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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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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호 [moonmichael] 쪽지 캡슐

1999-09-29 ㅣ No.672

게시자: 문정호(moonmichael) 마지막 얼굴

게시일: 1999-09-28 14:27:08

본문크기: 9 K bytes 번호: 378 조회/추천: 1/0

주제어: 그 남자와 우산

 

 

            마지막 얼굴

             - 그 남자와 우산 -

 

 

  성당 밖으로 나왔다. 빗줄기는 성당 앞마당에 깔린 돌조각

 

들을 세차게 때리며 쏟아졌다. 빗물은 성당언덕 아래쪽을 향

 

해 하얗게 겁에 질려 쏜살같이 내려가고 있다.

 

 

  언덕을 내려와서 을지로입구로 향했다. 물론 우산을 받았다.

 

그래도 빗줄기는 우산을 뚫고 내 얼굴과 옷을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적셨다. 청계로 향하는 고가도로 아래에 있는 하

 

수구 맨홀 뚜껑에선 분수처럼 물줄기를 하늘을 향해 내뿜고 있다.

 

 

  좁은 하수구엔 너무 감당하기 힘든 양의 빗물이 쏟아져서 그

 

러리라는 당연하고 당연한 생각을 했다.

 

 

  내 안에서 넘쳐나는 물이 있다면 그처럼 하늘을 향해 솟구

 

쳐 올랐으면…… 하는 바램을 잠시 가져보았다.

 

 

  을지로입구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갔다. 빗물은 계단을 타고

 

지하철역 안으로 내려가고 있다. 지난 여름 물에 잠긴 지하철

 

역이 생각났다.

 

 

  을지로 3가 역으로 향했다. 2호선 전철기차를 탔다. 사람들

 

은 비가 와서 그러겠지만 알맞게 여기저기 빈자리를 남기고

 

앉아 있었다. 나는 노약자 보호석 맨 왼쪽에 앉았다. 가운데

 

한 자리는 비어 있다. 누군가 곧 앉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

 

다.

 

 

  두 세 역이 지나자 한 남자가 기차 안으로 들어와 내 머리

 

위에 있는 선반 위에 검은 비닐봉지를 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 검은 봉지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올려다보자 그 남자는 그 봉지에서 내게 물이 떨어질

 

까봐 꺼려해서 쳐다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한 표정으로.

 

 

  나는 그런 게 아니었는데. 다만 그 남자의 모습이 어딘지

 

낯익어 보여서일 뿐이었는데. 순박하고…….

 

 

  봉지를 올리고 나서 그 남자는 내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앉

 

았다. 등을 의자등받이까지 눕히지 못하고 의자의 절반 정도

 

만 차지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를 하고 있다.

 

 

  "편하게 뒤로 앉으세요."

 

  "옷이 버릴까봐서 그럽니다."

 

  내 옷을 걱정해주고 있었다.

 

  그날따라 난 청바지를 입고 있어서 그런 건 신경쓰지 않는

 

데도 그랬다.

 

 

  그 남자의 머리카락과 옷은 빗물에 흠뻑 젖어있었다. 베이

 

지색 면바지는 빗물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화학섬유로 짜

 

여진 듯한 남방은 그런대로 빗물이 묻은 걸 감추고 있었다.

 

 

  난 갑자기 그 남자의 비에 젖은 바지를 보고 내 우산을 생

 

각했다. 우산을 그 남자에게 줄 수만 있다면 너무 기쁠 것 같

 

았다. 그러나 그 남자가 선뜻 그 제의를 받아줄지 잠시 걱정

 

이 되었다.

 

 

  난 믿었다. 그것도 하느님의 뜻일거라고.

 

 

  "저, 어디까지 가세요?"

 

  "성남까지 갑니다."

 

  "전철역에서 내리면 댁이 먼가요?"

 

  "예."

 

  "저는 전철역에서 내리면 집이 가깝거든요. 이 우산을 가지  

 

  고 가세요."

 

 

  (잠시 사양하다가, 너무 쉽고도 고맙게도)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 걸 배웠으니 나도 남에게 좋은 일

 

  을 하겠습니다."

 

  "이게 무슨 좋은 일입니까? 저는 우산도 많고 집도 가까워

 

  서 그럽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하는 표정이 그 얼굴 전체에 나타나있었다. 나

 

는 그렇게 순박하고 마음씨 좋게 보이는 분을 별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남의 보잘것없는 도움까지도 그렇게 고맙게 받

 

아주시는 분을.

 

 

 

  "60이 안되신 것 같아요."

 

  나는 남의 나이를 물어보게 될 경우에는 조심스럽게 내가

 

생각하는 나이보다 5살이나 10살 정도는 항상 아래로 내려서

 

말을 하는 버릇이 있다. 혹시 상대방의 나이보다 더 많게 보

 

인다는 말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이 굉장히 속상해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61살입니다."

 

  "그러시면 올해가 환갑이시겠는데, 환갑은 지나셨나요?"

 

  "아직 안 지났습니다. 생일이 겨울입니다. 11월이요."

 

  "굉장히 착하게 사신 것 같아요. 얼굴을 볼 때."

 

  "예, 그렇게 살았어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정말 조금도 의심이 가지 않는 믿

 

음이 가는 말씨였다.

 

 

  더 말을 나누고 싶었다. 그렇게 순박하고 착하고 진실된, 아

 

니 나의 제의를 순순히 받아주신 고마운 분과 함께.

 

 

  전철은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성남에 있는 도로는 굉장히 경사가 심하게 나 있던데요."

 

  "예, 거기는 뚝섬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을 정부에서 이주시

 

  켜서 산동네에 집을 지어서 살게 해서 그럽니다."

 

  "지금도 그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고 있나요?"

 

  "아닙니다. 지금 그 사람들은 거의 다른 데로 이사를 갔습니

 

  다. "

 

 

  그 남자는 건축공사장에서 노동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위

 

험하진 않은지 걱정이 되었다. 지금은 산재보험도 잘 돼있어

 

서 보상도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너무 긍정적이고 착한  

 

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아타야 할 역이 다가왔다. 내려야 된다고 말했다. 고맙다

 

는 인사를 했다. 일어서니까 한 번, 기차 문이 열리고 내릴

 

때 한 번, 기차가 움직일 때 한번.

 

 

  내려서 기차 앞쪽으로 걸어갔다. 기차가 서서히 출발하고

 

있었다. 내가 기차 3량 가량 앞으로 걸어나갔을 때 기차는

 

점점 더 속력을 내어 달리고 있었다. 그 남자는 기차유리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 내 모습을 찾고 있는 듯한 얼굴이 순식

 

간에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마지막 얼굴이…….

 

  그렇게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1999. 9.20(월) 지구타기 17653일째 되는 날 문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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