들에게 종교적 체험이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그야말로 큰 착오

이다.

 

 시험적으로 성실한 가톨릭 신자의 면전에서 성체에서의 그리스도

의 실재나 미사 성제에 있어서의 제단상의 그 재림을 무엇인가 이

유를 들어 부정해 보라. 그는 많은 경우 웃으며 대답하지 않을 것

이다. 그것은 그의 부모는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의 형제는 그를

모른다고 남이 말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간 영성 생활에 깊이 들어갔던 사람이라면 예수는 그에

게 이 세상의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바가 없을 만한 분임에 틀림없

다. 인간애의 어떤 표현이나 형용을 가지고서도 아직도 모자랄 정

도의 무엇인가가 그의 가슴속에서 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아침 일

찍 제단 앞에 무릎 꿇고 성찬의 잔치에 참여할 때, 혹은 조용한 저

녁 기도 속에, 또는 야밤에 눈을 떴을 때, 그 옛날 엠마오 마을을

찾아 여행하는 제자처럼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루가 24, 32)라고 소리 치지 않을 자 있겠는가.

 

 ’준주 성범(遵主聖範)’이 기술한 주님과 그 제자의 친밀한 대화

나 교제는 결코 드문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열심한 신자의

일상 경험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 저서가 그만큼 모든 가톨릭 신

자들 사이에서 애독되고 있다. 물론 토마스 아 켐피스의 준주 성

범은 프로테스탄트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은 틀림없으나 그들

은 반드시 자기 정신 생활과 차이 나는 많은 부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 마음속을 그렇게까지 잘 써 주었다."라는 느낌을 갖

는 사람은 아마도 가톨릭 신자 속에 있는 것처럼 많지 않을  것이

다.

 

 얼굴 모습은 같아도 인상은 천차 만별인 것처럼 마음속은 더한층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주성범’이 그다지도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그 체험 기록에 일종의 보편성이 있기 때문

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나는 언제, 어디서, 그런 경험을 하였

다."고 쓰고 있지는 않다. 그의 깊은 구체적 체험(그 책을 이론이나

상상으로 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만일 있다면 복음서가 종

교적 상상의 소산이라고 말하는 이른바 고등 비평가 정도일 것이다.)

이 바닥에 깔려 있고 보편적인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데에

그 서적의 생명이 있다.

 

 

 이것을 루터가 쓴 것들에 비하면 천지의 차이가 있다. 루터는 끊

임없이 자기 체험에 이유를 붙이고 있다. 그리고 갖다 붙인 그 이

유가 그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그의 후예

들인 프로테스탄트들이 즐겨 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우선 성령을 받았다든가, 성령의 계시가 어떠하다든가 하는 자기

변호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해야 자신이 설교하는 신앙의 근거가

자기에게 있지 않고 자신의 밖에 있는 외부적인 요소 - 그들 말

로는 성령, 계시 등의 초월적 현상의 임재 - 에 있게 되므로 책임

지지 않고 도망갈 비상구가 마련되어 있는 셈이 된다. 이런 형국

이므로 그들의 설교의 십중 팔구는 자기 체험과는 관계가 없는 수

사적 어구나 까닭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그럴 것이 1년 365일

그렇게 매일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체험이 뒤를 이어 제대로 나

올 수가 없다.

 

 쓸데없는 이야기이겠으나 나는 주말마다 교단에 서게 되는 개신

교의 목사나 여러 선생들의 대담과 용기에 탄복한다. 동시에 자기

비판 능력이 있는 지성인에게는 참으로 괴로울 것이라고 마음 깊이

동정한다. 그들 사이에 스스로 반성하고 "입은 마음의 충만으로 말

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이에 반하여 가톨릭의 태도는 지극히 신중하다. 필경 우리에게는

마음속의 것은 하느님을 상대로 한 로맨스이므로 이것을 여러 사

람에게 노출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꺼리게 된다. "너와 나"로 충분

하다. 그런 한, 색채는 다르나 모든 신자에게 공통된 것이므로  지

나치게 글로 쓰거나 선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또한 자기 체

험이 그렇게 특수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또한 그런

자랑을 가질 만하지도 못하다.

 

 우리는 수많은 성인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최고도의 가톨릭 종

교 체험 기록이다. (가톨릭 종교 생활의 진수를 잡으려 하는 프로테

스탄트는 이유나 이론은 제쳐놓고 정확한 역사적 방법으로 쓰인 성

인전을 읽는 것이 가장 가까운 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기 수

양을 위하여 그것들을 읽는다. 그리하여 언제나 자기들의 종교 생활

이 얼마나 천박한가를 통감하고 있다. "나의 체험에 의하면"이라는

등 큰소리 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성자의 귀중한

체험을 가능케 한 신앙과 그 실행 방법을 배우고 기도와 성사 속에

서 이것을 일상 생활에 응용하는 힘을 얻게 된다.

 

 개신교의 주일 예배 장소로서 교회는 말하자면 그들의 학교이다.

그들은 그들의 교회 즉, 학교에서 배운 것을 인생에서 활용한다.

그에 반해 가톨릭에서 주일의 미사 전례는 인생의 원동력을 공급

한다. 그래서 목사나 장로의 체험등을 경청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들 개신교도들의 것이지 내 것은 아니다. 가톨릭에서는 "이제부

터이다."라고 생각하며 주일에 교회의 문을 나서 세속으로 돌아간

다. 그의 종교 생활은 교회 내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프로테스탄트에게는 수사와 찬미가로 만들어진 분위기의 흥

분이 가시면 모든 종교는 소멸한다. 목사나 장로도 일단 교단에

서 내려오면 어떻게 하여 내 아내를 즐겁게 해주고 내 자식을 기

르는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에다 청년 남녀에게 선생

님으로서 숭배받거나 때로는 그 반대로 미움받아 욕먹을 때도 있어

견딜 수가 없다. 실로 기괴한 생활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가톨릭 신자에게 있어 제단에 서는 사제는 국적이 다르거나 피부색

이 검거나 희거나 노랗거나, 웅변이건 말솜씨가 나쁘건 조금도 지장

이 없다. 얼마나 그가 대표하는 대사제 그리스도에게 어울리는가는

그 자신의 양심 문제이다. 신자는 그의 양심에까지 간섭하지 않는다.

요는 그가 경건하게 성사를 집행하고 하느님의 깊은 뜻의 충실한 분

배자이면 되는 것이다. 인간적 재능의 유무는 문제가 아니다.

 

 과거에 수도 생활의 찬미자였던 한 목사가 안식일에 가톨릭 교회

를 찾아와 미사에 참례하고 난 뒤 경탄하여 말하기를 "설교도 없

고 성서 낭독도 없이 수백 명의 회중이 그저 기도드리고 노래 부

르고 한시간여에 걸쳐 끊임없이 경건한 태도를 유지하고 권태의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은 실로 찬양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나에

게 이 감상은 조금 의외였으나 생각해보니 그럴 것 같았다. 개신교

와 가톨릭은 이름은 같은 그리스도교이나 실질은 전연 다른 종교이

다.

 

 그들은 단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분 정도로만 여

기며 그분의 성체를 모시는 성찬식도 그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

하는 행사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지내는 유교식

조상 제사가 왜 맥빠진 것이 되는가를 유념한다면 성찬의 전례를 단

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한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종교가 얼마나

의미없는 것이 되는가를.   

 

 

 우리는 주일 미사 때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게서 듣고 살아계신 그

리스도에게 말씀드리는 것이다.

 

 

 "예수의 일행이 여행하다가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

자가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 들였다. 그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시

중 드는 일에 경황이 없던 마르타는 예수께 와서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두십니까? 마리아

더러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

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루가 10,

38-42)

 

 

 마리아의 마음을 마르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마리아는 성경을 손에 들고 마이크 앞에서 손풍금을 연주하며 가

두에서 자기의 체험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 이와시타 소이치 신부의 저서 ’가톨릭 신앙’ 중에서 -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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